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5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7-14)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할 성경 말씀

 

많은 신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기록된 문자적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조금만 깊이 따지려 들면 믿음은 순전하고 단순해야 하는데 그러면 신앙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비난까지 한다.

 

베드로 사도가 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므로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했으니 더 그렇다.(벧후1:20,21)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개인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신 저작 당시의 상황과 저자의 의도를 반드시 감안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비추어 해석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따지지 않고 단순히 기록된 대로만 해석하여 잘못 가르쳐져 온 대표적인 예가 오늘의 본문이다. 또 그럼으로써 신자의 신앙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다. 자세히 살필 내용이 여럿이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 하나만 살펴보자.

 

모세가 기도하자 여호와가 당신이 이미 선포한 계획을 번복했다는 구절이다.(14절) 그래서 신자더러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입증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예수님조차 땀이 피 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바꾸지 못했지 않는가?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응답되었고 또 그 전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만 했다. 신자는 예수님을 닮아가길 노력해야 하는데 바로 이런 점부터 그대로 따라야 한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번복 혹은 취소가 가능하다면 뒤집어서 말하면 신자의 뜻과 계획대로 응답되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아직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기도하는 자의 뜻대로 응답이 되었다면 지난 몇 주간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를 위해 우리말을 잘 듣는 신을 우리가 만든 것과 다를 바 하나도 없지 않는가? 본문은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다. 정말로 사사로이 풀어선 안 되고 정밀하게 앞뒤를 따져봐야 한다.

 

모세가 이끌어낸 백성

 

우선 하나님이 모세에게 산 아래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했는가?(7절) 네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네 백성이 부패했다고 한다. 당신의 백성이 아니라 모세의 백성이고, 출애굽도 모세가 행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질투하고 격분하여서 당신의 백성과 완전히 선을 그으시려는가? 아니면 모세가 평소에 출애굽의 공을 자기에게 돌리고 백성 위에 군림하겠다는 뜻을 보였는가? 당연히 둘 다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본문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과 결과를 함께 대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앞뒤 문맥에 비추어 보는 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 하는 가장 첫 번째 방안이다.

 

정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절연할 계획이었다면 모세의 잠간의 그것도 한 번의 기도로 뜻을 돌이킬 리는 없다. 하나님은 그럴 정도로 변덕쟁이가 아니다. 모세는 지난 사십 일 간 시내 산 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새겨주신 두 돌 판과 언약궤를 비롯한 성막 관련 규정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지금은 산을 내려가기 직전이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또 그런 말을 한 것은 모세를 40일간 기다린 후이다. 모세가 오래 끈질기게 기도할 상황이 아니며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또 모세가 자신의 권위를 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중에 자기를 대신 심판하더라도 동족을 제발 살려달라고 중보기도 했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했던 말과 생각을 그대로 모세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아니라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냈다고 선언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통솔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야하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양떼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가르쳐주신 것이다.

 

또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을 징계 내지 심판할 것인데 그 이유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당신의 법칙은 심은 대로 정확히 거두게 하는 것이다. 각자를 그 지은 죄에 따라 완전하게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목이 곧은(9절)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해 참 회개를 하지 못한다. 인간이 그 정도 수준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너무 잘 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두 가지 계획

 

하나님이 모세에게 밝힌 계획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는 것이고 또 그런 다음에 모세로 큰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스라엘 전부를 진멸하지 않았고 모세의 후손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니 둘 다 번복한 것 같다.

 

우선 지난주에 하나님의 진멸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죄라고 했다. 또 금송아지 앞에서 뛰어 놀며 춤을 춘 자 3천 명 가량은 진멸 당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속히 떠났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싫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힌 것이다. 여호와를 더 이상 우리의 신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머지 백성들도 심정적으로는 분명히 동조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망설였다. 이스라엘 전백성이 십계명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피 뿌림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럼 이스라엘 모두가 마음으로는 이미 언약을 어겼기에 죽음의 형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행동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기에 하나님도 진멸의 심판을 아직 집행하지 않은 것이다.

 

정밀하게 따져볼 것은 두 번째 모세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이다. 우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간단하다. 성경에서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나온 기사로부터 출20장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사건까지의 기록 전부를 지우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대신에 모세를 복의 근원으로 삼고 다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모세의 후손들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고 그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일은 다시 몇 백 년 지체되어야 한다. 거기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없어진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싸워 이겨서 얻은 영광스런 이름이다. 그 이름 아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나왔는데 그 모두가 무효가 된다.

 

그런데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될지언정 하나님 나라의 선조이자 믿음의 조상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방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몸종이자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었다. 끝까지 사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외아들 이삭을 믿음의 선조의 대를 잇게 했다.

