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19:17,18) 이웃을 심판으로 밀어 넣지 말라. 

구약성경강해(8) / 레위기강해(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7,18)

 

하나님 손바닥에 숨겨진 동전

 

기독교 외부에서는 물론 일부 신자들도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오해합니다. 그런 해석의 첫째 문제점은 여호와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으로 격하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로 전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실종됩니다.

 

신약성경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임을 강조하려다 보면 창조주가 실종 내지 퇴색됩니다. 그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기독교 신자만의 구세주로, 나아가 뛰어난 인간 도덕선생으로만 제한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구약성경의 계시가 신약성경의 그것과 다르거나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점진적으로 계시가 진행되었을 뿐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손바닥에 동전을 감추고 손을 움켜쥐고 있으면 아이는 그 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손가락을 하나씩 풀면 동전의 1/5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속 펼쳐나가면 점점 뚜렷이 보입니다. 아버지가 손에 쥔 것은 처음부터 동전이었지 중도에 바꾼 것이 아니듯이 성경의 계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창3:15) 십자가 복음이라는 동전을 하나님은 창세기에서부터 손 안에 감춘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구약 성경에 정진하고 성령이 역사하면 손가락이 한두 개밖에 열리지 않았어도 동전의 모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다 풀린 것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셨을 때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간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래서 인간이 그 다스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사역과 삶과 십자가 죽음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손가락을 다 푼다고 해서 동전 전부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동전의 앞면밖에 보이지 않는데 거기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동전의 뒷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 그들은 숨겨진 동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손에 칼을 쥐고서 로마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또 돈을 쥐고서 나눠주지 않는다고 아예 등을 돌렸습니다.

 

주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올라갈 때에 그 손바닥의 동전이 뒤집어지며 완전히 보였습니다. 그 때까지 제자들이 이해하거나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의 복음이 드러났습니다. 동전의 뒷면에는 십자가의 그림이 새겨져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마지막 말씀을 하셨을 때에 인류 구원의 길은 활짝 열렸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오던 진리가 온 세상에 완전히 훤히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의 영혼에 강력히 임했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을 묶고 있던 사탄의 견고한 진을 창세기 3:15에서 예언했던 그대로 깨트려주었습니다. 영적으로 시체였든 제자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경륜과 연결해서 구속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저차원의 불완전한 진리이기에 신약성에서 고차원의 완전한 진리로 수정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십자가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 신구약성경 66권의 유일한 메시지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편애한 것이 아니요, 신약의 예수님도 기독교 신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

 

오늘의 본문은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두세 개 펼쳐진 셈입니다. 신약 성경의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다 펼쳐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 사회에선 부모나 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은 최고의 선으로 간주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불효자요 국민으로 자격도 없습니다. 원수란 내 쪽에는 잘못이 아예 혹은 거의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큰 피해를 입히거나 때로 생명마저 빼앗는 자입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선 자기 생명마저 걸어야할 때가 있으므로 최고의 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악플만 달아도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고 고발하여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윤리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무려 3500년 전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본문은 언뜻 이스라엘의 동족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시가 조금씩 더 명확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정말로 놀라운 진술을 합니다.(사19:19-25) 그날에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서고 그들이 여호와를 부를 것이며 한 구원자를 보내어 건지실 것이므로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구약시절에는 성취되지 않았고 신약시대에 실현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마가가 1세기 중엽에 애굽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알렉산드리아는 중세까지 비잔티움과 함께 기독교의 2대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그 후예들이 Coptic Christian으로 지금 약 천만 명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자면 여호와 대신 예수님을 경배했기에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또 이스라엘, 애굽, 앗시리아 셋이 세계 중의 복이 될 것이며 애굽은 나의 백성, 앗시리아는 내 손으로 만들었고, 이스라엘은 나의 산업이라고 선포합니다.(24,25절) 그 세 민족만 사랑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애굽과 앗시리아는 모든 이방 국가의 대표로 열거되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서 자기들 탐욕을 채우려고 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혀 왔던 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십자가 안에서 모든 민족을, 당신을 거역하는 자는 물론 당신의 백성의 원수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방하는 불신자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라, 인종, 피부 색깔로 절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를 평가 판단하는 기준인 학벌, 외모, 가문, 건강, 재산, 권력, 종교 등은 그분의 사랑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단 한 치의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당시에 유대 사회가 차별하여서 저주하고 상종도 않던 이방인, 세리, 창녀, 불구자, 귀신들린 자들과 친밀히 교제했으며 마지막에는 살인자까지 사랑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려면 절대 만나선 안 된고 그 만남 자체로 같은 부류로 취급되어 멸시 받을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주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시기에 주님은 그런 자들을 치유하고 구원으로 초대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에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사람들마저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당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실현해 보였습니다.

