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24:10-16) 주일예배에 상복(喪服)을 입는 신자들 

구약성경강해(10) / 레위기강해(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0-16)

 

성경이 침묵할 때는?

 

레위기의 주제는 하나님 당신이 거룩하니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법 정결법 같은 율법이 주된 내용이고 사건은 셋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와 받지 않으시는 제사 즉, 아론의 아들들이 드린 두 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첫 걸음이자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세 번째로 같은 맥락의 사건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가 죽음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싸우다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심한 말이 튀어나올 수 있는데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와가 너무 심한 벌을 준 것 아닙니까?

 

본문에는 지금 그 싸움의 원인과 경과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나님을 모욕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 사건의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이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원인과 방식이 아무리 경미해도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유와 방법 불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면 사형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들려면 목숨을 걸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잘 아는 일이나 관습이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본문을 잘 살펴보면 당시의 전후 사정을 추정할 수 있는 힌트가 숨겨져 있는데 본문도 예외는 아닙니다.

 

바로 10절인데 죽임을 당한 자가 아버지는 애굽인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혼혈이라고 말함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할 동안에 서로 통혼하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또 주로 그런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함께 따라 나왔습니다.(출12:38)

 

문제는 고대는 부계(父系)사회인지라 아버지가 히브리인이면 어머니가 애굽 사람이라도 유대인으로 자동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가 애굽인이면 엄마가 히브리인이라도 우거하는 이방인으로 대우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본진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장막을 치고 거주하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시대와 장소와 인종과 문화와 종교의 구분 없이 그 죄에 찌든 본성은 동일합니다. 아무리 율법에서 우거하는 이방족속을 자국민과 똑같이 대우해주라고 명해도 팔은 안으로 굽습니다. 또 그런 율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교육 훈련되지도 않았습니다. 전승이 사실이라면 따로 떨어지게 살게 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알게 모르게 차별한 것입니다.

 

싸움이 격화되면서 그 동안에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단 지파 사람들도 이스라엘인 편만 들었을 것입니다. 그 상대가 미우면 그가 믿는 신도 함께 미워집니다. 요즈음 신자들이 죄를 범하면 성경 진리나 하나님에 잘못이 전혀 없음에도 불신자들이 마치 기독교와 예수님에게 하자가 있는 양 비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개역본 성경의 10절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했다는 구절에 ‘여호와의’라는 단어가 영어 소문자처럼 작은 글자체로 적어놓았습니다. 원문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원문에는 정관사가 붙어서 “그 이름(the Name)”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하고 신령해서 이미 이때부터도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종교적 이유를 떠나서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은 실은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강해 때에 배워서 알다시피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정확하게는 주어와 Be 동사만으로 “내다”라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이 애굽 사람은 모세가 성경을 기록하기 전이라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구체적 사정을 몰랐습니다. 그럼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했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이름이 있지 않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일단 이름이 붙으면 그 이름이 드러내는 특성에 따라 제한 받습니다. 세상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라 이 세상에 이미 알려져 있는 어떤 존재나 사물이나 사안 안에 한정되어질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이 없으시고 모세에게 본명을 가르쳐줄 수도 없었고 또 가르쳐주지 않으셨지만 당신을 이렇게 부르라고 당신께서 직접 지시한 사실은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살인하고 애굽에서 도망친 이래 40년간 소식도 없다가 80노인이 되어서 나타난 바로의 왕자였던 자가 동족을 구원하겠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들이 누가 보내서 왔느냐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줘야 합니까?”라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었다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출3:15) 당신의 영원한 이름이자 이스라엘이 대대로 기억해야 할 당신의 표호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긴 이름을 실제로 불렀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바로의 왕자로 지냈지만 모세는 히브리인임에 틀림없다고 하나님이 확인해준 것입니다. 또 자기들 조상과 언약을 맺은 바로 그 하나님이 이제 언약을 실천하려고 모세를 보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첫째가는 뜻은 당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여호와와 그 이름을 부르거나 생각할 때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임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애굽인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갖는 깊은 의미는 몰랐으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정도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희 여호와는 너희 민족의 신이지 나와는 상관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독교는 서양종교일 뿐이고 예수가 밥 먹여주느냐고 비방한 셈입니다. “여호와가 너희만 편애하지 않느냐? 나 같은 애굽인은 괄시 천대하지 않느냐? 나의 신은 애굽의 바로요, 황소신이요, 여신 Isis일 뿐이다”라도 대들었던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하나님?

