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1:44,45 이미 거룩해진 신자들.

조회 수 647 추천 수 0 2018.10.06 12:13:02

이미 거룩해진 신자들. (레11:44,45)(창2:2,3)

구약성경강해(3) / 레위기강해(3)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3)

 

예배드리면 거룩해지는가?

 

성경 본문을 따르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설교의 순서가 조금 뒤바뀐 감이 있습니다. 레위기서 전체가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룩하니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레위기 1-9장에서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법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다음 10장은 아론의 아들들이 드린 두 제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둘 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위반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정신에 순종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로 하나는 심판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좋게 여겼습니다.

 

이제 본문이 포함된 11장은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음식과 먹어선 안 되는 부정한 음식을 상세히 구분해 놓았습니다. 당시의 열악한 위생환경을 감한한 계명이긴 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정신은 물론 육체를 포함한 전 인격체가 깨끗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먹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배운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를 대속할 완전하고도 영단번(永單番 once for all)의 희생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인간 구원의 길이 완성됨으로써 제사법의 효력이 종료되었습니다.

 

또 모세로부터 1,500 여년이 지난 신약시대는 그만큼 문명이 발달하였습니다. 생활 여건도 많이 개선되었기에 음식 정결법도 그 당시에 이미 역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의 의와 희락과 평강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부정한 것이 없기에 무엇이든 먹을 수 있게 허락되었습니다.(롬14:7)

 

그렇다면 로마서가 기록된 때로부터 또 약 2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 레위기의 이 계명을 어떻게 이해 적용해야 합니까? 음식 정결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사는 예배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럼 제사를 제정한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면 되는데 그 뜻은 순전한 예배를 드리면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면 거룩해졌다는 인식이 듭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거룩해진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어쩌면 거룩은 평생을 두고도 실현 불가능한 목표로 제쳐놓은 것이 솔직한 영적 실상일 것입니다.

 

거룩과 거리가 먼 이유는?

 

왜 그런지 아십니까? 거룩을 너무나 거룩한 의미로만 이해 적용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죄는 당연히 지으면 안 되고 추하고 악한 일은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인자하게 대하고 매사에 일처리의 지혜가 출중하고 영적인 분별력도 아주 높아서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뭔가 신령한 분위기를 띄고 흔히 말하는 아우라가 풍겨 나오는 모습이 되어야만 거룩해졌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본문 44절에서 보다시피 거룩의 의미를 아주 간단하고도 소박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몸을 ‘구별하라’는 동상에서 파생된 형용사가 거룩으로 ‘구별된’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배워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따로 떼어 놓아 구별하면 성경적 의미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에서 너희 몸을 따로 떼어 놓아라 즉, 구별하라 그럼 너희 몸이 거룩하게(구별된)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부정한 음식이라도 정결한 음식에서 따로 떼어 놓으면 그 부정한 음식이 단어적인 의미로는 거룩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보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면서 그들과 모든 소유가 거룩한 것이니 여호와께 바치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상 숭배한 더럽고 추한 것들이지만 어쨌든 따로 떼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남이 거룩하다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의 어떤 것과도 다른 존재로 구별된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들과는 전혀 같지 않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영계의 천사와 마귀도 그분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은 무궁무진하고 그 차원이 전혀 다르며 완벽합니다. 티끌만큼의 추하고 더러운 것과는 단 1초도 같은 자리에서 공존하지 못합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움 바로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다른 것에 의존은커녕 전혀 영향도 받지 않고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한 분입니다.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이, 천사와 마귀조차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그분은 세상 어떤 것과도 다르기에 거룩하신 분입니다.

 

당신께서 거룩하니 신자더러도 거룩하라는 뜻은 그렇다면 불신자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의롭게 자라는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 평생을 두고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심각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내용은 하나입니다. 어떤 면에서 내가 불신자와 완전히 다릅니까? 또 내가 과연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에 완전히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불신자와 가장 다른 점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 또한 간단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즐거워졌습니다. 한 번이라도 주일 예배를 빠지면 뭔가 삶에 나사가 빠지고 기쁨을 잃고 힘마저 떨어집니다. 주일을 끼워 여행을 가면 현지의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봅니다. 몸이 아파 누었어도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최소한 혼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경건의 시간을 갖습니다.

