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승리를 방해하는 첫째 요소 (출40:34-38)

출애굽기 강해 (67-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40:34-38)

 

율법보다 예배가 우선(?)

 

출애굽기 40:17은 제 이년 정월에 성막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출애굽 후 이년 째이니까 만 일 년 후입니다. 이동 조립식이긴 해도 이 땅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 건물입니다. 또 그래서 그 성막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기록으로 출애굽기는 마칩니다.

 

출애굽기 강해도 금주로 마치겠습니다. 그 동안 시간관계상 열 가지 재앙, 율법의 중요 규정, 성막과 그 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생활과는 크게 관계가 없고 대신에 십계명을 하나씩 살펴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민족의 구원자로 소명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와 처음으로 대면하여서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5:1)고 선언했습니다.

 

애굽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학대한 것에 대한 사죄나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또 모세 개인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염원이라고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하늘과 땅을 주관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어느 누구도 거역은커녕 훼방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반드시 이뤄집니다. 성취되지 않고 넘어가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은 열 번의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무참하게 패배했고 나라의 금은보화를 다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먹고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군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으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거대한 힘도 그 백성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이 지금 당신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맨 처음 말하는 대로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지금껏 모든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어서 그 목적대로 살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이제 한 백성을 택해서 그 목적대로 살게 하려고 인도하십니다. 성막의 완성으로 그 일이 가능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막에는 모세가 들어가지 못할 만큼 구름이 덮고 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히 임했습니다.(34,35절)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가시적으로 경건하고 신령한 기운이 장막을 둘러싼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할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나면서 불의 혀 같이 임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영광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찬란한 광채입니다. 북극지방의 오로라처럼 신비한 빛들이 성막 위 하늘에서 마치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임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40일 간 두 번이나 머물면서 하나님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성막이 완성한 직후에는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보다 예배가 우선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 당시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이제 그 일이 예배로부터 가능해지고 시작될 것입니다. 예배를 순전히 드리는 자는 율법도 순전히 순종하게 될 것이며 그 반대로 율법을 순전히 순종하는 자는 예배도 순전히 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착각

 

그 영광이 성막을 완성한 후에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항상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했습니다.(38절)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행군했고 떠오르지 않으면 머물렀습니다.(36,37절)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매일매일 인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결론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영광을 행진하는 길에서 즉, 일상의 삶에서 눈으로 목격했다고 합니다.(38절)

 

그렇다면 우리에게 물어볼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이런 일들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 실현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어려운 일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신앙에서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그 모든 질문에 주저 없이 자신 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한두 개에는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 매일 큐티하고 기도를 하니까 최소한 하나님의 인도는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처럼 구름이 떠오르면 즉,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십니까? 구름이 머무르면 즉,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 함께 머무르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뿐입니다. 정확히 말해 아무리 큐티하고 기도해도 내가 가는 쪽으로 하나님을 끌고 가려고 떼를 쓰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크게 착각하는 일이 또 그래서 믿음으로 승리하는데 방해가 되는 첫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착각이란 누가 정확히 지적해줄 때까지 본인은 끝까지 계속 모르는 것입니다. 그 모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과 그분이 동행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고난과 문제가 겹쳐서 기도를 오래 했는데도 해결이 안 되면 당장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이 주무시는가? 외출했는가? 심지어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침묵 내지 부재한다고 여겨지는데 어찌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이 하나님의 때와 방식은 우리의 기대와 생각과는 다르다는 영적원리는 다들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시겠지 내가 설친다고 될 일도 아니라고 믿고 염려를 놓고 평강은 유지해야 합니다. 최소한 손을 놓고 기다리고는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정신이 먼저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동안 받아 누렸던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 대한 기억은 붕어처럼 삼초 밖에 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꼭 믿음에서 행하지 말아야 할 사항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는 최소한 안 해야 됩니다.

 

그 의미와 의도는 성령이 더욱 충만하게 역사해달라는 간구이긴 해도 해선 안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말 어법과 한국인들의 일반적 사고가 애매모호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게 기도해선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100% 틀린 말로 의식적으로라도 평소에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신자는 성령이 내주하여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자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죄는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실패는 바로 이 간단한 오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동행의 세 가지 조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그분이 함께 하는 것은 필수요소이나 그분이 함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행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동행이 이뤄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출발지점이 같고 둘째 목적지점도 같고 셋째 가는 방향도 같아야 합니다. 이중 하나만 틀려도 동행이 되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같아도 나중에 도착하는 장소가 달라집니다. 특별히 가는 방향이 틀릴 때에 제일 문제가 많습니다.