 

그럼에도 그를 쳐 죽인 것은 좀 심하다는 감을 여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원수를 갚지 말라고 즉 사랑하라고 명했습니다.(레19:18) 또 요즘으로 치면 종교의 자유는 허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본문에 이어지는 17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가장 중한 죄이기 때문에 가장 중한 벌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구절은 특별히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해석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고귀합니다. 그 생명은 오직 당신께서 주관하십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그 주권을 거역 침해하는 것으로 그분 대신에 사람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 거역한 것도 같은 차원입니다. 이름은 그분 전체를 의미 상징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래서 입에도 올리지 않는데 대놓고 모욕하며 저주했습니다. 그딴 신은 나에게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신을 살해한 셈인데 인간을 죽인 자도 마땅히 사형인데 어떻게 묵과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가 선악과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요한계시록까지 말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성삼위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인 16절은 거류민이든 본토인이든 구별하지 말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시낸 산에서 금송아지를 음란하게 섬겼을 때 하나님은 격노하여 당신의 백성임에도 진멸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세 번이나 간절히 중보 기도하자 그 진노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원칙은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민수기 11:4에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섞여 사는 무리 즉, 우거하는 이방족속이 선동하자 이스라엘이 넘어가서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본문의 애굽 혼혈인 같이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타락시킬 위험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틀림없이 민수기 사건보다 앞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모독하여 민족이 진멸당할 뻔 했습니다. 그후로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의심 불만을 모세를 향해 간접적으로 쏟아 부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직접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그것도 그분의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않는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면전에 행한 것으로, 성경 최초의 사건입니다. 앞으로 혹시 잡초가 자라 풀밭을 다 망칠 것을 대비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의미로 심판한 것입니다.

 

모세가 14절에서 어떤 지시를 내렸습니까?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들이 그 사람에게 안수하고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안수는 이미 그 말을 들음으로써 정신적 영적으로 오염되었던 것들을 그에게 전가하라는 것입니다. 그들부터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되어 다시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가 대행한 여호와의 심판에는 단 한 치의 불의도 없습니다. 이 또한 구약성경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십자가 복음의 하나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면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바입니다.

 

심각하게 자문(自問)해야 할 질문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물어볼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는 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모독하고 훼방하는 일은 없는가입니다. 당연히 그 이름 자체는 두려워서라도 모독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은 하나님이지 하느님으로도 부르지 않습니다. 혹시 뭣 모르고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교인이 있으면 그 이름이 왜 틀렸는지 그 정확한 의미를 가르쳐서 고쳐줄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결국 행동으로 그분을 모독하는 죄만 저질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으로 또 삶의 방식에서 그분을 모독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솔직히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자는 저부터 필두로 아무도 없습니다.

 

우선 주일예배에 오면서 하나님 보기에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지난 6일간 세상에서 신자답게 살지 못했음을 잘 압니다. 불신자들에게서 “예수 믿는 신자가 왜 저래? 우리와 하나 다를 바 없이 똑같네. 아니 더 위선적이야.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서 돈만 밝히니 뒤로 호박씨나 까고 있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습니다. 신자마다 그 종류와 의미만 다를 뿐 알게 모르게 수시로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불신자 시절보다는 훨씬 나쁜 행동을 덜 합니다. 어떻게든 경건하고 의롭게 살려고 최선의 노력은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훼방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덕적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기본적인 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오래 전 한국영화 ‘친구’에서 “네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아주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먼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뼈 빠지게 돈 벌어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학교 보냈더니 너는 기껏 깡패 짓이나 하고 다니느냐는 꾸중입니다. 또 “아버지가 무슨 일로 바쁜지는 몰라도 자식이 이렇게 깡패 짓하고 다니는데도 모르고 있느냐? 네 아버지는 혹시 진짜 아버지가 아닌 것 아니냐?”는 뜻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고아라도 어쨌든 낳아준 생부는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뿌리, 근본, 뼈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다면 저러지는 않는데 도무지 인간으로서 근본이 안 되어있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모욕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그런 욕을 먹고 다닌다는 것을 막상 진짜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대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몇 차례 비유로 들었지만 자식이 조폭이 되어서 자기 집 안방처럼 교도소를 드나들어도 부모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용서를 구하면 부모는 더 애처로워집니다. 반면에 부모가 찢어지게 가난해서 다른 부모들처럼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대어가며 순전히 자기 노력만으로 판검사가 된 자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 부끄러우니 나를 찾아오지도 말고 내 아버지라고 어디 가서 말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부모의 가슴은 찢어집니다.