 

불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지겹기 짝이 없습니다. 이전과 비교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에 예배를 드림으로써 거룩해진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나를 거룩하게 통치하고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중에 지은 죄들을 깨끗이 씻음 받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겨우 한 시간 남짓은 신자에겐 참으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위기의 오늘 본문이 주일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참으로 짓궂은 것 같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계명이 레위기 서두의 제사법에서 말씀하셨다면 주일 하루 예배만 경건하게 드리면 거룩해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정결한 음식을 구별하면서 거룩하라고 명하십니다. 음식은 매일의 일상생활을 대변합니다. 주일만 아니라 주중에 항상 거룩하라는 뜻입니다. 신자들더러 세상에 나가서 불신자들 앞에서 설 때에 그들과 전혀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이 부분에서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거룩을 실현 불가능한 목표로 제쳐둔 것이 꼭 거룩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가 아닙니다. 일상의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조차 불신자들보다 더 의롭지 못한 일을 종종 범하니까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 복음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약속만 믿고 또 그것을 핑계 삼아서 거룩은 멀리 제쳐둡니다.

 

그러니까 주일 예배를 아무리 경건하게 드려도 말씀으로 은혜 받고 뜨겁게 찬양 기도해도 나라는 존재나 인생이 거룩해졌다는 확신은 도무지 들지 않습니다. 신앙 양심에 찔리니까 거룩해지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도 삼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이 거룩해지려면?

 

그렇다면 정작 따져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주중의 일상생활에서 거룩해질 수 있는지 그 방안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일을 반드시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말꼬리를 잡는 언어유희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신자와 달라지는 첫째 증거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는 것과, 주일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정작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 10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와 그렇지 않아서 즉사하는 심판을 받은 제사 둘을 대조 비교해 놓은 것입니다.

 

또 모든 율법 조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에서 넷째 계명인 안식일 규정에만 유일하게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 첫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과 똑같이 거룩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안식일을 지냈기에 거룩하다고 하신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일곱 째 날을 복을 주어 구별했다고 합니다.(창2:3) 주일에 복을 준 것이 신자가 아닙니다. 일곱 째 ‘날’이 따로 구별된 대상입니다. 또 하나님이 구별했기에 그 날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히 구별했는데 복이 되는 이유를 본문이 어떻게 설명합니까? 창조로 만드시던 일을 마치고 안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2:3)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동을 종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시는 첫날부터 그것을 운행 통치하는 일을 하셨고 이 날도 그 일은 계속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과업이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조가 원래 의도했던 계획과 뜻대로 완벽하게 충족되었기에 흡족해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좋아했기 때문에 그 날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한 인간과 교제하고 인간으로부터 감사 찬양 경배를 받음으로써 안식을 누린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인간도 그분과 순전히 교제하면서 그분께 감사 찬양 경배를 드리면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일 예배를 거룩하게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참 사랑을 베풀면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당신의 대리인으로 삼아서 이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통치하게 했습니다. 실제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을 그분 뜻대로 아름답게 관리했습니다. 하나님과 순전하고도 진정한 교제를 나누면서 그들은 안식을 누렸습니다.

 

최초 인간이 이 땅에서 맞은 첫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경배를 드린 후에 동산 관리의 청지기직을 수행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구약 성경의 제사법이나 오늘날의 예배처럼 정식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써 그 동산 모든 것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확신했기에 즉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구별하였기에 거룩하게 예배드린 셈입니다.

 

주일에 하나님과 친밀하고 순전한 교제를 하면서 그분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주일 예배를 거룩히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 안식을 취한 후에 그분께 순종했듯이 우리 또한 주일을 거룩히 예배드리면 나머지 주중의 일상생활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을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키는 하나님

 

주일에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거룩한 예배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누락되어 있습니다. 전혀 모르고 지나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창조 후에 흡족해 하신 하나님의 안식이 얼마나 오래갔습니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주 짧았습니다. 최초 인간과 하나님과의 허니문은 금방 파탄이 났습니다.

