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2:17-20)

 

고난 제거가 믿음

 

인생은 누구나 생전 처음 살아보기에 모든 고난도 생전 처음 겪는 것이라 아무리 작은 고난도 매우 아프기 마련입니다. 신자들도 쉴 새 없이 닥치는 시련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겨내기는커녕 버텨내기도 힘에 부대낍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신자 개인과 가정이 없습니다. 각자가 남들이 모르는 고통을 겪고 있으니까 자기 고통이 가장 크다고 여깁니다. 사실은 모두 다 비슷한 상황인데도 왜 나만 이런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게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도 생깁니다. 

 

거기다 현세대는 하루가 멀다고 온갖 이상한 문제들이 발생해 TV 뉴스 보기가 두렵고 아침에 눈 뜨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할 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안타깝게도 믿음을 고난을 잘 이겨내는 씨름으로 제한해 버리는 신자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기도도 눈앞의 고난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게 해달라는 내용이 거의 전부입니다. 

 

당장에 힘들고 고달픈 사정 때문이라 이해는 되지만 신자들이 고난을 이겨내는 일에 믿음을 집중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 바탕에 고난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특별히 자기에게만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고난을 주거나 묵인하는 하나님에게 어떤 하자가 있거나 최소한 뭔가 귀책 사유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어서 빨리 이 고난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만 뜨겁게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지금 자기에게 뭔가 잘못하고 있으니까 어서 원상으로 고쳐 놓아달라는 속내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인생살이의 고달픔은 아담의 타락으로 피조 세계 전체도 하나님의 형벌을 함께 받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의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본성이 작동하여서 쉴 새 없이 서로 경쟁하고 다툰 자업자득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비상한 경우에 당신만의 비상한 목적이 없는 한 신자에게 의도적으로 고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요컨대 대부분의 세상 고난은 신자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어서 빨리 고난을 없애달라고만 기도하면 세상 사람이나 신자 본인이 어지럽혀 놓은 삶의 폐기물을 그분더러 뒤치다꺼리 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신자 스스로 세상 쓰레기의 청소부로 전락시키는 꼴입니다. 신자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이 자기를 앞서서 행하며 사랑으로 인도한다고 흔히들 고백합니다. 그 고백에 따르면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왜 하나님에게 치워달라고 기도합니까? 입술로 고백한 믿음과 똑같은 입술로 기도하는 믿음이 상호 충돌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말씀드린 대로 아주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이 고난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또 세상만사를 그분이 통치하시므로 인간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도 어쨌든 그분이 허락한 셈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고난 중에 힘들어하면 하나님은 더 힘들어하십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당연히 고난에도 그분만의 거룩한 뜻과 계획이 반드시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첫째가는 역할은 고난에서 탈출보다도 고난에 내포된 그분의 뜻과 계획부터 정확히 분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난을 이긴 믿음

 

성경에는 고난을 잘 이겨낸 믿음의 사람이 많습니다. 졸지에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고 중병까지 얻어서 살 소망이 거의 끊어진 욥이 구약의 대표일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최고 큰 고통인데도 순전한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과 끝도 없이 씨름했습니다. 결국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한 그분을 대면하고선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림으로써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대표인 바울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결국은 순교 당했으나 그의 믿음은 평생토록 흔들림 없이 굳건했고 신약 성경의 반(半)을 저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를 수 없는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는 속담처럼 이 두 사람은 우리가 따르기에는 너무 벅차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본문의 느헤미야는 한 손에 창을 들고 대적들의 온갖 훼방을 막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성벽 재건을 완성했습니다. 모든 현실적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내고 자기 인생에서 꼭 해야 할 바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기에, 마찬가지로 현실 삶의 온갖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유다 지파 히가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바사 왕의 술 관원이 되었습니다. 고대 왕들은 항상 모반과 암살 위험에 놓여 있으므로 술을 먼저 맛보는 것은 왕을 대신해 언제든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직분이라 왕의 전적인 신임을 받아야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자기들이 정복한 식민지 유다 족속인데도 느헤미야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느헤미야의 인품과 지혜가 자기 부하들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인 느헤미야의 입장에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가장 큰 원수를 섬기는 꼴입니다. 왕을 대할 때마다 그 심정이 매우 미묘하고 때로는 쓰라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술잔에 자기가 슬쩍 독을 타서 죽이고 싶은 마음도 불시에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꾸로 왕을 지극 정성으로 섬겨서 계속해서 신임을 얻은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조국은 망했으니까 새 세상 바벨론에서 형통 출세하려는 생각이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한 까닭이 자기들의 우상숭배와 율법을 어긴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다 주전 538년에 고레스왕이 칙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포로를 석방 귀환시키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조치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귀환한 포로들이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에 주전 516년에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했습니다. 

