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3-15) 여전히 사탄에게 붙잡힌 신자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9)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5) 

 

하나님보다 예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모든 인간의 죗값을 당신께서 대신 다 갚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 대속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는데, 가장 먼저 니고데모에게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만 믿어선 안 되고 십자가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교리적으로는 대속 구원을 그런대로 잘 이해합니다. 학창 시절에 학급 전체가 잘못했는데도 반장 혼자 선생에게 벌을 받음으로써 모두가 용서받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 반장처럼 인간 전부를 대표하여 인간이 받을 벌을 대신 받았다고 수긍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받은 죽음의 형벌이 자신에게 피부로 잘 와닿지 않아서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아들 앞에서 신사임당이 자기 종아리를 회초리로 피가 나도록 때렸던 경우와 비교해 봐야 합니다. 율곡은 정작 매를 맞아야 할 사람은 자기라고 깨닫고서 엄마에게 눈물로 사죄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정작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야 할 자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라고 절감하는 자는 아무래도 십자가 대속 구원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데도 자신이 세상 최고 죄인이라고 진심으로 시인하는 자가 꽤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겸손한 성격인 데다 평소에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는 죄에 대해 민감해지므로 자신이야말로 최고 죄인이라고 시인합니다. 자기 주변에 불행이나 고난이 발생하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자기부터 돌아보는 자도 많습니다. 특별히 노인들은 그 모든 잘못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 죄인의 잘못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자신이 최고의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최고의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죄인이라는 처절한 인식과 자백이 따라야만 합니다. 같은 의미를 종교적 수사로 바꿔서 말장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죄인

 

사도 바울이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이어지는 10절에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단지 죄인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으므로 인간끼리 원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 그분과 실제로 원수 된 것입니다. 원수란 몇 가지 잘못을 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범해선 안 되는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기에 엄청난 고통을 계속해서 겪도록 만든 자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너무 미워서 아예 상종하기도 싫으며 반드시 응분의 복수를 하려고 칼을 갈고 있는 대상입니다. 예컨대 전쟁으로 재산과 가족 모두를 잃고서 자신마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에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원수가 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푸틴이었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우크라이나 시민이었다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참 신자라면 자신이 하나님에게 이전에 그런 존재였다는 점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죽음의 복수를 당해야만 그분의 분노가 풀리는 그런 존재였다고 말입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가 없었다면 하나님과 절대로 화목되지 못하고 그분께 원수 상태로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절감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 전체가 본성적으로 죄악의 덩어리인지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무리 노력해 봐도 영혼의 평강을 얻지 못했다고 절감해야만 십자가에 주님이 아니라 자신을 못 박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도 중요하고 굉장히 심각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만날 수는 없어도 영적으로 그분과 정식으로 화목해 본 경험이 없다면, 더 나아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고 말하면, 아무리 교회에서 존경받는 신자라도 여전히 그분의 원수로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죄인이었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였던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이 체험적으로 실감 나지 않으면, 여전히 하나님과 회목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사탄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잘하고 있는 경건한 신자에게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시로선 모든 인간 중에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가장 열심이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고 정죄했지 않습니까?

 

그들이 귀신 들렸거나, 우상 숭배했거나, 점쟁이 같은 미신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의 전후 문맥을 따지면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이 아래에서 육으로 나서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이며, 또 그래서 사탄에 묶여서 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주님의 대속 구원의 은혜를 자신에게 체험적으로 적용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첫째 역할은 그래서 한 죄인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가르친 그대로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사탄의 역할은 어떻게든 사람들로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죄인이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을 끝까지 방해하는 것만이 사탄의 존재 목적입니다. 사탄은 굳이 기괴한 방식으로 인간을 조종 겁박하지 않습니다. 단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땅에만 속하도록, 즉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서 그것에만 집착하게 만듭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주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해도 사탄의 자식으로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까닭

 

