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63 34:29-35 하나님을 질투하고 있는가?

조회 수 70 추천 수 0 2018.07.18 09:05:43

 

(출34:29-35) 하나님을 질투하고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63)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34:29-35)

 

자기를 완전히 내어드린 모세

 

하나님은 모세가 마련해온 두 돌 판에 직접 십계명을 다시 새겨줌으로써 금송아지 배역사건 대한 처리를 마무리 지었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40일간 머물며 금식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는데 막상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빛이 너무나 찬란해 사람들이 두려워서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모세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나올 때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서 백성들의 두려움을 들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은혜로 모세가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목사의 얼굴만 보아도 교인들이 존경 순복해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 신자의 얼굴만 봐도 불신자가 마음을 열고 전도에 호의적으로 반응해준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모세 얼굴에 엄청난 광채가 나게 된 것은 물론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한 때문입니다. 단순히 금식 기도했다고 응답이 잘 된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물과 음식은 인간 생존의 첫째가는 필수 요소입니다. 식음을 전폐한 것은 자신의 살고 죽음이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고백입니다. 내 삶을 유지하는 것도 내 능력이나 내 잘난 것에 영향 받을 것 단 하나 없음을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사십이란 숫자는 아시는 대로 꽉 차서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로선 자기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당신의 뜻에 순종 헌신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기간 동안 세상의 것들과는 완전히 차단한 채 오직 하나님과만 일대일로 친밀하게 교제했습니다. 모세에게 속한 것이라곤 단 하나 남지 않고 다 깨어졌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만 100% 채워졌고 그래서 얼굴에 빛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며 보는 즉시 순간적으로 소멸되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육안으로 보아도 죽지 않고 나아가 봉사가 되지 않도록 가시광선으로 전환하여 모세의 얼굴에 반영시켜 백성들로 보게 했습니다.

 

마땅히 죽음으로 갚아야 할 인간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하시고 죄인에겐 인자를 베푸시는 예수 십자가 구원을 상징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배역사건으로 몇 번이나 죽어 마땅하나 긍휼을 베풀어 다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종의 권위는 당신께서 세우신다.

 

모세가 처음 40일간 시내 산에 머물며 십계명의 계시를 받고 내려왔을 때는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술 마시고 춤추며 음란하게 숭배하느라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전에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니 이제부턴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지금은 마찬가지로 40일간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는데 백성들이 두려워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광채가 나는 것이 금입니다. 그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과는 비교가 안 되는 광채였습니다.

 

당시는 선글라스가 없던 시절인지라 어쩌면 너무 눈이 부시어서 모세 앞에 서려면 자연적으로 고개를 숙였어야 했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감히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상황처럼 되었습니다. 백성들로 두말도 하지 못하고 모세에게 순복케 하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자신의 명예, 재물,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그분께 전적으로 충성하면 당신께서 반드시 그 종의 권위를 세워주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권위가 모세의 개인적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갑자기 증대시키는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소명자로 세운 후로는 친구처럼 대면하여 계시해주었습니다. 모세도 그 받은 말씀을 단 하나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진리가 진리 그대로 전해지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가지는 생명력이 살아 역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을 주시기로 택한 자의 인생을 뒤집어 놓습니다. 하나님만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반면에 목이 뻣뻣한 자는 끝까지 그분을 거역하다가 멸망의 길로 걸어갑니다. 전적으로 본인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 둘 중 하나로만 나뉘고 중간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본문 29절에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말합니다. 그 광채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히 전해지면 그 전하는 종에게도 필연적으로 또 자연적으로 먼저 역사하게 마련입니다. 자기는 낮아지고 죽더라도 그 말씀을 받는 자는 높이고 살립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모세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백성들만 그 권능을 목격하여 그 은혜에 감동 받습니다. 모세의 간구에 간접적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의 직분이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 재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모세가 말씀에 죽고 살게 된 연유

 

모세가 수건을 가리니까 백성들이 가까이 와서 그를 대면 수 있었다고 해서 그 의미를 절대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수건으로 가려질 수 있을 정도로 시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고 주님의 세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바라봤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지자로 유대인들이 다시 메시아로 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있는 그 두 사람을 주님이 불러 내렸습니다. 주님은 그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며 천국마저 통치하는 분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제자들도 죽으면 그들처럼 부활할 것을 확신 시켜주면서 또 천국에 가면 그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바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보다 약 1,500년 전에 사십 일간 금식기도를 마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사람들이 두려워서 바라보지 못할 정도의 광채가 났습니다. 추측컨대 변화산에서 광채가 나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교제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또 나중에 죽어서 갈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땅에서 미리 상징적 가시적 사건으로 실현시켜 이스라엘로 목격시킨 것입니다.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살고 죽는 말씀의 종이 된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80년간이나 침묵하는 깊고도 긴 갈등과 고뇌의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애굽의 동족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할 것이라는 소명 의식은 포기한지 오래일 것입니다. 애굽의 부모 형제와 상봉할 꿈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 알고는 계시는지 의심스러워졌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분이 실존하는 것은 확실한지 알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침 소리라도 한 번 듣기 위해 80년을 인내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맡길 출애굽의 과업도 막중했지만 모세의 이런 개인적 사정은 물론 그 감정까지도 다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친구처럼 일일이 구체적으로 계시해준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대로 지난 80년간 말씀의 기근을 겪었기에 그 한마디 한마디가 생명수가 되어서 자기 영혼을 시원케 함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내 산에서 “하나님 저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저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가 당신의 백성에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라고 사십 일간 꿇어 엎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가장 믿음다운 모습

