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찾는 인생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8,39)
모든 사람의 일생은 죽기까지 자신의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여정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이 장소, 이 시간에, 이 모습으로 있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등의 질문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런 질문들의 해답을 모색을 하지 않는 자는 사실상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관심이 없는 척 아예 초연한 척 해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답을 찾다찾다 못 찾았거나 너무 어려워서 잠시 중단하고는 그런 척 할 뿐입니다.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답을 찾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얻기만 해도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설령 해답은 찾았지만 그 해답대로 살지 못했어도 반(半)만의 성공이 아니라 아주 크게 성공한 셈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답도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일생은 자아를 모색하는 투쟁의 연속입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기에 자신은 물질이며 우연히 동물과는 달리 고급한 지정의를 갖게 된 존재라는 답을 손에 쥔 것입니다. 이슬람은 알라 신에 대한 맹종 안에서, 유대교는 선민의식으로, 유교는 윤리적으로 절제된 삶 안에서, 특별히 불교는 자신을 죽이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불교의 자아를 발견하는 방식과 같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자기를 죽이는 작업은 그야말로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만 끝이 납니다. 세상에 대한 인간적 욕심이 모든 모순과 죄악과 고통의 원인으로 보기에 그것을 끝까지 없애는 작업을 하지만 성공을 한 자도 없고 또 성공을 했다고 쳐도 그 끝은 무(無)입니다.
그럼 그 때까지의 과정도 따지고 보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평생을 두고 노력하여 얻은 결과가 무이면 그 인생은 도대체 뭣 때문에 산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하든 자기를 완전히 죽이겠다는 노력 그 자체도 사실은 또 다른 욕심이자 미망(迷妄)입니다.
온갖 탐욕에 절어 있는 인간이 아무리 정진을 해도 당연히 그런 결과밖에 더 얻겠습니까? 간단하게 국민학생은 미적분 문제를 평생을 두고 풀어 봐야 정답을 절대 얻지 못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불완전하니까 득도를 하기 위해 정진해보지만 출발부터 불완전하면 도착지도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자아 발견 작업은 객관적으로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참으로 아이러니칼하게도 실패했다는 답을 평생을 두고 겨우 얻어 놓고는 그것을 정답이라고 착각하거나 우깁니다.
신자는 자기를 죽여야 하되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죽여야 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노력으로 불완전한 자기 안에서 절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선 바로 이 사실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기독교적 자아발견의 출발입니다.
불완전하다고 해서 어느 정도 좋은 점이 있지만 완전에서 조금 모자라는 불완전(lack of perfect)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불완전 즉 완전히 불완전(perfectly imperfect)하다는 뜻입니다. 만약 단순히 불완전하다면 완전을 향해 고치고 보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반면에 완전히 불완전하다면 기존의 것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부수기만 하면 불교처럼 여전히 무(無)가 됩니다. 자기가 부서지고 없어진 그 자리에 반드시 새로운 것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자아 발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절대로 의롭고 선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인격과 품성을 갈고 닦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그러하듯이 신자의 자아 발견도 역설적이어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배제된 상태에선 완전한 타락 상태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기전의 자아 상태로는 어떤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었으며 무슨 일을 해도 더럽고 추한 냄새만 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만이 오히려 자기에게 가장 큰 유익이요 자아를 죽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손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없는 자아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며 될 수도 없기에 한 시라도 빨리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부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워진 상태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 넣어야 합니다. 나 같은 이런 죄인도 당신의 생명을 줄만큼 사랑하시며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그 은혜가 너무 귀하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범사를 그 사랑 안에서 해석하여 판단하고 또 그 사랑을 받기에 걸 맞는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기 위해 훈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이 모습으로 있게 되었는지, 그래서 어떤 목적과 가치로 살 것이며,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의 모든 질문의 대답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여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다”(고전15:10)고 한 것과 동일한 고백이 자아 발견에 대한 유일하고도 영원한 해답이어야 합니다.
윌리암 젠킨이 “자아를 죽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화됨으로써 잃어버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신자가 되어 잃는 것은 오직 자아 하나뿐이지만 얻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1:3)입니다. 신자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면 그 위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다른 말로 오직 예수 믿는 신자만이 참 자아를 발견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순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평생을 두고 자아를 찾아 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이미 새롭게 찾은 완전한 자아 안에서 참되고 복된 인생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질 뿐 아니라 그분 안에 있기에 사람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미망과 갈등과 혼동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생을 구도자(求道者)로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信者)로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매일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도저히 자기 힘에 부대끼는 시련과 환난입니까? 추하고 더러운 생각과 욕심입니까?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여 테레사 수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자기의 자아를 인간적, 세상적, 종교적 방법으로 찾아 가려는 노력이 신자가 져야 할 십자가인데, 바로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불완전한 자신이 여전히 불완전한 자신 안에서 자아를 찾아보려 노력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가 아닌 어떤 다른 곳에서라도 자아를 발견하려는 모든 시도를 당장에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는 더 이상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참 자아를 발견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안타깝게 예수를 믿고도 자기의 자기 된 것을 정의나 도덕이나 심지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당신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라야 참 생명을 얻는다고 했고 또 바로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목숨을 걸고 있으면 평생 가봐야 무(無)라는 답변 밖에 얻지 못한다는 뜻 아닙니까?
지금 당신은 예수 안에서 이미 찾은 자아를 그분의 은혜에 완전히 내어 맡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기독교 안에서 당신의 자아를 찾아서 스스로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7/30/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