 

정신병자 아들 대신에 죽는 엄마

 

최근에 한국의 한 PC방에서 우울증 환자가 아무 관계없는 자를 살인했습니다. 정신 질환자에 의해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자 엄격히 처벌하라고 청와대 청원이 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경찰에서 진술했다고 걱정했습니다. 어떻게든 자식의 형량을 줄여 보려는 애끓는 사랑입니다.

 

엄마가 살인죄를 두둔하거나,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사형이 선고되고 순전히 가정이지만 사형수 대신에 죽어주는 제도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 엄마는 살인자 아들 대신에 사형대에 오를 것입니다. 심신이 아무리 미약해도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또 당연히 여러분들도 그럴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고 숭고합니다, 아무리 칭송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혈연관계라 자연스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는 생명에 있고 자식은 피로 맺어져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나눠준 자신의 분신이 생명이 끊기도록 버려둘 부모는 없습니다.

 

인간 중에 자식은 물론 친구를 위해 죽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주 가끔은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서 죽습니다. 지하철에 떨어진 자를 구해주고 대신 죽었다는 기사를 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원수를 위해서 죽는 자는 없습니다. 한국사람 어느 누구도 절대로 이또히로부미를 대신은커녕 위해서도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보혈에는 하나님 당신께서 창조하신 영원한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엄마처럼 애끓는 사랑으로 당신이 지으신 인간들을 죄 값을 대신 감당하며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예수는 이스라엘의 신이고 기독교는 서양종교인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비방하며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8,10)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사랑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완료한 후에 심히 기뻐하셨기에 절대로 인간을 당신의 원수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본성상 인간을 아예 미워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사탄뿐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속이고 농간 조종하는 사탄만 그분에게 원수입니다. 그분을 알고 따르게 된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신앙으로 싸울 대상은 혈과 육 즉, 인간 세상과 이웃이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거짓의 아비 사탄과 평생을 두고 영적인 전투를 벌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따로 택한 이유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사랑하면서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만 택하여 특별히 큰 이적으로 간섭하며 보호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명시적으로 밝히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최고로 연약한 종족이라 불쌍해서 복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애굽과 앗시리아 같은 세계 최강국에게 당신의 유업을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최고로 연약하다면 자연히 세상에서 궁핍해지고 인간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됩니다. 그럼 아무래도 천국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찾고 찾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온 사방이 막히도록 해서 하늘만 바라보게끔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도 같은 뜻입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 고향 땅에선 상당한 유력자요 부자로 살았는데 그 모든 지위 신분을 버려야 했습니다. 당시에 조국을 떠나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부자들은 강도떼의 대상이 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으로 갈 바 모르지만 순종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도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고향 땅을 등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적 기준으로는 이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이유는 고향에서의 우상숭배가 싫었던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신전에서 음란한 파티를 하고 또 우르라는 지명이 불(火)을 뜻하듯 자식을 불에 태워 바치는 것으로 유명한데 도무지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고 절감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삶에 기쁨과 행복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흥미롭지 않습니까? 만약에 자식들이 있었다면 어쨌든 남들 보기에는 자식들이 불에 태워져 바쳐지는 것이 싫어서 고향을 떠난 것이 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육이나 생활환경이 더 좋은 나라에서 자식들로 공부하고 살게 하려고 부모 자신들의 삶은 희생하고 이민 가듯이 말입니다.