 

믿음이 가장 믿음다우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해 손해보고 핍박이 겹쳐서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고 오히려 원망이 더 생길 때라도 야곱처럼 응답해주지 않으면 죽어도 못 보내드린다고 끈질겨야 합니다.

 

모세는 의심과 원망으로 가득 찬 채로 80년을 인내했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마저 다 사그라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꼭 만나서 끝까지 따져보고 싶은 사항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나이 80의 기력이 완전히 쇠진한 노인이 되도록 방치할 것 같으면 왜 바로의 왕자로 자라게 했는지 그 이유만은 꼭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으로 그를 만나주고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동안 쌓였던 모든 의심, 불만, 불신이 완전히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조금은 미심쩍었을 것입니다. 팔십 노인을 세계 최강 애굽을 상대하라고 하니까, 그것도 지팡이 하나 들고서, 다섯 번이나 반문하여 하나님의 역정까지 샀습니다.

 

그에게 그런 80년의 연단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목마른 끈질긴 종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끈질김은 이번 금송아지 배역 사건에서도 하나님께 다섯 번이나 간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으로 배역하자 하나님은 격노하여 이스라엘을 진멸하는 대신에 모세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진멸할 것 같으면 왜 이백만이나 되는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했습니까?”라고 따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출애굽 구원자로 세우려고 하나님이 80년을 침묵했음을 철저히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도 4백 년을 노예로 고생시킨 것이 구원하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진멸할 것 같으면 왜 구원했습니까?”라고 모세니까 얼마든지 당당하게 따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진멸하는 대신에 삼천 명만 심판했습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남은 백성이 아직도 완악한 것을 알고 모세는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동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라고 허락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가나안 진군을 허락했지만 동행하지 않겠다고 하자 백성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제발 이 백성에게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구했고 하나님은 친히 동행하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넷째로 그 약속을 이행하신다는 증표로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등을 보여줌으로써 동행은 물론 앞서 가시겠다고 확증해주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하나님이 언약을 재체결하며 자비는 천대까지 베풀되 죄악은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삼사 대의 죄마저 사해주시고 당신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했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 판을 마련해 산위로 올라오라고 하여 언약을 재확인했습니다.

 

소명을 붙들고 기도하라.

 

익히 배워서 다 아시는 내용을 리뷰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항상 강조해왔듯이 성경을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전체적으로 조명해보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일부 구절이나 단어 몇 개로 그것도 문자적으로 따져서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성경 66권을 달달 외우고 그 내용을 신학적으로도 심오하게 다 풀 수 있어도 그분에 대해 아주 극히 일부분만 아는 것입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 한 알 집어 드는 정도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만큼 즉,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인간이 그분을 알 수는 없습니다. 모세 얼굴의 광채가 두려워서 수건으로 가려야 겨우 쳐다보는 것이 인간입니다. 성경 몇 구절 암송했다고 믿음이 증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끈질긴 믿음은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이 다섯 번의 기도를 전체적으로 살필 때에 맨 처음 가장 큰 특징으로 뭔가 집히는 것이 없습니까? 처음에는 이스라엘 이백만을 진멸하겠다고 격노했습니다. 실제로 삼천 명을 칼로 도륙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당신께선 이스라엘을 죽이기까지 사랑할 정도로 질투라 이름 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로선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최악의 절망과 죽음에 처했습니다. 그러다 모세의 기도로 조금씩 상황이 개선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최고의 소망과 생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모세가 끈질기게 기도한 결과입니다.