 

지금은 스룹바벨의 성전이 완공되고도 약 60년이나 지난 주전 444년 경입니다. 느헤미야는 부모로부터 여호와 신앙을 물려받았고 자기 민족의 역사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육신은 아무 부족함 없이 편안하고 장래도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나, 영적으로는 우상을 섬기는 최고 중심부에서 매일 생활해야 하니까 아주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왕의 최측근으로 봉직하도록 허락한 데는 그분만의 계획이 있으리라 믿고서 자신이 처한 현재 위치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동족을 돕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간단히 살펴본 대로 성경의 위인들이 겪은 고난에서 현대 신자가 반드시 첫째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당신을 더 깊이 알게 해서 자기 믿음을 성숙하게 하려는 뜻임을 그 심한 고난들을 참아내면서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장래가 탄탄히 보장되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 전파에 헌신하면서부터 그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느헤미야도 이방 땅에서 고국의 원수인 이방의 왕을 섬겨야 하는 한심한 처지에 빠졌으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오히려 그 일에 충성하면서 동족을 도우려 했습니다. 신자 또한 가장 먼저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이 과연 하나님이 맡겨준 일을 함으로써 생겼는지, 최소한 그 고난으로 그분과 깊고도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되었는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믿음 이전에 성실함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으로 편안히 지내는 가운데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고국에서 자기를 방문한 친동생 하나냐 일행에게서 예루살렘의 상황에 대한 참담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1:3)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은 재건했으나 주변 대적들의 방해로 성이 많이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에스라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런 고난으로 영적으로도 나태해져 공의를 굽게 하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등 온갖 죄악에 다시 빠졌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조국이 바벨론에 멸망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아서 느헤미야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고서 왕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게 해달라고 과감히 요청했고 왕도 큰 관용으로 수락하며 대폭 지원해 주었습니다. 유다 총독이 되어서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이 과연 동생의 그  보고대로 얼마나 훼파되었는지 밤새 혼자서 몰래 둘러봤습니다. 그리고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며 성벽 재건 공사를 독려하자 백성들도 기꺼이 호응했습니다.(17,18절)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주변 지역의 총독들이 심한 말로 모욕하면서 본격적으로 그 공사를 훼방하기 시작했습니다.(19,20절) 유다 북쪽의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은 모압 출신으로 이름이 ‘달의 신이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도비야는 암몬 사람으로 유다 동쪽 암몬의 총독이었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유다 남쪽의 상당한 지역을 다스리는 족장이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셋 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으로 유다의 북쪽과 서쪽은 산발랏이, 동쪽은 도비야가, 남쪽은 게셈이 맡아서 예루살렘 성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들은 성벽이 재건되면 그 성이 다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고 유대가 크게 부강해져 자기들 영향력과 이익이 줄어들 것을 크게 염려했습니다. 그들로선 유다가 계속 나태에 빠져서 느헤미야가 오기 전의 쇠퇴한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자기들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합심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느헤미야의 일을 계속해서 방해한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전략은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었습니다.(19절) 유다 백성의 사기를 꺾어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그런 전략이 먹힌 적이 있었습니다.(스4:12,13) 유다는 바벨론에 원한을 품은 패역한 백성이므로 성전을 건축한 후에는 조공을 바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시 아닥사스다 왕에게 모함했고 그 음해에 왕도 넘어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왕이므로 동일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백성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들로선 그동안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얻고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왕에게 보내는 상소장에 제국과 왕의 권세와 부가 훼손될 수 있다고 크게 부풀려 모함했을 것입니다. 