 

모세는 또 출생하자 애굽 식 이름인 모세스로 호적에 올려졌다. 마지막에는 백성들이 계속 불평하자 하나님께 대신 분노를 터뜨리는 죄를 범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모세를 하나님은 바로의 궁정에서 40년을 보내게 한 것은 출애굽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훈련시킨 것은 이스라엘이 40년 간 광야에 방황할 때에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사역은 가나안 땅 바로 직전 거기까지였다. 만약 가나안 정복까지 그가 행했다면 벌써부터 백성들이 그에게 출애굽의 공로를 돌리는데 자칫 여호와 대신에 모세가 신으로 추앙될 수 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모세는 율법을 전수 받았다. 지금 200만 명 중에서 목숨을 걸고 십계명을 지키려는 자는 그가 거의 유일했다. 모세는 율법의 아버지다.

 

아브라함은 로마서 4장이 말하듯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매 의롭다함을 얻었다. 그 후에 할례를 받았다. 무(無)할례시에 즉, 율법을 받기 전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믿음의 선조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우는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믿음에 근거한 은혜의 나라가 된다. 오직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나라다. 반면에 모세의 후손이 세울 그분의 나라는, 하나님의 당신의 뜻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행위에 따라 그분의 축복을 받는 도덕적 국가가 되어버린다. 인간의 의만 대우 받는 인간 중심의 나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궁극적인 뜻은 이스라엘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로 큰 나라가 되게 한다고 해서 그 뜻이 바뀐 것인가 아닌가? 당연히 아니다.

 

비록 모세가 이방 여인과 결혼했어도 남성 중심 사회라 그 후손은 히브리인이다. 따라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시간만 지체되지 동일한 유대인에 의해 여호와를 주인으로 삼아 십계명을 준행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세워지는 마찬가지다. 단지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과 시기만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자체가 번복된 것이 아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아버지와 고등학생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생이 되면 최신 스마트 폰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만약 성적이 떨어지면 그 떨어진 등 수 만큼 회초리로 맞고 스마트 폰 선물도 취소하기로 서로 다짐했다.

 

그런데 아들이 나쁜 친구의 꾐에 빠져 청소년이 행해선 안 되는 유흥을 즐기느라, 이스라엘이 우상을 음란하게 섬겼듯이, 성적이 꼴등이 되었다. 당연히 회초리로 엄청 맞았고 스마트 폰 약속도 취소되었다. 아들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 경우 아버지의 뜻은 스마트 폰을 사주는 것도, 회초리로 때리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든 아들로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는 것이다. 아들이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나쁜 친구들과 절교를 다짐하면 아버지는 약속을 취소한 것을 없었던 일로 치고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이때 약속을 다시 번복했다고 아버지의 뜻이 바뀐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또 아들이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스스로 각성하여서 성적을 올렸다 치자. 그럼 어느 날 책상 위에 “아들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네가 내 뜻을 알아주어서 고맙다”는 메모와 함께 스마트폰 선물이 포장된 박스가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럼 아버지의 뜻이 변화된 것인가? 이 또한 아니지 않는가? 어쩌면 아버지로선 스마트 폰은 아들과 약속을 처음 맺을 때 이미 다 마련해 놓았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들이 약속을 어겼기에 회초리를 때려야만 한다. 또 회개하면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 상품을 주겠다고 다시 번복할 수 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순전히 아들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뜻과 계획은 오직 아들의 성적 향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삼천 명을 심판한 것은 이 비유로 치면 회초리를 때린 것이다. 또 모세의 기도에 못 이긴 척 하고 당신의 말을 주워 담은 것은 원래 약속에는 없지만 아들이 반성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결국은 회개할 것이라고 미리 알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기필코 그런 자리로 이끌 것이므로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서 그렇게 말씀한 것이다. 어쨌든 제일 연약한 민족으로 당신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뜻에는 단 한 치도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고의로 거짓말 했다거나 이미 한 말을 성취하지도 않고서 주워 담았다고 비난할 수는 결코 없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원래 약속대로 하지 않았다고 결코 비난은커녕 따질 수도 없듯이 말이다. 인간 아버지도 그러한데 하나님은 인간을 데리고 절대 장난치는 분이 아니다. 교묘하고 치사한 계략으로 조종하지도 않는다.

 

인간들의 눈에 번복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만큼 인간이 천방지축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감정과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춘기 철부지d아들과 똑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수준을 도무지 못 맞추니 하나님이 우리의 수준에 맞출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서 그런 약속을 했는지 처음 약속을 맺을 당시는 사춘기 아들은 전혀 모른다. 실패해서 회초리를 맞는 과정을 계속 거쳐봐야 겨우 알 수 있다. 그런 연단 후에 언젠가는 아버지의 매에 당신의 감정과 욕심은 전혀 없고 정말로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는 사랑뿐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특별히 자기가 자식을 키워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에 영적으로 가장 부흥했던 때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이듯이 말이다.

