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 같은 신자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많은 신자들이 성화에 대해서 가장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믿기 전에는 평균에도 못 미치는 윤리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나아가 만점에 가까운 윤리 생활을 해야겠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칫 신자가 되어서도 세상 윤리대로 사는 꼴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된 후에는 기독교 윤리대로 사셔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될 테니까 좋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거의 다 정복했지만 러시아만은 강추위 때문에 정복은커녕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알다시피 추위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춥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뛰어난 전략가인 나폴레옹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도 없고 또 대비하지 않았을 리도 없습니다. 러시아를 침공한 1812년은 예년보다 훨씬 더 추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물론 일기 예보가 위성사진을 컴퓨터로 분석하는 지금 같은 수준에는 훨씬 못 미쳤습니다. 오랜 경험에 비추어보아 철새가 일찍 돌아가면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침공을 다른 해로 연기하자고 했는데도 나폴레옹이 독단적으로 밀어 붙였던 것입니다. 그래도 방한 장비는 그런대로 준비했겠지만 일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추웠던 것입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본문대로 교만이 패망을 불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과 겸손을 남을 대하는 태도에 한정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무례하고 건방지면 교만하고, 공손하고 온유하면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너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사람을 웃으며 친절하게 대한다고 겸손해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매너가 좋아지고 예의가 발라진 것뿐입니다.
교만은 자기만 옳다는 고집입니다. 자기만 옳으니 남은 다 그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갈 수 없다”고 생각해 세상 사람과 쉽게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것이 바로 교만 중의 교만입니다. 자기는 깨끗한 백로이지만 남들은 더러운 까마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겸손을 떨어도 속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나폴레옹도 자기만 옳고 심지어 전문가도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는 황제라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도 공손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겉과 속이 다 교만의 극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까지도 사실은 세상 윤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상관없는 불신자라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윤리이며 또 많은 세상 사람들이 마음으로도 겸손해지려 노력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되었으니 태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아니 마음부터 겸손하게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기독교 윤리로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시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 아직도 성경에서 말하는 차원까지 바뀐 것이 아니라는 뜻일 뿐입니다. 즉 여전히 마음을 갈고 닦는 수준, 윤리적 점수만 불신자 시절에 비해 더 올리려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윤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우선 신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신자는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백하고 회개하여합니다. 구원 이후에도 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함을 절감하기에 날마다 우리 죄를 깨끗케 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나아가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이 너무나 연약하며 어리석고 무능하다는 것을 자각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기 욕심과 뜻을 고집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구해야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는 것이 참 겸손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겐 교만과 겸손의 의미가 이전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6,7)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기의 전부 특별히 염려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 신자가 취할 겸손의 본질입니다. 당연히 교만은 그 반대로 자기 염려를 비롯해 전부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나폴레옹은 틀림없이 추위에 대비했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전문가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당시 전문가는 자연의 법칙과 인생 체험을 세밀하게 관찰한 자입니다. 기독교 신앙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계획 자체를 중지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혹시 실패할까 걱정되어 연기만 간언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그 유명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을 뇌까리며 계획을 밀어붙였을 것입니다. 그의 교만의 실체가 황제라서 부하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특별히 자신 같은 위대한 전략가는 하나님의 도움이 일체 없어도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 교만이었습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생각은 유독 신자들이 많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많이 겸손해졌다고 착각합니다. 물론 이전에 비해서, 그것도 세상 윤리적으로는 많이 겸손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전 같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같이 상소리를 하며 멱살 잡기를 했을 텐데 참고 넘어가니 대단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작 신자가 취할 겸손이 아니라 세상에서 도를 닦는 도사들이 해야 할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는 똥이 아니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교만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나아가 끝까지 웃으면서 온유하고 공손한 태도로 피하는 것도 사실은 남에게 자기도 그들과 같은 자로 비취면 창피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고의적 행동이니까 더더욱 큰 교만이자 위선의 죄까지 보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는 똥이라는 것을, 그것도 날이 갈수록 냄새가 더 지독해지는 똥이라는 것을 매순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철두철미하게 자인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냄새를 없애는 것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거룩한 권능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참 신자라면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럽기 때문에 더더욱 가까이 가야 합니다. 남들의 그 더러움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세탁기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해주러 가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윤리를 전하면서 시종일관 똥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저를 필두로 모든 인간의 실체가 그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남들을 대할 때에 교만하고 건방진 마음을 갖고 있다고, 즉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지었다고 그 벌로 패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주의할 것은 교만한 그 죄를 벌주는 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선한 것도 열매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교만해지면 응당 패망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은 1812년에도 당신의 신실한 섭리대로 행하셨던 것뿐인데 나폴레옹은 그 섭리를 완전 무시했으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염려를 주님 앞에 온전히 맡기지 않고, 즉 제대로 겸비해져 기도하지 않으면 패망이 앞장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신자가 되었기에 죄인임을 더욱 실감해야 할 텐데 마치 백로가 된 것처럼 까마귀 노는 골에 가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무 교제가 이뤄지지 않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까마귀들이 노는 골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고 확실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4/1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