 

모든 인생은 연약하고 죽을 때까지 고달프고 모든 측면에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합니다. 불신자도 겉으로는 부인하고 구체적으로 정리만 안 되어있다 뿐이지 사실은 궁극적 구원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달픈 인생이 구원을 향한 출발점이고, 영원한 본향은 그 목적지입니다. 모든 인생의 여정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종교가 동일한 구원의 길을 추구하고 동일한 해답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서울로 가자면 북서쪽 방향으로 가야지 남동 방향으로 가선 평생을 가도 도착하지 못합니다.

 

인간 스스로 선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합격 점수에 얼마든지 들 수 있다고 자신하는 구원의 길이 하나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도무지 무능하고 철두철미 죽어 마땅한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이 없으면 아무 소망이 없다고 믿는 다른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이 둘은 정반대로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것입니다. 모로 가면 서울로 가지 못하고 종교가 같은 해답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기에 구원의 길도 오직 하나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이 내주합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에 성실히 참석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당연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까? 지금 하나님과 동행 여부를 따지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등을 지고 있는 불신자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정말로 동행하는지 잘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부부가 함께 쇼핑을 갔습니다. 남편은 전자제품을 사러, 아내는 화장품을 사려고 대형 쇼핑몰인지라 각기 헤어졌습니다. 쇼핑몰 안에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때로는 정반대로 각자 행동합니다. 그럼 쇼핑몰 안에 함께 있기는 하지만 동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주차장이나 약속 장소에서 만나서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물론 동행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구원 이후로는 쇼핑몰 안에서처럼 주님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이 땅의 인생이 끝나고 주님이 계신 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차장에서 만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쇼핑몰 안에 있는 동안에는 즉, 이 땅의 인생을 살 동안에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에 붙들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쇼핑몰 안에서 우리가 소망하여 구매하려는 물품이 신랑이신 예수님이 사주려는 물품과 동일해야만 동행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평생을 주님과 함께는 했을지라도 동행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는 신자가 사실은 대부분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것은?

 

이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를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잘 모릅니다. 아주 드물게 아는 신자가 있어도 붕어처럼 3초만 기억하고 금방 다 잊어버립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매번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함께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큰소리로 간절하게 합니다. 심지어 “함께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강조합니다. 얼마나 못 믿으면 그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주님이 항상 함께 하는 것조차 온전히 믿지 못하니까 쇼핑몰에서 주님을 자주 잃어버립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들어와선 자기가 사고 싶은 것만 찾느라 바빠서 옆에 주님이 함께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릅니다. 어느 샌가 주님은 당신께서 가야할 가게로 가는 바람에 동행하지는 않았어도 여전히 쇼핑몰 안에는 계십니다. 그런데도 함께 하지 않는 줄 알고 부랴부랴 주님을 찾습니다. 그 때라도 주님이 계신 가게로 찾아가면 쉽게 만날 텐데 그러지 않고 계속 자기가 있는 가게로 어서 빨리 오라고 고함지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자에게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도 갈 바 모르지만 여호와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고 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지시하지 않는 땅으로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주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므로 만약 주님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성부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었을 것입니다. 함께는 하지만 동행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세기를 줄여서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이 심어준 목표와 바꾸어서 매일매일 그것을 조금씩이라도 실현하고 있는 신자라면 오늘의 설교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과 함께만 아니라 실제로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냥 내 자유의지대로 내 믿음의 수준대로 살기에 구태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의식적으로 먼저 구하지 않는 대부분의 신자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행하는 일들이 최소한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싫어하실지 그 정도는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 아닙니까?

 

쇼핑몰에서 밍크코트나 명품 가게 앞에서 떠나지 않는 아내를 보는 남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을 사주지 못해서 남편으로 심정이 찢어지겠습니까? 그보다는 내 아내의 수준이 아직도 저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싶어서 너무나 안타까울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볼 때 교회 출석한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저런가 싶어서 얼마나 애통해 하겠습니까?

 

여자 성도들을 폄하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신랑으로 신자를 신부로 비유한 것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롤렉스시계나, 일이백만 원하는 게임기 가게에서 떠날 줄 모르면 아내가 볼 때에 남편이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모세의 잃어버린 80년간 하나님은 어디에?

 

하나님과 동행이란 신자가 그분이 자기 인생에 세운 계획대로 살아가거나, 최소한 그것을 소망 내지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출애굽의 주역인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사십 년을 왕자로 살았습니다. 또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사십 년을 보냈습니다. 그 팔십 년간 그는 자기 정체성이 상실되고 이름도 없이 보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단순히 그와 함께만 해준 것입니까? 함께는 하되 침묵으로만 일관했거나 아니면 아예 부재한 것입니까?

