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이 땅에 쌓아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본문은 참으로 부끄럽게도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목회자들이 신자들더러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만들기 위해 인용되고 있는 대표적 구절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최고의 것으로 교회 일에 바치는 것이 하늘에 바치는 것이고 그러면 나중에 반드시 면류관을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에 작정 헌금을 많이 해야 하고 교회 생활에 모든 시간과 여유의 최우선을 바쳐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물론 하나님에게, 또 교회의 일에 자신의 최선의 것으로 바치는 것 자체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이 신자의 값진 희생 없이는 이뤄지지 않으며 피 흘림이 있는 일에는 반드시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어떤 바침이라도 스스로 기쁘게 자원함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 그에 맞게 온전한 헌신을 합니다.
본문에서 ‘보물’은 신자가 가장 귀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작정 헌금의 액수나 바쳐지는 시간의 길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분명히 그 정의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마음이 가장 많이 쏠려 있는 일이나 대상이 보물입니다.
또 그 보물이 영생, 면류관, 천국, 부활 같이 하늘에 가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신자라면 이미 하늘에다 확보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기에 따로 하늘이나 땅 둘 중에 어디에다 쌓을까 염려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은 신자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신자가 무엇을 보물로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요컨대 땅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하늘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바칠 수도 없습니다. 그 반대로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다 쌓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제시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이라는 장소적 개념이 그 기준이 아닙니다. 좀과 동록과 도적으로 인해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들에 전혀 방해 받지 않고 영원토록 보물로서 가치를 유지하는가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다 썩어 없어질 것을 목표로 삼아 살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영원토록 살아 있을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썩어 없어질 것은 물질입니다. 아무리 큰 다이아몬드도 결국은 썩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밝히지 말라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자존심, 체면, 위신, 권세, 명예 등도 지나고 보면 다 헛되고 헛됩니다. 심지어 도덕, 윤리, 선과 의, 사랑조차 그러한데 그런 것들이 가치가 없다거나 선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끼리 보물로 치는 것은 언젠가는 바뀌거나 없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토록 선하고 거룩하여 썩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뿐입니다.(마19:17)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하면서 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요6:29)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만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골3:1,2,5) 땅에서 땅에 것만 생각하며 사는 불신자와 달리 신자는 땅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사는 자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이 땅에다 심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를 믿기 전에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예수를 믿고서 보니까 섞어 없어질 것들뿐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 마음이 자꾸 쏠리는 보물의 종류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엡3:7-9)라는 바울의 고백이 신자 자신의 생생하고도 변치 않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가치관과 인생관만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사실은 이 땅)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평생을 두고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고, 화목하는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실현하여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선 가장 작은 자에게 찬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 같이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부터 하나씩 해야 합니다. 쌓는다는 것은 적은 일이라도 하나씩 여러 번 하라는 것이지 큰일을 한 번에 해치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구태여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는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땅에서 하는 일이 반드시 선한 열매가 되어 하늘에 쌓인다는 것입니다. 생전의 선행으로 사후에 상벌을 차별해서 주신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신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또 그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는 신자의 일을 하나님이 다 주관하고 있지만 현실의 모습으로는 인간이 한 일로 하늘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이 땅의 것을 하나는 들고 갈 수 있다고 하자 죽을 때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전부 순금으로 바꿔 들고 갔습니다. 베드로가 아니 금은 이곳에선 땅에 까는 포장재인데 왜 무겁게 들고 왔느냐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섞지 않을 것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선일 뿐 아니라 절대로 섞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할뿐 아니라 그분이 시킨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교회 행사에 최고로 좋은 것으로 그것도 최고로 많이 바치라고 독려하면 보물을 교회와 세상이라는 장소적 개념으로만 구분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오히려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세상에 들고나가 쌓아야 합니다. 교회 건물을 화려하고 거창하게 짖기보다는 검소하고 실용적으로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적절한 사역 경비를 제한 헌금으로는 교회 내외부적으로 나아가 지역 사회에 구제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땅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물을 땅에 쌓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모아 교회에 갖다 바치기 이전에 교회에서 하늘의 것을 제대로 배우고 받아서 세상에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 눈에도 좀과 동록과 도적이 들지 않는 예수라는 진짜 보물이 따로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 보물을 하늘에 쌓는 법은 없습니다.
6/1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