 

사역자는 물론 신자의 기도가 이래야 합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두 부류의 사람으로만 나누지 않습니까? 그분이 이끄시는 인간의 역사 자체가 그런 분류 작업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모든 민족으로 알게끔 이 땅을 다스립니다. 신자의 기도는 그런 하나님의 통치에 맞춰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주목할 것은 모세는 다섯 번 기도해서 다섯 번 다 기도한 대로 응답받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자기를 위하는 기도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타적인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 소명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모세가 일생 동안 끈질기게 붙들고서 120년간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있게 만든 삶의 근원이었습니다. 나일 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바로의 궁에서 자라게 된 사건이 그 인생의 시작이었고 그 사건의 의미와 목적이 달성됨으로써 그의 인생은 막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진군이 모세의 생존의 이유이자, 목적이요, 가치였습니다. 그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 땅에 한 시라도 더 살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동족은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 소명은 인생이었고 나아가 자기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

 

나아가 모세의 다섯 번의 기도는 그때그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도였습니다. 모든 상황의 전개에 따른 합당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누가 조성했습니까? 또 다음 상황으로 누가 주도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의 전 과정은 하나님이 이적을 베푼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백만 이스라엘을 통솔하는 지도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리 그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비춰도 단 하나 기도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넣었기에 결국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를 한 셈입니다. 당연히 그대로 응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의 다섯 번의 기도는 물론 출애굽의 전 과정을 자세히 다시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문제와 고난을 하나씩 또 조금씩 풀어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고선 또 그 상황에 맞춘 기도를 하는 만큼만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병 주고 약 주는 식은 아닙니다. 그분의 미리 정해놓은 목표와 종착지가 있고 그곳을 향한 정확한 일정표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모세 본인은 당시에는 어떤 사정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간절히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과 미리 손발을 맞춘 것처럼 기도와 그 응답을 통한 일의 진행이 척척 맞아 떨어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의 끈질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이 더 끈질기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세의 80년의 인고의 시간 동안 한 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 사백 년간 방치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약속한 내용이 당신의 때에 정확히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이끄신 것뿐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그분은 무식할 정도로 꾹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어떤 사람들을 찾고 또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모세나 야곱처럼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자를 하나님도 단 한 명이라도 찾고 찾기 위해서 참고 또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송아지 배역 사건으로 격노하셨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을 진멸하려 든 것이 그분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적극 주동하고 참여한 삼천 명만 심판할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모세 같은 믿음의 영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선 그때그때 인간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계시하고 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부터 그것을 어기거나 변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 전에 이 땅을 창조할 당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수겠다고 약속할 때부터 그랬습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수정 변개도 없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를 당신의 자녀에게 천대까지 베푸신다는 당신의 성품 자체가 끈질김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장의 눈앞의 고통만 생기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고, 지도자 모세만 보이지 않으면 금방 우상을 섬기며 타락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삼천 명을 심판한 것처럼 두들겨 패서라도 제 자리에 세울 만큼 끈질기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붙들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모세의
끈질김은 그런 하나님의 끈질김에 동참한 것입니다. 팔십 년간 고통 중에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하여 그분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분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에 그분의 빛이 비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질투하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 하는 하나님입니다. 질투란 반드시 끈질김을 동반합니다. 질투를 한두 번 하고 치우는 법은 없고 그것은 질투가 아닙니다. 시쳇말로 네 죽고 나 죽자 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질투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그것을 지금 살펴보는 출애굽기 본문 식으로 바꾸면 “나는 너희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너희도 나를 질투하라.”가 됩니다.

 

하나님을 죽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을 독점하고 끈질기게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마음에 충만히 채워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하나님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은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치관 인생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우리는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고도 믿음으로 승리한 체험이 별로 없습니다. 신자로 살아가면서 활기차고 기쁨이 넘치는 대신에 그저 무미건조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약해서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아서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한국 신자만큼 뜨겁게 믿고 간절히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나 혼자만 끈질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김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로 살아 역사하기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체험적인 확신이 없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모세는 80년이나 침묵할 것 같으면 바로의 왕자로 왜 자라게 했는지 제발 그 이유라도 알고자 하나님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그 답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일을 자주 많이 겪습니다. 이 모양 이 꼴로 수많은 고난이 겹치고 억울하게 손해보고 핍박 받도록 방치하려고 했다면 왜 예수를 믿게 만들었느냐는 의문과 불만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하여서 반드시 답을 얻어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뜻과 목적과 이유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에 대한 그분의 대답을 들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것이 각자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소명을 이룰 일정표대로 우리의 일생을 이끌고 있습니다. 모세처럼 그때그때 하나님이 시키는 기도를 하고 그분의 끈질김에 동참하며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진리를 확신 아니 알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니까 이스라엘처럼 눈앞의 사건 하나하나에 붙잡혀 어쩔 줄을 모르며 그래서 성경도 그저 위로되는 한 구절이나 단어 몇 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치웁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신자를 영원토록 붙들고 있습니다. 신자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랑을 충만히 풍요하게 누리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 대한 소망, 믿음, 기대를 절대 감소 포기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쫓아가기에만 급급한 것입니다. 그것도 급한 일이 생겨야만 비로소 또 그때만 찾고 치웁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분은 신자를 이미 당신의 길동무로 택하여 손을 잡고 이끌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끌고 있다면 그 종착지는 어디입니까? 당연히 오늘 본문처럼 얼굴에 당신의 광채가 빛나는 곳, 천국의 부활 영광입니다.

 

7/1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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