 

하나님의 장례식을 치른 마르틴 루터

 

아비 없이 자란 놈이라는 것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모독으로 자식에게만 아니라 아비에게도 엄청난, 아니 아비에게 가장 큰 모독이 됩니다.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신자가 세상 앞에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설교에 예화로 자주 등장하지만 본 주제와 가장 적합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내인 카트리나가 하루는 새까만 상복을 입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누구 장례식에 다녀왔는지 물었더니 아내는 하나님의 장례식에 갔다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당연히 “무슨 그런 망령된 말을 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이 죽기 왜 죽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은 절대 해선 안 된다”고 다그쳤습니다. 아내가 다시 답하길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꼴이 꼭 하나님이 죽어서 안 계신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횃불을 과감히 들고 일어섰지만 가톨릭교회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았고 자기를 따라 동조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사방이 막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점차 절망의 늪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수녀 출신에다 고아 열 몇 명을 자식으로 입양해 키울 만큼 어쩌면 믿음이 더 좋은 그녀가 루터의 믿음 없음을 따끔하고도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인내하며 기다리고 계시거나 택한 자들을 구원 과정으로 인도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싫어합니다.

 

전 국민의 주민등록이 온라인화 되지 않았을 때에 학생이 잘못을 범해 경찰서에 잡혀가면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미성년자인지라 네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연락이 가면 야단을 맞거나 아니면 아버지 이름에 누를 끼치기 싫어서 아비 없는 고아라고 우기기도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고등학생이 육신의 부모도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신자인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훨씬 못한 것 아닙니까? 신자가 세상에서 나쁜 짓을 범하고는 불신자인척 오리발을 내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삶의 자세가 정말로 하나님 그분이 실제로 아버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범했다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진작 나에게 연락 안했니? 어떤 일이 있어도 아빠는 네 편이고 어떻게든 도와줄 텐데.” 오히려 연락하지 않은 사실을 야단치고 훨씬 더 섭섭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육신적 아버지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신자에게,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꿔 구원을 준 자녀에게 어떻게 대우하겠습니까?

 

다시 생각해볼 질문

 

이제 질문의 내용을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분이 나에 대한 거룩하고 영광스런 계획을 다 마련해 놓으시고 지금 인도하고 계시는 중임을 믿습니까? 그래서 아직 잘 이해가 안 되고 모르지만 반드시 합력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도 확신하십니까? 최소한 끝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사실에 정말 의심이 없습니까?

 

어린이들이 서로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고 자랑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슈퍼맨이라고 하면 다른 아이는 배트맨이라고 우깁니다. 자기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못해주는 것이 없다고 여기고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순전한 믿음이 없으면 천국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더 이상 두려움이 없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자체가 나에게 오직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심성과 감정과 의지력 모두가 연약하여 루터처럼 종종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셨고 우리의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보호 인도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있기에 그에 걸맞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적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까지 영원히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과 죄악과 사람 앞에 당당해져야 합니다. 흑암의 세력을 절대 두려워말고 맞서 대적해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온전히 체험했다면 그래서 그분과 개인적 인격적 대면을 하여 그 인생이 새롭게 뒤집어졌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게 됩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새롭게 바뀌며 어떤 삶이 의미와 가치가 있는 줄 깨달아 실천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때로 쓰러질지라도 한걸음씩 동행함으로써 최소한 세상 사람들에게서 예수 믿는 자답다는 평가는 받아야 합니다.

