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1-3)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말에는 큰 능력이 따른다고 가르치고 신자들도 그대로 믿고 실천한다. 그래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 능동적(이후에는 ‘긍정적’으로 통일)으로 말하면 주변여건과 당면한 고난이 차츰 호전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큰 비전을 품어서 그것이 이뤄진다고 말로 선포하면 반드시 하나씩 실현된다고도 한다.

 

과연 그러할까? 그럼 긍정적 말만 하면 만사형통이고 큰 비전을 선포하면 큰 업적도 쌓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상황을 바꾸고 좋은 결과를 맺게 하는 힘을 말 자체가 갖고 있거나, 최소한 그런 말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힘을 실어준다는 뜻도 된다. 역으로는 신자는 긍정적인 말 외에는 해선 안 된다는 뜻까지 되어버린다.

 

본문은 그런 생각과 실천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고 했다. 어떤 일을 이루려 마음먹고서 그렇게 되리라 아무리 긍정적으로 말해도 하나님이 응답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럼 마음의 경영대로 응답해줄 때도 있지만 응답 안 해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대조시켰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려는 즉, 응답이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음을 강조 내지 주지시키려는 뜻이다.

 

물론 긍정적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최소한 그래서 크게 손해 볼 일은 드물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이해하면 많은 부작용들이 파생된다. 가장 먼저 고난을 이기고 좋은 일을 이루려는 목적만으로 일부러 가장, 과장, 강조, 반복해서 말하는 경우가 생긴다. 일종의 주문(呪文)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최면으로 이어진다.

 

인생은 결코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신(神)들이 일부러 심술궂게 인생을 비틀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죄와 무지와 게으름과 시기에 찌들어 있기에 스스로는 아무리 순전한 소망과 계획과 능력과 실천을 행한다 해도 실은 그렇게 순전하지 않다. 또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로 죄에 찌들었기에 사태는 그와 반대로 전개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고난 하나 해결하면 또 다른 고난이, 때로는 고난 중에 더 큰 고난이 겹치기도 한다. 인간 긍정의 힘과 한계로는 고난의 크기와 빈도에 훨씬 못 미친다.

 

반면에 사태를 정확하게 분석 판단 선택 결정해야만 할 때도 많다. 아니 모든 인생사에 최선을 다해서 그래야만 한다. 어떤 계획을 분석했더니 비관적 전망으로 결론나면 재고하거나 중지해야 한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나서다간 추진력은 있지만 중간 중간에 시행착오가 많이 발생하며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도 많다. 말과 행동은 앞서지만 마무리는 시원찮다는 평까지 들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세기와 빈도는 다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기만의 징크스를 붙들려는 경향이 있다. 쉬운 예로 시합이나 내기에 한 번 크게 이기면 그 때 사용한 방식을 자기 고유수법으로 정해서 다음에도 계속 적용하는 것이다. 거기다 그 수법이 통하지 않아 진 경우는 기억에서 지우려 들고 이겼던 경우만 기억하려 든다.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말을 해서 성공한 경우가 아무리 희소해도 한 번 크게 먹힌 경우가 생기면 자신만의 수법으로 삼으며 또 그렇게 성공한 케이스만 기억한다. 이러니까 즉, 분명히 그렇게 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으니까, 신자들조차 긍정적 말을 하나의 영적 원리인양 간주하고 교회에선 평소에 그런 습관이 들도록 훈련까지 시킨다.

 

영적 원리란 절대로 인간의 자기 체험에서, 모든 이에게 항상 공통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한에는,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변함없이 신실하고도 주도적으로 행하시는 방식이 먼저 드러나고, 성경에도 그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계시해 놓았으며, 신자도 실생활에서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하나의 영적원리가 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야고보 사도는 장사하여 성공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은 악이라고 정죄했다. 인생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이는 본인이 아니라 여호와인데 그분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큰소리친다는 것은 바꿔 말해 바로 “긍정적 말”을 하는 것이자 자기 비전을 말로 선포하며 실행하려는 시도이지 않는가?