 

아담이 사탄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주인을 인간인 자기로 대체하고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순전한 사랑의 교제는 종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짐승을 잡아 피를 쏟고 가죽 옷을 손주 지어입힘으로써 그들을 구원은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낙원에서 내어보내시고 그 후손들이 원죄 하에 태어나서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조종과 농간 아래 있게 허락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이 한 시도 참 안식을 누린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의 삯인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평생토록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겨우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이 고난 위에 고난이 겹치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안타깝고도 애처로운 심정으로 하늘에서 계속 굽어보시고 계셔야만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요한복음 1:1의 말씀처럼 창세 때부터 인간이 타락할 것을 다 아시고 예수 십자가 구원계획을 미리 다 마련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창3:15) 죄로 죽을 인간을 참 생명으로 회복시킬 일은 반드시 실현될 미래로 벌써부터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집 나간 탕자를 매일 문밖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인간이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인간의 아버지도 자식을 스스로 자립하고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강하게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아이가 못 견딜 정도 되면 언제든 개입해서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단계별로 강도가 다른 계획을 정해진 일정에 따라 진행 시켜 나가고 훈련을 종료할 시점도 미리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훈련 과정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매우 아픕니다.

 

하나님도 어쩌면 창조 후 첫 안식일에 이미, 그전의 창조 때부터도 인간의 장래가 어떻게 할지를 다 아시니까 안식보다 우울하고 슬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연약한 민족인 히브리인들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고난의 터널을 거치게 하셨지만 출애굽 시킨 후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킨 셈입니다.

 

혹시라도 그 백성들이 힘이 빠질까봐 때에 따라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언약을 재확인 갱신해주었습니다. 선지자도 수없이 보내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주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로 도덕적인 성인군자가 되라거나, 종교적으로 신령한 능력자가 되라는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나와 진정한 참 사랑 안에서 서로 순전한 교제를 하자는 초대였으며 그것이 바로 너희가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마저 하나님과 순전한 교제여야 할 안식일을 형식적, 외식적, 위선적, 습관적, 이기적, 탐욕적이며 종교적인 관습이나 의무의 하나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우상과 함께 섬겼습니다.

 

진정한 참 안식의 길을 당신의 목숨과 맞바꿔서 인간에게 주러 오신 예수님마저 인간이 만든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고 일일이 따지며 물고 늘어졌습니다. 주님이 강도의 굴혈로 벌써 바뀌어버린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하니까 성전제사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신성을 모독했다고 인간 대제사장이 하나님이시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감히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당신께선 이제 십자가에 죽으실 텐데도 그 일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요17:1)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 중에 빠진 인간을 바라보며 하루도 안식하지 못한 하나님이 당신의 십자가 대속 사역의 완성으로 이제부턴 참 안식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이시여 이젠 참 안식을 누리옵소서.”라는 성자 하나님의 간구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인류 구원의 섭리이자 경륜입니다. 사탄에게 잠시 미혹되도록 허락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되찾아 와서 하나님 당신과 순전한 교제와 참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 당신의 안식에 동참시켜서 당신의 백성에게도 당신의 참 안식을 나눠준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해진다는 의미는?

 

그렇다면 신자가 거룩해진다는 첫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정말로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졌다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부활 영생이 보장되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그분의 동역자로 구별되어 세상에서 불려나왔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의 자녀임에 전혀 의심이 없고 또 그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거룩해진 자라는 것을 아는 것 바로 그것이 거룩해진 것의 시작이자 가장 확실한 첫째 증거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치와 특권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찾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영으로 나와 항상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은혜이자 특권입니까? 정말로 그분이 우리와 지금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에서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기에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애굽의 우상 숭배 죄악에 찌들어 있는 이스라엘을 찾아와 죄의 본성은 그대로 둔 채 구원해 내셨다고 합니다. 당신의 언약 백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당연히 또 반드시 앞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거룩하게 하는 일도 함께 하는 성령이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대신에 너희는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절대로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호와 외는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하는 십계명의 첫 계명만이라도 제대로 지키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며 뜨겁게 찬양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설교에 감동을 받아 가슴에 찔림이 생겨도 반드시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예배드린 후에 내가 거룩해졌다는 확실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불러내었기에 그분은 무조건 내 편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이젠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나를 대신해 내어주신 이가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세상에 있는 어떤 힘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해야 합니다.(롬8:32-39)