 

자식이 없는데도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순전히 사악한 우상숭배가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정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북한에서 고위 간부가 전혀 삶에 불편이 없는데도 오직 인권과 자유와 특별히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탈북(脫北)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웠습니다. 그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방에게 당신의 복이 전해지는 통로로 삼은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볼 때는 그는 완전히 세상 사람이 아닌 별종 인간이었습니다. 고향에서 떵떵거리며 평안하게 잘 살 수 있는데도 노부부 둘이서 먼 이국땅에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 그 부부의 신앙생활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우상에 절하지 않는데 아예 자기들 신상은 물론 신의 이름도 없었습니다. 단순히 기도하고 묵상만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삶 자체가 자기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에게서 완전히 보호받고 인도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큰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갔다가 자기 혼자 살려고 아내를 팔았으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큰 재물을 얻어서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조카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렀고 노획한 물건들은 하나님께 십일조부터 드리고 나머지는 종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첩을 두는 일부다처제가 예사였는데 종을 4백 명가량 부릴 정도로 풍족하며 아이마저 없는데도 아내 사라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인간적 생각으로 지킬 목적으로, 그것도 아내가 먼저 간청하자 마지못해 후처를 들였습니다. 후처와 그에게서 난 아들이 본처를 핍박하자 아들을 낳아준 젊은 후처를 더 아끼는 것이 일상적인데 그는 도리어 본처에게 그들을 다스리도록 완전히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당장에 여호와를 믿고 따르지는 않았어도 뭔가 다른 그의 삶을 통해 뭔가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찔림도 주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이국땅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면서도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는 모습은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 즉,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택하여 특별히 인도하신 목적입니다.

 