모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 원죄 하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 사건을 겉모습으로만 따지면 부부가 선악과를 따서 함께 사이좋게 나눠 먹었기에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부부끼리 사랑을 실현한 것이라 윤리적으로는 거꾸로 의로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을 때만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그 의미는 정반대가 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분의 종교적 명령을 불복종한 죄를 넘어서, 자기들이 정녕 죽어도 좋다고 단단히 각오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알면서 그분을 인간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분의 실체를 인간이 절대 죽일 수 없지만, 자기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그분의 도움이나 공급을 전혀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간끼리 즐겁고도 신나게, 특별히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한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들을 낳아서 먹고 마실 것을 풍요롭게 공급해 주는 친부모를 완전히 내다 버린 꼴입니다. 불신 세상에서도 그런 자는 천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자라고 정죄합니다. 최초 인간이 그렇게 된 배경에는 사탄이 작용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서 세상을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을 시기해서 따먹지 못하게 속였다고, 사탄이 그들을 꼬드겼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라고 덮어씌운 역사상 최악 최대의 거짓말이었고, 지금도 똑같은 거짓말로 불신 세상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그 꾐에 넘어간 최초 인간 부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환상적인 새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막상 선악과를 먹자마자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둘 다 스스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지고 까닭 모르게 무서워졌습니다. 그런 증상이 무슨 수를 써도 좋아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피해서 더 깊이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 당신과 함께 참 기쁨으로 아름답게 교제할 수 있도록, 그분이 인간에게 심어 주신 참 자아가 그분을 거역 대적함으로써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인간의 속에는 사탄의 지시 조종을 받는 또 다른 거짓된 자아가 생김으로써 마치 정신 분열 환자처럼 인간의 자아는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았던 첫째 참 자아는 거의 소멸되어 희미하게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대로 인간의 진짜 실체로 하나님이 주신 참 자아인 영혼이 완전히 죽어버려서 육신적으로 숨만 쉬고 있을 뿐 실제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자아가 분열됨으로써, 아니 그전에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어서 참된 선은 자기 안에 하나도 생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 벌거벗었으나 서로에게 전혀 부끄러울 것 없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부부 사이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바빴는데, 이브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아담은 아내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모든 잘못을 아내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결과

 

그럼에도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손수 지어 입혀 주어서, 즉 십자가처럼 그 짐승의 피로 그들의 죗값을 대신 갚는 방식으로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분열 파괴된 인간의 영혼은 그대로 후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장남 가인이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는 친동생 아벨을 시기심으로,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정에 사로잡혀서 살해했습니다. 원죄가 사소한 잘못이 아니라 곧바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인이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는 생명을 없앴으니까 자기 부모처럼 하나님 그분을 죽여버린 셈입니다. 가인이 아무 죄 없고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렸던 아벨을 죽였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성으로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순전하게 섬겼던 예수님을 자기들 종교 권력을 침해하는 경쟁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최초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들이 에덴동산의 주인 노릇을 하는 데에 최대의 훼방꾼으로 간주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똑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가인 후의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모든 윤리적인 죄들은 바로 그런 원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자아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인간이 지은 모든 죄가 사실상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기며 세상을 죄로 타락시킨 인간은 하나님의 아름답고도 완전했던 창조를 망가트린 가해자이고,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다 베푸셨음에도 인간에게 가장 크게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피해자입니다.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기꺼이 먼저 베풀어야만 성립됩니다. 설령 가해자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먼저 찾아가서 진심으로 참회 고백 사죄하고 변상할지라도 피해자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진정한 용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아담 이래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하고도 보편적인 화해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이가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인간끼리 피 흘리는 죄를 저지르기에 바빴습니다. (롬3:9-18)

 

그래서 피해자인 하나님이 세상에 없는 당신만의 사랑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기로 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요한 사도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라고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죗값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다 용서해 줄 수는 없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생명으로 그 벌을 대신 감당해 주셨고 그 은혜를 순전히 받아들이는 자만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죽여버림으로써 그분과 단절되어 실질적으로 죽어 있는 모든 인간을 다시 살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죽음이 다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당신을 죽였기에 당신께서 당신과 동일한 당신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그 부채 관계가 정확하게 소멸되도록 해서 하나님이 원상으로 되돌린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선 원수를 갚아야 정당한 공의라고 여기나, 그와 정반대로 원수를 먼저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만의 거룩한 의를 십자가에서 실현시킨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사탄의 자식

 