 

모세 본인은 바로의 왕자로 크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뭔가 큰일을 맡길 것이라는 인식은 분명히 했습니다. 또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실제로 그래서 애굽 관원을 살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하나님은 완전히 침묵 아니 부재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나이 팔십에 이르러선 자기가 받은 소명도 거의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80년간 부재하지 않았고 모세와 함께만 한 것이 아니라 동행해주었습니다. 당신의 완벽한 계획과 일정에 따라 바로와 맞설 상대로 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전문가로 교육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눈앞에 가시적 열매가 없고 뭔가 화끈한 결과가 없으니 동행은커녕 함께 하지도 않는다고 의심 원망 불평을 넘어서 불신의 단계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출애굽의 구원자로 준비하시고 교육 훈련시켰습니다. 그를 나일강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셨을 때부터 80년간 그와 동행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나일 강에서 건질 때에 이미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한 후에 성막을 완성시켜서 충만한 기쁨과 영광으로 임재 하리라고 하나님은 다 계획하셨습니다. 그 완벽한 계획에 따른 완벽한 일정에 따라 모세와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모세와 동행을 하되 80년을 앞서서 동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와 동행하신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기도할 힘도 없는데, 심지어 주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이 힘든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제발 함께 해주십시오. 크신 능력으로 우리 눈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저를 건져주십시오. 이 고난을 단번에 해결해주시고 대박 같은 은혜로 부어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

 

이런 식의 기도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할 수는 있어도 엄격히 말해 아주 틀린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앞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기도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계속 그런 수준의 믿음을 갖고, 사실은 의심쩍어하면서 기도한다면 그 응답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좋습니다.

 

모세에게 80년을 앞서 동행하셨듯이 우리와도 마찬가지로 완벽한 계획을 갖고 40년 50년을 앞서 가고 계십니다. 신자가 그분보다 앞서나가는 법도 없고 그분이 우리보다 뒤에 처지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계획을 취소하고 우리를 뒤에서 밀어주지 않습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평생에 한두 번을 빼고는 그분은 항상 우리에 앞서 행하십니다. 동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구름이 항상 앞서 갔고 이스라엘은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동행의 증거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구약시대에는 성경도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십자가 진리가 실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각 신자에게 내주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사고나 종교 의식도 제대로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그림언어로 모두에게 보이게끔 직통으로 계시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완성되었고 성령이 신자 각자에게 내주하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구원의 진리도 완전하게 계시 실현되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나아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염려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그것도 죄 중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이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감당했습니다. 그것 이상이 동행하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마지막으로 유언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실패 중 하나가 하나님의 때와 방식을 미리 알지 못해 힘이 없고 방황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그분의 뜻을 미리 조금이라도 안다면 내가 알아서 봉사 헌금 충실히 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앙상의 가장 큰 착각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선언했습니다. 정욕이 과다하게 욕심내어 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만의 형통과 안락만을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한다면 안 주실 리는 없습니다. 만약에 이웃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겠다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럴만한 믿음, 용기, 열정, 능력, 용기 등은 물론 소요 자원까지 넘치도록 부어주지 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도 자연스레 조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출애굽기가 내린 결론은 출애굽 과정을 통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베푸신 뜻이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뒤를 이스라엘더러 매일매일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그분께 산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인생 전체가 예배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비록 예수님의 은혜 안에 붙잡혀있더라도 그분과 동행하는 손을 놓치면 금방 갈급하고 허망해질 수 있습니다. 신자 각자는 소명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 방향, 의미, 가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정 조준하여 그분의 뜻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 길 외에 신자로서 아니 한 인생으로서의 성공하는 길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모세나 바울 같이 일생을 소명에 완전히 충성하는 자는 드뭅니다. 그렇게 거창하게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직 자기 인생에 대한 주님이 주신 소명을 모른다면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 중이라도 일상적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솔직히 말해 그것마저 힘들 수 있습니다. 저부터도 그런 수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 그분이 먼저 가신다는 것, 아니 동행하신다는 것, 아니 함께 하신다는 것에 의심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앞서가는 길을 미처 모르더라도 최소한 그분이 뜻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요동치 않고 기다릴 줄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반드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줄 소망하고 앞서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세처럼 일생을 소명에 헌신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디로 이끌지는 몰라도 인생을 살면서 최소한 그분이 시키는 일은, 아니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은 몇 번 해보고 천국에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주님이 이 땅에서 무엇을 쇼핑하고 왔는지 보이라고 할 때에 남자는 롤렉스시계, 여자는 다이아몬드 반지 꺼내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러는 분은 아무도 안 계시는 줄 알지만 제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신자들과 상담해보면 청년들마저도 그런 것들만 쇼핑하려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8/19/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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