그들 셋이 유다의 반대 편에 서면 왕도 식민지끼리의 분쟁을 다스리기가 귀찮아지므로 다수인 자기들 편을 들어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왕은 그럴싸한 상소문보다 또 틀림없이 그들과 결탁한 바벨론의 일부 신하들이 그 모함에 동조했을 텐데도 느헤미야만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왕은 그가 진심으로 신실하고도 정직하게 자기에게 충성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도 바로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집안에서나, 그의 감옥에서나, 나중에 바로의 왕궁에서나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애굽인들이 오히려 유대인인 그에게 모든 업무를 맡겼고 그 모든 일에서 요셉이 형통했던 경우와 똑같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이후로도 온갖 음해와 방해 공작을 계속 펼쳤으나 느헤미야는 의연하게 모든 훼방을 물리치고 결국은 성벽을 재건해 냅니다. 백성들로 한 손은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일을 하게 했고 사방을 경계하는 파수꾼도 세웠습니다. 도비야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으나(느4;3), 그들이 처음 걱정했던 대로 아주 튼튼한 성벽을 세웠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까지 보태져 예루살렘은 이전처럼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세계 최강의 로마 군대가 격렬한 공성전을 삼 년이나 펼치고서야 겨우 함락시켰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대적들이 느헤미야를 수많은 고난에 빠트렸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닥사스다 왕 때문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성실, 정직, 실력, 지혜 등으로 형성된 그의 사람 됨됨이를 왕이 온전히 믿어주었습니다. 고난이 닥친 후에야 떼쓰듯이 기도하는 일에만 믿음을 집중해서 겨우 견뎌내는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의 평소 삶이 어떤 고난에도 꿈적도 하지 않을 만큼 신실했던 것입니다. 그의 굳건한 믿음이 그의 인격까지 굳건하게 성숙시켜 놓았기에 어떤 고난도 그에게 힘을 쓰지 못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어영부영 살다가 고난이 닥쳐야 갑자기 믿음을 뜨겁게 달궈서 버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원인이 어디에 있던 인생사에 굴곡이 있게 마련이고 또 수시로 예상치 못하게 고난이 닥치므로 신자라면 간절히 기도하여서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왜 생기는지부터 성경적으로 정확히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현실 삶에 대한 실력, 지혜, 분별력, 성실함 등으로 단단히 무장해서 인생의 모든 고난에 대해서도 자기 맷집을 불려 놓아야 합니다. 사실은 세상 앞에 절대 주눅 들지 않고서 당당히 맞설 수 있고, 특별히 자신을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도록 바꿔나가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또 고난을 이기는 첫째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고난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고난들은 하나님의 종이 그분의 일에 충성하려니까 주변 흑암의 세력이 훼방을 놓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고난이 생길 줄 훤히 알고서 미리부터 대비했습니다. 이왕에 일어난 고난에 대해 고난 중에 부랴부랴 하나님에게 구출해 달라고 간구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 재건에 협조해 주라고 명하는 공문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이미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직접 전달 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근심하는, 즉 협조하기를 아주 싫어한다는 낌새를 그는 눈치챘습니다. (느2:9,10) 그들은 제국의 황제가 보낸 조서에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으나 언짢은 기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술 관원으로서 제국과 식민지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처리하는 왕의 모임에 동석했기에 정치적 식견도 많이 쌓았기에 온갖 훼방이 기다리리라 쉽게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을 떠날 때부터 단단히 각오하고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맞서서 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세상은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흑암 중에 죄악을 사랑하는 세상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으로 오셔서 진리를 실현하는 예수님을 보면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택하여서 어둠에서 빛으로 옮긴 후에 당신의 삶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갈 당신의 제자들도 같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도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에 빛을 미워하는데 그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요3:19,20)