 

잠언에선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 있으니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만 했다. 이젠 악이라고까지 단정 짓는다.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 안 된 것은 영적원리가 아니라고 했는데 성경이 악이라고까지 말하면 심하게 말해 사탄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작금 사탄의 원리를 신자들은 하나님의 원리로 착각하고 있고 교회는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꼴이지 않는가?

 

잠언 기자의 기록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해도 그 말의 응답을 안 해 줄 수도 있는 이유를 뭐라고 말하는가?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절) 긍정적으로 말하고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나쁠 것 하나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심령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무조건 고난에서 벗어나고 자기 소원한 것을 이루려는 목적만으로 긍정적 말을 하는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이라는 뜻이다. 말 자체에 일을 이루는 힘이 실려서 정작 인생만사를 당신만의 뜻과 계획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거역 무시하는 셈이다. 그래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3절)고 덧붙였다.

 

주목할 점은 “너의 말의 응답”이나, “너의 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하지 않고 “너의 행사”를 맡기라고 한 것이다. 아예 긍정적 말까지도 하지 말고 범사에 주님의 주권만 인정하고 그분 인도만 온전히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고 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맹세에 관한 것이라 본 주제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긍정적 말이란 바로 자기에게 행하는 맹세에 해당되기에 동일한 차원이다.

 

또 다른 오해는 말아야 한다. 성경이 긍정적인 말이 다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음에 경영하여 그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긍정적 말을 해도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 달렸는데 그 깨끗한 심령을 보고 응답해주신다고 했다. 그렇다면 깨끗한 심령으로 하는 긍정적 말은 응답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라도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있기에 항상 깨끗한 심령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즉, 깨끗하면서 긍정적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어도 만약 하나님 뜻에 맞는 깨끗한 심령에서 긍정적 말을 하면 응답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현재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쳐지고 훈련하는 긍정적 말의 무게중심은 어디에 쏠려 있는가? 당면한 고난에서 벗어나고 자기비전을, 그럴싸하게 비전이라고 종교적 용어(?)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자기 욕심을 이루어내려는 쪽이다. 그것이 하나님 뜻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결국 긍정적 사고와 말이 기독교적 원리로 위장되고 있지만 자기에게 복을 더해보려는 시도로 그치는 변형된 기복주의일 뿐이다.

 

이런 일을 두고 구태여 심리학에 물들었다고 어렵게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다. 단순히 반성경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도 심리학을 구태여 몰라도 긍정적 사고와 말이 인간관계와 출세형통에 도움이 된다고 잘 알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두고 심리학에 물들었다고 아무도 비난하는 자는 없지 않는가? 이는 인간세상에서의 가끔 일어나는 인간체험을 인간적 이성과 상식만으로 판단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처세원리일 뿐이다.

 

누구나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원리를 교회가 나서서 강조하거나 가르칠 필요는 없다.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 뜻과 은혜를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야 참 교회다. 세상은 모르는 참 영적진리를 배우는 곳이 교회다. 현재 강조되는 긍정적 말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누구나 쉽게 얻는 결론인지라 인본주의의 부산물이다. 요컨대 반신본주의, 반성경적, 반하나님의 원리다. 그래서 성경은, 특별히 예수님은 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깨끗한 심령으로 하는 긍정적 말은 무엇인가? 너무나 쉽고도 간단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주님은 신자가 지켜 행해야 할 바는 하나님 사랑과 그와 동일한 열정과 세기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둘이라고 강조했다. 그럼 그런 생각에서 나오는 말만, 그것도 긍정적으로 하면 된다. 신자는 언제 어디 어떤 경우에도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을 품어주며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단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바탕에서 해야 하므로 단순히 불쌍한 자를 도우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예수 십자가 은혜 안으로 그들을 초대하여 주님 사랑을 서로 나누어서 주님의 자녀로 함께 거룩하게 자라가는 목적과 차원에서 긍정적 사랑의 말을 해야 한다.

 

그럼 그 모든 말은 그 긍정적 방식 때문이 아니라 주님 뜻에 합당한 깨끗한 심령으로 했기에 반드시 응답된다. 하나님이 그런 말을 응답 안 해줄 리 없지 않는가? 아니 하나님이 신자더러 그렇게 하라고 구원을 주시고 지금도 사랑으로 보호 인도하고 계시지 않는가?

 

12/17/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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