 

주일 예배에서 지난주의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못한 죄를 씻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불신자들도 교회만 출석하지 않는다 뿐이지 나름대로 스스로 참된 회개를 하고 더 의롭게 사는 자들 많습니다. 주일 교회에선 제일 먼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로 인하여 기쁨에 겨워 심히 좋아하고 계신다는 사실부터 재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신앙 공동체로 모이게 해준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위로해주는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따뜻하고도 풍성하게 서로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다들 너무나 힘들고 고달프지만 각 성도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 그 고난을 이겨내고 안식을 누리는 것을 볼 때에 함께 주님의 그 참 안식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주일예배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 안식만이 의롭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지금 당장 지구를 멸망시켜도, 개인적으로는 오늘 당장 나의 생명을 앗아가도 그분의 거룩하심에는 한 치의 손상도 없으며 더 중요하게는 나에 대한 사랑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현재 눈앞에 닥친 고난들이 또 그 고난 위에 더 심한 고난들이 겹쳐도 그 모두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유익하게 즉, 거룩하게 만드시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 사랑 안에 내가 이미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신자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해진 증거는 그래서 얼굴에 인자와 카리스마가 넘치고 아우라가 비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거룩해진 첫째 증거는 어떤 상황에서도 특별히 고난 중에도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유롭지 못해도 담대해지고, 담대하지 못하면 평강이라도 누리고, 최소한도 요동치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자유롭게 되는 것까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낸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거룩히 보내지 못하면 당연히 주중에도 거룩해지지 못하는 즉,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말씀에 순종하며 도덕적으로도 아주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고 기독교 교리나 신학적 지식은 거의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끝까지 붙들고 포기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자기들도 부활할 것은 확신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기들을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이미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안식을 이 땅에서부터 누렸기에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 채로 맹수에 잡아먹히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죽어갔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에 얼굴에 하늘의 영광의 빛이 넘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쇼크를 먹었듯이 이름 없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찬송하며 죽어갈 때에 불신자들은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자 스데반처럼 우리가 거룩에서 제일 먼저 연상하는 그런 아우라도 비춰 나왔을 것입니다.

 

당시의 불신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신자들의 의로움이나 믿음이 대단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로선 절대로 갖지 못하는 그 참 안식에, 죽음을 뛰어넘는 평강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 신자들에게서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보다 더 형편이 어렵고 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데도 평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시한부 불치병에 걸렸거나 사업이 망해 수입이 훨씬 적은데도 오히려 불신자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줄 때에 너무나 부러워합니다.

 

또 신자들의 그 기도가 결코 종교적 형식이나 위선이 아님을 그들도 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정서적 감동이 아닌 심령 깊숙이 울림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성령이 그 불신자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고도 현실 삶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도 거룩해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참 안식을 알지 못하기에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일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참 안식 가운데 있다면 세상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주중에도 세상과 죄악 앞에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내 편이고 나를 망하게 할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으면 두려움도 사라지고 사람들 눈치 안봅니다. 그들과 경쟁하고 시기할 필요도 없어서 도덕적으로도 의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그래서, 정확히 말해 신자의 심령은 태풍의 눈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 동부를 강습한 플로렌스 태풍이 역사상 최고의 재앙이라고 예측했으나 등급이 낮아져 다행이었습니다. 알다시피 태풍의 한 복판에는 비바람은 물론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너무나 고요합니다. 그럼에도 주변은 무시무시한 태풍이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평생토록 고난 위에 고난이 겹치고 신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 시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 그분의 안식에 참여하기에 태풍의 눈처럼 평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아직도 태풍 속에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휩쓸려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의 눈에 언뜻 스쳐지나가듯이 태풍의 눈에 거하는 신자의 평강이 보입니다. 그들로 더듬어서라도 하나님을 찾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고난을 그치지 않고 허락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 고난 중에 당신께서 거룩하니 신자도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신분 위치 특권을 예수 십자가 사랑 안에 확립하여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겪어도 당신의 참 안식을 누려서 불신자로 하여금 그 안식을 가장 부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거룩하십니까? 아니 이미 거룩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주일 예배를 정말로 거룩하게 드리고 계십니까?

 

9/1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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