복의 근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오늘의 본문 17절을 다시 봅시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손가락이 한두 개만 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말로 바보라고 욕하면 인격을 살인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잘못을 범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했습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다 펼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형제를 견책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당연히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자입니다. 그 잘못을 깨닫도록 사랑으로 품고 그에게 간곡히 권면하며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엄청난 말씀이 따라 나옵니다. 그럼으로써 그 죄를 감당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그에게 죄가 임하지 말도록 하라는 의미로, 표준새번역본은 그대로 두면 네 책임을 벗을 수 없다는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뜻은 같습니다. 이웃의 죄를 그냥 두면 이웃이 심판에 흘러가는 데도 방치하는 셈이고 그러는 신자에게 하나님은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17절을 18절과 연결하면 어떤 뜻이 됩니까? 쉽고도 간단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사랑하면 그 사람을 심판에서 건지게 되고 신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수를 갚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불신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를 지속할 것이고 그럼 신자는 징계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신분의 의미가 엄청나지 않습니까? 지금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낼 때 주신 약속이나,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운 언약이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기 직전에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알게 하라는 지상명령의 뜻 모두가 동일하게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주 신자가 망하면 세상이 망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모든 선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여서 그분이 이 땅에서 실종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지면 멸망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의 징조가 자연 재앙이나 죄로 타락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연 재앙은 유사 이래로 더 정확히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그 형벌로서 항상 있어왔고, 죄로 타락한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 때가 더 심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정(無情)하여서 냉혹해질 때 주님이 다시 온다고 선언합니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풍조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이웃과 담을 쌓게 되고 나와 내 가족만 사랑하게 되니까 필연적으로 인간사회에서 사랑은 실종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동체에서 이해타산 따지지 않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조직체로 셋이 있습니다. 학교와 교회와 가정입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서 사랑을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입시 학원이 되었습니다. 그럼 교회에서 사랑을 가르칩니까? 죄송하지만 도리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합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자기 욕심이나 감정이 앞서고 심지어 죄가 개입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살리려고 엄마가 대신 죽더라도 다른 자식까지 함께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최고의 선을 베풀었고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재판을 받고 최고로 고통이 심한 처형인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쏟았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 한 마디 말씀도 없었고 오히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에 이해타산은 물론 차별 욕심 감정 등 부정적인 요소라곤 단 한치도 내포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십자가 사랑을 주변에 나누지 않으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게 거창하게 따질 것도 없습니다. 당장에 신자의 가정부터 무너져 내립니다. 장로와 권사들 중에 교회에서만 거룩하게 사랑하는 척 하는 쇼윈도우(Show Window) 부부가 많고 PK(pastor’s kids – 목회자의 아이들)가 더 빗나가고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하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 특별히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가능한 많이 받아 누리고 또 실제로 주변에 나눠주고 있는 실력입니다. 말씀을 삶에 실천해야만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웃을, 원수를 사랑하되, 인간적 이해타산 하나 없이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감동스럽게 하고 성경을 줄줄이 외우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습니다.(고전13:1) 헛소리도 아니고 아예 시끄러운 소음(noise)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만남들과 일들은 물론 자신의 소망과 계획까지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삶에 적용 실천하는 실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신자에게 처음이자 끝, 알파요 오메가인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너무나 부담이 되고 힘든 요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원수인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하셨기에 충분히 그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아직도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잘 몰라서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이 더뎌선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체험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거듭났다면 그래서 그분의 사랑의 권능을 안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제 같은 경우 저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저를 바꿀 수 있는 힘이라고 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친구나 부모 아니 자식들의 사랑도 인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분의 원수 같던 저를 이렇게 고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못할 일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원수를 신자 자신의 의지 도덕 종교 영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선 어느 누구도 못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무가치함, 무력 무능함, 무지함을 철저히 자각하고 가는 곳다마 제단을 쌓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뿐이라고 말입니다.

 

또 저를 통해 그 긍휼이 제발 제 이웃에게도 전해지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정말로 마음의 중심에 원수를 사랑하고자 한다면, 아니 그를 불쌍하게라도 여기면 우리와 함께 하는 성령이 역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반드시 권능을 발휘합니다. 신자 자신부터 주님의 사랑이 절실함을 고백하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주변에 전해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미숙하여 원수 아니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수합니다. 믿음이 적어 때로 잘못과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의 중심이 오직 주님을 향해 있다면 반드시 주님이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해주십니다. 그 상대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감싸 안아서 우리와 화해하게 하여서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미움을 줄이고 원수라는 인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없고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생활을 열심히 성실히 한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과 손을 잡고 매일 동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매일 아침 기도 시간에 이것저것 이뤄달라고 간구하는 일도 중요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저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하십시오. 이웃의 죄의 멍에를 제발 벗겨달라는 기도부터 하십시오. 그럼 장담하건대 여러분 자신의 삶과 인생도 너무나도 풍성하고 아름답게 함께 변화 성장됩니다.

 

10/2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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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레10:1-7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첫째 요소 master 2018-09-13 397
9 레6:8,9 번제단 불을 꺼지 말아야 할 이유 운영자 2013-08-23 1727
8 레6:4-6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제사 운영자 2013-08-23 227
7 레위기 13장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운영자 2011-10-28 376
6 레위기 27장 28-29절의 정확한 뜻은? [1] 운영자 2011-07-02 9698
5 레6:25 이중 인격자가 되어 있는가? 운영자 2011-02-04 360
4 레1:2-4 죄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라. 운영자 2010-08-18 2253
3 레10:6 조의(弔意)는 표하되 명복(冥福)은 빌지 말라. 운영자 2010-01-23 670
2 레5:1 침묵하는 큰 죄악 운영자 2009-10-29 752
1 레4:3-6 담임목사가 범죄하면? 운영자 2009-09-1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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