지금 단계에선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되지 않았기에 영적인 시체로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랐으며, 성전 제사와 율법 이행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여호와를 그만큼 제대로 아는 자도 드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사탄에 미혹된 채 하나님의 반대 편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귀신 들린 것처럼 사탄의 직접적인 종이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며 원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따르려고 했던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신분과 권세를 과시하면서 인간적인 의를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외식적인 종교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데다 율법대로 따르므로 하나님께 이미 구원받은 신분이 바뀔 리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가졌음에도 영혼의 온전한 평강이 없어서, 예수님에게 영적으로 조금 더 성숙해지는 확실한 방법이 없을지 배워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곧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부정적인 표현으로 그의 구원에 대한 안일한 생각부터 완전히 깨트린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그로 하여금 자기는 완벽한 의인은 아닐지라도 남들보다 절대로 악하지는 않다고 스스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으로 아주 신령한 경지에도 오를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창조주 유일신은 믿었으나 구원을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취득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 니고데모는 그때까지 자신의 전부를 완전히 비워서 하나님의 처분에만 맡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천하 죄인 중의 괴수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선 절대로 고개를 쳐들 수 없다는 점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조국을 침략 수탈하는 무도한 로마 사람들은 당연히 악하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지 않고서 사탄의 자식들이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인간적 윤리와 종교에 따라서 정죄하고서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유대인들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과 할례가 없는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롭게 행한다고 자랑하는 자기들 유대인도 마귀의 자식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이 만남 전후로 틀림없이 예수님의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을 접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너희가 정죄했던 이방인과 세리도 그런 정도 사랑은 다 한다고 꾸짖었습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하면 간음이고, 형제를 바보라고 욕을 해도 살인이라는 가르침은 생전 처음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절대 부인할 수 없어서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영적 실태를 곰곰이 따져봤을 것입니다. 그 결과 십계명의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라는 마지막 계명을 온전히 지킨 적이 없다는 점도, 아니 지킬 수도 없었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겉으로 거들먹거리지 않았어도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가장 의로운 축에 든다고 자부했으나, 실은 자신이 자기에게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선 크게 탄식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춰보니 자기라는 존재 전체가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너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안에선 결코 의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분의 원수였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자신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주님의 그 첫째 엄중했던 경고가 비로소 피부에 와닿았을 것입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죄인이 지난 모든 윤리적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해서 그분이 기쁘게 여기고 구원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그런 죄들을 짓게 만드는 더 근본적인 원죄에서 벗어나야만 하는데 성령이 죽어 있던 죄인의 영을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죄에 대한 철저하고도 진정한 회개도 사실은 구원받은 후에 일어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지은 죄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흔적이 남아있어서 평소에 스스로 인식은 못해도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증은 어렴풋이 다 지니고 있습니다. 소시오패스 같은 잔혹한 악인이 아닌 이상 죽기 직전에는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이 어떻게 될지 두려움에 떱니다. 스스로 기도 하거나 주변에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살아 있을 때부터도 위급한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 하나만 보면 부정적인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절대자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힘으로 도저히 통제가 안 되며 예상치 않게 생긴 고난만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 절대자는 인간에게 문제 불행 고난만 안겨주는 잔인한 존재라는 뜻이 되는데, 왜 그런 존재에게 자기를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합니까? 길 가다가 폭력배를 만나 돈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니까 어쩔 수 없이 제발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꼴이지 않습니까?

 

거기까지도 인간이 연약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그렇게 위급한 일에만 절대자를 찾는다는 것은 나머지 삶은 자기 혼자 너끈히 처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 절대자의 인도나 통치를 전혀 받지 않는다는, 더 정확히 말해 그런 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고 또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아무리 위급한 상태에 빠졌어도 평소에는 완전히 무시했던 절대자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과연 그 절대자가 응답해 줄까요? 괘씸해서라도 오히려 더 큰 고난에 빠트리지 않겠습니까?

 

성령이 역사하기 전의 불신자로선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 생활 성실하게 하면서 주변을 잘 섬기기에 믿음 좋다고 칭찬받는 자 중에도 이런 인식을 가진 자가 꽤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목적과 방향이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나 고난만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 받으려 합니다. 응답을 잘 받기 위해서 교회를 열심을 다해서 섬기고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합니다. 자기 형통 출세 안락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만 이용하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므로 이 또한 굳이 문제 삼을 필요는없습니다. 

 

니고데모처럼 가식적이지 않은 믿음으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자 중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니까 문제입니다. 아담이나 가인처럼 하나님을 직접 죽여버린 적이 없기에 그분의 철천지원수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나쁜 행동과 말을 문제 삼기 전에 심령 전부를 완전히 까뒤집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춰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지은 모든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피해를 보셨다는, 즉 그분이 자기에게 분노할 뿐 아니라 너무나 안타깝게 여겼다는 인식이 생겨야 합니다. 자신이 최고 죄인을 넘어서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서 났기에 하나님이 어떻게든 구원해 주려고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주신 그 은혜를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가르치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린 베드로를 사탄아 물러가라고 야단쳤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보다 인간의 의리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 사회 최고의 의리와 윤리도 휴지 조각으로 변한다는 뜻이며,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이 꾸중한 대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복음을 믿고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외에 할례 같은 또 다른 조건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천사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갈1:9) 사탄의 종인 악한 천사가 그런 주장의 배경에서 작동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 예수 믿기 전과 후의 자신을 정말로 솔직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주님이 먼저 그런 자기를 찾아 와서 하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었다는 체험적인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절대자를 찾으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서 여전히 사탄에 묶여 있었던 까닭이라고 인정하십니까? 요컨대 자신이 그냥 최고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최고 죄인이었다고 시인하십니까?

