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정초에는 모든 이가 새해의 계획을 짭니다. 간혹 신자들은 자기가 계획을 세우면 안 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진술입니다.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해석이 요구 된다는 뜻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가 걸음을 인도하지만 계획을 짜는 것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인도하기 전에 사람이 먼저 계획을 짜야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11:8) 나갔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한다는 계획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결단일지라도, 분명 세운 것입니다. 彫?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 떠나야할지 구체적 방도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또 최종 목적지가 지도상 위치로 지정되지 않았다 뿐이지 그의 마음으로는 주님과 온전히 교제 동행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궁극적인 소원(계획)은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망대를 세울 때에 그 비용을 예산해야 하고 또 전쟁을 치려면 대적을 헤아려야 한다고,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칠 때에 든 비유이긴 해도, 했습니다.(눅14:25-35)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낼 때에 전대나 지팡이든 아무 것도 들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두 명씩 짝지어서 인근 동네를 돌며 전도해야 한다는 분명한 계획은 있었습니다. 제자들더러 비둘기처럼 온유하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당부까지 했습니다. 돈 없이 하나님의 채워주심에만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그 목적을 이뤄내는 하나의 방안 즉, 계획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만 해도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남기려면 스스로 자기를 잘 파악한 후에 구체적 계획을 짜서 실천해야만 합니다.
인간 신자의 계획과 하나님의 걸음 인도의 상관관계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아람과 암몬의 연합군과 전쟁을 치를 때에, 아우 아비새와 각기 적군을 나눠 맡는 협동작전을 모색했습니다.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대상19:12)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압이 싸우러 나가니까 아람이 겁을 먹고 도망갔고, 아비새가 맡을 암몬도 그 상황을 보고는 같이 도망쳐버렸습니다. 각기 전투를 벌이되 어느 쪽이든 전세가 불리한 쪽을 도와주기로 했던 원래 전략은 펼쳐볼 여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제 삼의, 당신만의 방안을 마련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싸우지도 않고 승리했다고 하나님은 항상 손 안 되고 코 푸는 방식으로 단번에 해결해준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람 군대는 분명 요압 군대의 위풍당당함에 주눅이 든 것입니다. 평소 이스라엘 군대가 그만큼 훈련과 준비에 철저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이 아람 군인들 모두에게 두려워 떨게 만드는 신경 자극제를 투여한 것이 아닙니다.
또 요압이 손쉽게 승리한 데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앞선 이유가 있었습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3절) 출정하기 직전 동생 아비새 군대와 서로 격려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성읍을 보호하려는 분명한 궁극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와 영토나 재정적 이(利)를 다투거나 복수하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자기들 세운 계획 중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지라도 즉, 요압과 아비새 중에 어느 쪽이 궁지에 몰리든 그래서 둘 중 하나가 전사하든 서로 원망 말자는 다짐이었습니다. 물론 양쪽 다 불리해 같이 전사하더라도 그 조차 주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신들의 전쟁 목적이 여호와의 뜻 안에서 분명히 선하기에 결과야 어떻게 되든 괘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품은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면 그 일정과 방식은 무엇이든 스스로 고안해서 실행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기가 짜는 계획이 그분 뜻에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자꾸 따집니다.
주지해야 할 요체는 “궁극적인 목적지”가 하나님의 뜻과 같기만 하면 “구체적 일정과 방식”은 스스로 고안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 반대로 궁극적인 목적지는 거의 문제 삼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이룰 구체적인 일정과 방식이 하나님의 것과 일치하는지, 또 정말로 이뤄질지 아닐 지만 미리 알고 싶어 합니다.
아브라함에겐 약속의 땅이라는, 요압과 아비새에겐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한다는, 제자도 비유에선 망대를 세우고 전쟁에 승리한다는, 달란트 비유에선 받은 만큼 남긴다는 최종 목적이 간단하고도 확고히 세워졌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목적과 부합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최종 목적만 분명하다면 무슨 계획이든 구체적으로 짜서 실행하면 됩니다.
이젠 또 자기 계획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지 안 낼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의심이 듭니까? 그러나 그 계획이 악하거나 개인적 탐욕만 채우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세워도 됩니다. 현재 환난을 겪거나 큰 문제가 생겼다면 구원하고 해결해달라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신자더러 고통 중에 있게 만드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분이 더 힘들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안락하고도 즐겁게 지내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신자라면 더더욱 풍성한(구체적 의미를 이 글에서 상술할 수 없지만 간단히 말해 참 기쁨과 참 감사로 풍성한) 인생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운 계획이 과연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낼지는 잘 모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알려고 덤비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바로 하나님이 됩니다. 진짜로 신자가 더 신경을 써야 할 측면은 최종 목적이 이미 선한 계획이라면 그것을 이뤄나가는 전 과정에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아야, 드러내는 것까지는 신자가 계획 염려 안 해도 됨,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자기 계획이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하다고 아주 신앙적인 어투로 말하지만 그 속내는 그 계획의 성공여부에만 믿음의 전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걱정해주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신자답게 사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만이 세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당신만 높일 수 있습니다. 신자가 행할 바는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만 않으면 됩니다. 한마디로 평소 정말로 신자답게 살기만 하면 무슨 계획이든, 신자다워지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계획이라면 세워서 실천하면 됩니다.