 

모세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야곱 가문 70명만 데리고도 애굽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당신의 엄청난 권능으로 차지하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애굽과 광야 방황의 연단을 거치게 하셨다. 그분의 생각은 처음부터 모세를 출애굽의 구원자로 세우는 것이었지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모세 같은 구약성경 최고의 믿음과 순종의 종 모세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구약성경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오직 한 가지 지점을 지향한다. 바로 골고다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며느리로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은 다말, 기생이자 창녀인 라합, 이방 여인 과부 룻, 다윗 왕과 간음한 밧세바, 네 여인의 이름이 나온다.

 

그럼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믿음의 선조로 세우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이 번복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만 살려고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말하자면 다말 라합 밧세바 같은 죄인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는 뜻이 십자가에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 또한 우리 모두가 그런 비겁하고 치사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이처럼 구약의 모든 기록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한다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은 것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구원을 못 얻을 자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하신다. 인간의 공로, 자격, 외모는 단 한 치도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방적 무조건적 은혜와 사랑인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반면에 모세는 동족이 박해 받자 애굽 관원을 살해했다. 목숨을 걸고 십계명을 끝까지 지켰고, 자기가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동족을 제발 구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믿음도 믿음이지만 인간적 의로는 구약 최고의 영웅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를 출애굽의 구출자로만 세우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처음부터 변함없는 계획이었다.

 

문자적으로만 따져도...

 

실은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필요도 없다. 문자적으로만 따져도 우린 모세처럼 기도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가 내가 지옥 가는 한이 있어도 동족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가? 그 정도로 기도해야 그나마 하나님이 뜻을 바꾸지 않겠는가?

 

지금 모세 개인의 사정을 살펴도 아브라함 대신에 네로 새로 선조를 삼겠다는 것은 엄청난 약속이다. 역사상 최고의 구원자에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두 가지 영광스런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런데도 모세는 일언지하에 거절한 셈이다.

 

솔직히 우리는 어떠한가? 오직 우리의 안일과 형통을 위해서만 기도한다. 또 그런 욕심이 있으니까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도 바꿀 수 있다는 가르침을 즉, 우리 욕심을 채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의심 않고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성경을 깊이 따져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모세의 믿음을 시험해보려고 그런 엄포를 놓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유치한 모략을 쓰시는 분이 아예 아니다. 그분이 무엇을 어떻게 하던,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든, 심지어 가나안의 모든 이를 진멸하라는 것처럼 인간사회 도덕으로는 죄악처럼 보여도, 그분의 행하시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그분의 뜻과 계획에 추악한 측면은 단 하나도 없다.

 

부자의 비유를 다시 들자면 본문의 상황은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자 그에게 줄 스마트 폰을 가만 두어도 공부 잘하는 착한 둘째 아들에게 준 셈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큰 아들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잘하게 하려는 뜻이다. 그러는 아버지를 두고 아들들을 데리고 논다고는 아무도 비난할 수 없지 않는가? 또 정말로 현명하고 올바른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선물이나 회초리와 상관하지 않고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다. 최소한 한두 번 잘못했어도 금방 회개하고 다시 열심히 공부한다.

 

끈질기고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의도는 선하고 이해가 된다. 그만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기도는 신자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르고, 강력하고, 완전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변경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정말로 병 주고 약 주는 분이 된다. 인간의 병은 인간이 만든다. 그분은 인간이 만든 병을 뒤치다꺼리 하며 고쳐주기 바쁜 분이다. 우리의 기도가 전부 그렇지 않은가?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이 병이 들지 않는 건강비법부터 먼저 가르쳐 주셨다. 바로 십계명이다. 여호와 외에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과 돈 중에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는 돈을 주인으로 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번복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스라엘이 언약을 번복했기에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뜻이다. 그 제자리가 어디인가? 이스라엘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는 것이다.

 

신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되는 방향이자 도착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대로 뜻을 바꿔준다면 내 뜻을 죽어도 관철시키겠다는 욕심이자 교만이다. 결코 뜨겁고 좋은 신앙이 아니라 십계명의 첫째와 마지막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믿음의 처음과 끝은 하나님은 절대로 영원히 선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구약성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십자가 이야기를 한다. 모세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겠다는 뜻에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비겁하고 치사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 십자가 외에는 우리에겐 어떤 소망도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그만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5/13/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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