 

예수 믿은 후에도 내가 짓는 모든 잘못은 하나님께 짓는 죄인지라 그분이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그분의 조건 없는 긍휼 없이는 앞으로도 죽기까지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그분의 원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애통해 하십니까? 베드로처럼 하나님마저 자기 뜻대로,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조종하려 한 적이 있다고 고백 회개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들에 자신 있게 또 겸손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신자만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3/16/2025)   

List of Articles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요3:16) 예수님 대신에 구원 교리만 믿는 신자.

(요3:16) 예수님 대신에 구원 교리만 믿는 신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성경을 읽지 않는 신자 제...

  • master
  • 2025-03-23
  • 조회 수 132

(요3:13-15) 여전히 사탄에게 붙잡힌 신자들

(요3:13-15) 여전히 사탄에게 붙잡힌 신자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9)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

  • master
  • 2025-03-16
  • 조회 수 132

(요3:13-15)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감나지 않는 신자 [1]

(요3:13-15)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감나지 않는 신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8)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

  • master
  • 2025-03-09
  • 조회 수 203

(요3:13-15) 모세의 놋뱀에 숨겨진 의미

(요3:13-15) 모세의 놋뱀에 숨겨진 의미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7)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

  • master
  • 2025-03-02
  • 조회 수 190

(요3:13) 예수로 인해 실족하는 신자

(요3:13) 예수로 인해 실족하는 신자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6)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하늘에 계신 예수님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사람의 영이 ...

  • master
  • 2025-02-23
  • 조회 수 191

(요3:9-12) 땅의 일도 믿지 못하는 신자.

(요3:9-12) 땅의 일도 믿지 못하는 신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5)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

  • master
  • 2025-02-16
  • 조회 수 147

(요3:6-8) 예수님도 설명할 수 없는 성령의 거듭남

(요3:6-8) 예수님도 설명할 수 없는 성령의 거듭남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 master
  • 2025-02-09
  • 조회 수 150

(빌1:12-14) 주의 종이 갖추어야 할 첫째 가는 자질 [2]

오늘 (2/3, 월) 이곳 엘에이 소재 미주장신대(장로교 신학대)의 신학생 채플에서 전한 설교입니다. (실제 설교는 대화체라 아래 원고와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 (빌1:12-14)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첫째가는 자질 미주 장신...

  • master
  • 2025-02-03
  • 조회 수 427

(요3:6-7) 육에 머무는가? 영으로 났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5)

(요3:6-7) 육에 머무는가? 영으로 났는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6-7) 육에 머문 니고데모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니고...

  • master
  • 2025-02-02
  • 조회 수 124

(요3:4-5) 예수님과 선(禪)문답을 해본 적이 있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5)

(요3:4-5) 예수님과 선(禪)문답을 해본 적이 있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

  • master
  • 2025-01-26
  • 조회 수 159

(요3:1-3) 천국 열쇠를 사용하고 있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3)

(요3:1-3) 천국 열쇠를 사용하고 있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3)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

  • master
  • 2025-01-19
  • 조회 수 181

(창22:1-3) 매일 반복되는 하나님의 시험 - 새롭게 읽은 구약 성경 (21) [1]

(창22:1-3) 매일 반복되는 하나님의 시험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

  • master
  • 2025-01-12
  • 조회 수 339

(호14:1-3) 진심만으론 많이 부족하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0)

(호14:1-3) 진심만으론 많이 부족하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0)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

  • master
  • 2025-01-05
  • 조회 수 179

(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2]

(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 2024 송구영신 예배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

  • master
  • 2024-12-29
  • 조회 수 341

(행1:6-11) 초림보다는 재림을 기념하는 성탄절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1)

(행1:6-11) 초림보다 재림을 기념하는 성탄절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1) / 2024년 성탄 주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

  • master
  • 2024-12-22
  • 조회 수 296

(행1:6-8) 혼란한 비상 시국에 신자가 취할 행동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0)

(행1:6-8) 혼란한 비상시국에 신자가 취할 행동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20)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

  • master
  • 2024-12-15
  • 조회 수 439

(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

  • master
  • 2024-12-08
  • 조회 수 206

(고전1:4-9) 가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9)

(고전1:4-9) 가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19) - 2024년 추수감사절 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

  • master
  • 2024-11-24
  • 조회 수 245

(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8)

(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

  • master
  • 2024-11-17
  • 조회 수 287

(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7) [1]

(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7)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

  • master
  • 2024-11-10
  • 조회 수 45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