이를 두고 혹시라도 불신자들이 흔히 말하고 실천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혼동해선 안 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최소한 위배되지 않는, 계획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안녕과 형통만이 궁극적 목적입니다.
또 그 계획을 추진함에도 기도 한 번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존합니다. 그래서 최종 결과가 좋아지면 자기 탓이고, 혹시 조금 잘못 되어 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신령한 힘이 고쳐주길 바라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운이 나빴다고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최종 결과에만 초점이 모아집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그분의 일꾼으로서 적극 동참하겠다는 자세가 전혀 아닙니다. 자기 계획이 바로 그분의 선한 뜻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분이 어디로 이끌던 따르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습니다. 첨부터 끝까지 자기가 다 계획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혹시 결과가 나빠지더라도 그에 굴하지 않겠다는 각오일 뿐입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서 인생사가 자기 뜻대로만 되지 않더라는 아주 약한 겸손일 뿐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자신의 존재, 삶, 일생 전부가 이미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1b,32)라고 그분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전혀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무엇이든 주시므로 무엇이든 계획해 실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신자가 되고나면 자신이 세운 계획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도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족 모두 멀쩡한 차를 갖고 있는데도 올해는 전부 벤즈 600으로 바꾸는 계획을 세워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 자는 사실상 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밀한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있어도 간절히 기도하거나, 일을 수행하는 전후에 평강 자유 기쁨보다 의심 불안 두려움이 앞서면 그분의 뜻과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뜻에 부합한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계획을 세워서 실행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갈 바 몰랐지만 술 취한 것처럼 갈지(之)자 행보를 한 것은 아닙니다. 갈대아 우르나 하란을 떠날 때에 분명히 가나안쪽으로, 매일 아침에 기도해 확실한 음성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방향(계획)을 잡았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자기 세운 계획대로 믿음으로 한 발이라도 옮기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일은 정말로 신자답게 행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실 제 삼의 방식은 전혀 몰라도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미처 알 수 없기에 두려움 없이 한 발을 옮기기 위해서, 또 혹시라도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 발을 옮기느라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발생치 않기 위해서라도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세운 계획이 하나님의 뜻인지 끝내 미심쩍다면 그 실현 가능성에만 모든 관심의 초점이 모여 있던지, 아니면 이미 그분의 선한 뜻과는 거리가 먼 인간적 탐욕이 내포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무의식중에 감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신자는 자기 계획의 최종성공여부에는 관심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 자기가 세운 계획에 스스로도 믿음이 가지 않으면 아예 철회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후자는 그런대로 이해가 되는데 전자가 조금 어렵습니까? 최종적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계획이라면 아예 세울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본문이 말하는 바입니다. 또 이런 부분이 최종 결과만 문제 삼고 관심 가지는 불신자와 다른, 가장 신자다운 표식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자기 계획의 궁극적 목적과 의로운 성취 방식이 그 성취여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참 신자라면 의도적으로 나쁜 계획을 세울 리 만무합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신자에겐 계획의 목적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고 그 수단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또 그래서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신자는 그분 자녀답게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심지어 사망으로 끌려가는 계획일지라도 하나님이 미리 막아주시고 고쳐주시어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정작 새해 아침에 세워야 할 계획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기”(벧후1:5-7)에 더욱 힘쓰기로 하는 것입니다. 또 정말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기”(살전5:16-18)로 결단, 아니 즉시 시행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할 제목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달라.”(빌4:7,8)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를 출애굽 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세운 계획을 기도만 하면 그렇게 이뤄 주리라 기대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도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역사상 딱 한번 있었습니다. 물과 먹을 것이라곤 전혀 없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그것들을 조달할 수 없는 사막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수족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최고 막다른 여건에 처해져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바로 그곳이 그분의 나라이자 그분의 일을 이루시는 터전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손색없는 동역자가 되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이가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쉽게 말해 공짜로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이 만드신 자원을, 당신이 무엇이든 동원해서, 당신이 이루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문제는 우리가 진짜, 진짜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은지 여부일 뿐입니다.
그분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과 내가 처한 환경에서 내가 세운 계획대로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길 간절히 소원하고 시행한다면, 신자가 세운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은 제 삼의 당신만의 방식에 따라 은혜와 권능을 넘치도록 부어주면서 그 계획을 이뤄내십니다.
1/2/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