 

그러나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모든 흉계를 깨트렸으므로 당신께 속한 빛의 자녀들은 세상 환난을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세상 권세가 완전히 패배했기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 권세는 절대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보장으로 주님은 당신을 대신할 성령님을 보내어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 유다를 둘러싼 세 지역의 우두머리끼리 작당하여 유다 백성을 현혹해 패배시키려 하자, 느헤미야도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권리도 기억되는 바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20절) 세상에서 그냥 썩어 없어질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너희 셋이 힘을 합쳐서 유다를 대적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우리를 절대 이길 수 없고 유다에게서 현실적 이익도 전혀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환난을 당해도 염려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사백오십여 년 전 느헤미야의 심령에도 울려 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아서 열심히 헌신하면 사탄의 조종을 받는 세상 훼방이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신자가 겪는, 정확히 말해 참신자라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난의 실상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사탄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에 더 큰 고난이 닥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말에 그들은 크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남들보다 훨씬 의롭고 남에게 손해 끼친 적이 없기에 얼마든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천하의 죄인이라고 하니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일대일로 섰을 그때도 과연 그렇게 큰소리치며 당당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도전입니다. 남들에게 의로운 행동과 말을 할 때 정말로 순전한 사랑에서 행한 것인지 조금만 따져본다면 감히 심판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자존심을 채우거나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상대를 은근히 멸시하려는 의도로 행한 선행이 더 많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불신자가 죽기 직전에 이르면 그분의 심판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진리가 거짓을 이긴다.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반드시 불신 세상으로부터 극렬한 반대와 핍박이 따릅니다. 세상 사람들과 정반대로 의롭게 살고만 있어도 교묘하고도 음흉한 시기 질투 모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고난이 아니라 남들도 다 겪는 현실적 고통만 괴로워한다면 신자답게 살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려면 당연히 신자이기에 받아만 하는 고난이어야 됩니다. 간절히 기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이 다 겪는 고난이나, 본인이 잘못한 고난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면 신자만 편애해서 특혜를 주는 셈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처음 초신자 시절에 당신의 권능과 사랑을 확실하게 알게 해주기 위한 그런 목적 말고는 그런 편애를 계속해서 베풀 리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고난이 닥치리라 미리 알고서 대비했어도 굳이 뛰어난 영적 지혜와 분별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으로 봉직할 때부터, 아니 그 전에 말단 관직으로 근무할 때부터 바벨론 사람으로부터 온갖 질시와 음해를 수없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이겨낸 것은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를 아는 자답게 그의 삶이 너무나 신실했기 때문이고 또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여호와 신앙에 투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너무 힘들어 고통스러울 때가 수시로 있었겠지만, 그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기 인생을 온전히 다 맡겼던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힘으로 계속 다시 일어섬으로써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낸 것입니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주일 성수 철저히 지키고 교회에서 헌금 봉사 많이 하고 각종 모임에 성실히 참석하고 최대한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그래서 고난이 닥치면 말씀 읽고 간절히 기도해서 이겨내는 것입니까? 그 모두가 중요하며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독교적인 종교 활동만으로 진짜 신자인지 가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중요한 뜻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 직접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그래서 평생토록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아냈던 모습대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그러했듯이 고난은 신자에게 언제 어디에서나 따르며 성경의 믿음의 선배들 삶도 모두 그랬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에서 오는 고난은 신자에게 일상이므로 고난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에 먼저 가서 신자의 인생을 이끈다면 그 목적지는 분명히 이 땅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살아가는 방식도 신자 스스로 세상에서의 형통 평안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참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모습으로 그분이 이끌어 주십니다. 신자가 정말로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다면, 그분께 거룩하게 통치받고 있는 그 모습이 주변에 빛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반대 편에 선 세상은 그 빛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라.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고백합니다. 그가 당시 최고의 신분 권세 지성 부를 누리는 특권층이었을 때는 예수 믿는 신자를 극렬히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니까 거꾸로 자기가 속했던 계층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오직 그리스도와 그 몸 된 교회 즉 성도들을 섬기느라,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일을 수행하면서 받는 고난인지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받았을 고난을 자기가 대신해서 자기 몸에 똑같이 채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처럼 사니까 주님처럼 고난받는 것이 자신의 일상 삶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우리가 도무지 본받을 수 없다고 해놓고 다시 그의 예를 들었으나 너무 거창하고 비장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이전의 불신자 시절이나 세상 사람들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제가 아는 크리스천 약사는 심하지 않은 감기 환자에겐 약을 지어주지 않고 집에 가서 푹 쉬고 비타민 C가 많은 과일을 먹으라고 돌려보냈습니다. 치과 의사는 꼭 필요하지 않은 조치나 시술은 절대 권하지 않아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 소니 픽사의 에니메이션 작가는 사탄을 그리라고 하니까 사직하고 작은 회사로 옮겼습니다. 자연히 주변의 동료들이나 사장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고 왕따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의 신자가 받는 현실적 핍박입니다. 그 세 사람들은 느헤미야의 세 대적과 전혀 반대의 삶을 살고 있고 또 그로 인한 이런저런 손해를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들에겐 고난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굳이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연히 부자는 될 수 없었으나, 하나님이 주변에 당신의 빛을 비춰내며 신자답게 사는 일에는 하나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었습니다. 

 

고난만, 그것도 막상 닥친 후에야 말씀 보고 간절히 기도해서 이겨내려는 그런 믿음을 이젠 제발 당장 버려야 합니다. 사실상 그것은 믿음도 기도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침마다 물 한 그릇 떠서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라고 읊조리는 주문입니다. 제 의견이 아니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불신자도 그렇게 기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6:31,32) 

 

하나님이 그렇게 믿음을 허비하라고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지 않았습니다. 물론 현실 고난이 고통스럽다면 어서 빨리 끝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답게 살았기에 따라오는 고난이라면 감정적으로 항상 기쁠 수는 없어도 담담히 그냥 당하면 되고 참 신자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이 핍박하면 핍박을 받아주면 됩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삶입니다. 

 

느헤미야가 자기들의 대적이 가하는 핍박과 훼방을 뛰어난 지혜로, 굳건한 믿음으로 넉넉히 이겨낸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해서 받은 신령한 능력이나 의지적으로 키운 담력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가 살아왔던 모습 그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바꿔 말해서 다른 모습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적들과는 절대로 타협 수용할 수 없어서 묵묵히 그에 따르는 모든 희생과 수고를 기꺼이 감내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면 사탄의 거짓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대로 사는 신자는 사탄의 거짓은 절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세상과 사탄의 훼방이 자연히 따르나 신자는 절대 굴복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힘들수록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승리했음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함께하는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게 역사해 주기에 욥과 바울과 느헤미야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너끈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12/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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