 

다른 교인의 믿음을 포기케 말라.

 

본문의 애굽 사람이 여호와를 모독한 것은 분명히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본 사건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볼 내용이 또 있습니다. 출애굽 때에 조국을 등지고 다른 민족인 이스라엘을 따라 나선 까닭은 아내를 아주 사랑했던지 아니면 아내가 남편을 주도했는지 우리로선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애굽에서 여호와가 일으킨 열 가지 기적을 겪었고 특별히 마지막 열 번째 애굽 장자들이 전부 심판받는 모습에 큰 쇼크를 받았을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신이야말로 가장 센 최고의 어쩜 유일하게 진짜 신일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거기다 홍해의 기적과 또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에서 생수가 나는 기적까지 겪고 나선 정말로 이스라엘을 따라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혈이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이스라엘로부터 차별을 받았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황소신인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음란하게 섬기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등 엄청난 기적들을 겪은 것이 언제인데 그렇게나 빨리 그 큰 신을 버리고 애굽의 신을 섬기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습니까? 덩달아 기껏 생기려던 여호와에 대한 믿음도 거의 없어져버렸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불신자가 어른이 되어서 교회 나오는 첫째 이유는 고난을 이겨내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해선 이미 2-30년 다닌 신자들에게 실망하고 믿음이 떨어지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들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위선을 떨어서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 안에선 의롭고 경건하게 행동합니다. 또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허물이 있고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교리를 통해서도 배웁니다.

 

그보다는 2-30년 신앙생활을 한 믿음이 아주 신실해 보이는 신자인데도 조그만 문제와 고난이 생기면 마치 하나님이 없는 양 그저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합니다. “내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 왔는가 보다. 저렇게 기도를 은혜롭게 하고 말씀도 꿰뚫고 있는 장로님이 우리에게 매번 믿음으로 이기라고 가르치더니 정작 본인이 저렇게 걱정만 하면 그 가르침도 믿음도 엉터리라는 말인가? 내 같이 믿음이 연약한 자는 기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네.”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거룩하게 통치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모든 문제와 고난의 궁극적이고 유일하며 완전한 해답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알지도 못하는 길로 이끌지만 결국은 그분의 인도가 옳더라는 것을 일이 마무리 된 한참 후라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의 방식이 이해가 안 되는 이유도 간단합니다. 내 욕심, 생각, 뜻, 계획에만 사로잡혀 있으니 그분의 뜻을 미처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옳다는 진리를 살아갈수록 매번 깨닫고 또 깨달아서 나중에는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에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궁극적 해답이라는 것에 확신이 없다며, 또 그런 확신 가운데 살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주일예배에 근사하게 차려 입고 왔어도 새까만 상복(喪服)을 입고 예배드리는 꼴입니다. 과장된 말씀이 아닙니다. 어른이 되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첫째 이유가 고난을 이기는 것인데 그 첫째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고난을 이긴다는 의미를 타종교인이나 불신자들은 고난이 완전히 없어지고 새로 좋은 일이 생겨야 한다고 여깁니다. 예수 믿는 신자는 다릅니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든 가운데도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으며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누리고 반드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소망함으로써 고난을 이겨냅니다.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고난에 잘 대처 반응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중의 일상적인 삶에서 실현함으로써 더 이상 주일예배에 상복을 입고 참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11/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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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레6:4-6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제사 운영자 2013-08-23 227
7 레위기 13장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운영자 2011-10-28 376
6 레위기 27장 28-29절의 정확한 뜻은? [1] 운영자 2011-07-02 9698
5 레6:25 이중 인격자가 되어 있는가? 운영자 2011-02-04 360
4 레1:2-4 죄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라. 운영자 2010-08-18 2253
3 레10:6 조의(弔意)는 표하되 명복(冥福)은 빌지 말라. 운영자 2010-01-23 670
2 레5:1 침묵하는 큰 죄악 운영자 2009-10-29 752
1 레4:3-6 담임목사가 범죄하면? 운영자 2009-09-1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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