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3:1-6 당신은 정말로 정직한가?

조회 수 605 추천 수 0 2017.04.28 11:37:57

당신은 정말로 정직한가? (시편 33:1-6)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1-6)

 

현기증이 나지 않는 기린

 

앉았다 급히 일어서면 약간 현기증이 날 때가 있다. 뇌에 혈액 공급이 원활이 안 되어 순간적으로 뇌 혈압이 떨어진 탓이다. 인간은 심장과 뇌 사이의 거리가 짧아서 피가 다시 공급되면 금방 회복된다.

 

지구상에 가장 키가 큰 동물은 기린으로 평균 5-6미터이고 심장에서 뇌까지의 거리도 2-3미터이다. 기린은 나무 꼭대기의 잎과 땅바닥의 풀을 번갈아 따먹는다. 그럼 도무지 어지러워서 정신을 못 차려야 하고 다리까지 가늘어서 매번 쓰러져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기린만이 갖고 있는 뇌혈관의 특수 장치 때문이다.

 

혈관에 한쪽 방향으로만 열리는 밸브가 달려있다. 게이트 단지에서 차가 진행하는 쪽으로만 문이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개를 들 때는 밸브가 열려 뇌에 피가 잘 들어간다. 고개를 숙일 때는 밸브가 닫혀 피를 뇌에 보관하는 역할을 한다. 항상 일정양의 피가 머리에 공급되기에 아무리 자주 고개를 5미터 높이로 들었다 놓았다 해도 전혀 어지럽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가 정말로 기가 막히지 않는가? 이는 결코 우연히 생길 수 없다.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 안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므로 핑계할 수 없다.(롬1:20)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했다.(시14:1)

 

오늘의 시편 1절은 그 반대로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 장엄함, 신비를 조금만 진지하게 묵상해보면 그 배경에 창조주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허리케인 토네이도 지진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에 인간이 너무나 왜소함을 절감한다.

 

믿음이 없는 자라도 그랜드캐넌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면 그 엄청난 장관이 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뭔지는 몰라도 조물주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도 모르게 겸허해지고 경건하다 못해 신령해지는 느낌마저 갖는다. 그럼 그들이 어리석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잠시 자연의 엄청난 규모에 두려움이 생긴 것일 뿐 돌아서면 그만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북한 주민이 김정은의 폭압정치가 무서워 그 앞에서만 순종하는 척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린의 키가 어떻게 그렇게 큰지 생물학계에선 한 때 용불용설(用不用說)을 주장했었다.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으려고 자꾸 고개를 쳐들다보니 자연히 키가 커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활여건에 적응하려고 동일한 행동과 습관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그쪽 방향으로 진보된다는 진화론의 첫째 주장이었다.

 

높은 곳의 잎을 따먹다 키가 커졌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농구를 계속 하다 보면 키가 커진다는 뜻이다.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하지만 서장훈이 농구해서 키가 크진 것이 아니다. 농구하면 키가 커진다면 우리 모두 농구선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키가 유달리 컸기 때문에 농구했다는 것은 대한민국국민이면 다 인정하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화가 옳다고 즉,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성경이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하는 일차적 진리

 

오늘의 본문은 그들을 향한 말이 아니다. 신자더러 너희는 과연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묻는 것이다. 혹시라도 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는가? 네 믿음 생활 중에 변명과 거짓말로 둘러대는 치사하고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지? 정말로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느냐? 그분이 인간만사는 물론 네 일생을 주관함에 단 한 치의 의심도 없느냐? 하나님을 네 존재와 삶과 인생의 100% 완전하고도 유일하며 절대적인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느냐? 위선 가식 의심 불만 불신이 없이 올바른 반응을 하고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실존을 구태여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화가 틀렸고 창조가 옳다고 주장하는 책도 아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가고 나쁜 짓 많이 하면 지옥 간다고 엄포 놓으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다. 심지어 엄격히 말해 예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일차적 진리도 아니다.

 

그보다는 네가 인간인가, 정말로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정직해지라고 요구하는 책이다. 네 자신에게 정직하라, 네 인생에 정직하라, 네 삶에 정직하라, 정말로 그런 면에서 정직하다면 네 이웃에게 정직하게 살고 있는지 잘 따져보라고 촉구하는 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1:1에서 아무런 사전 전제와 부연 설명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라고 대뜸 선언해놓고 시작한다. 그것인 진리임을 확신하는 자만이, 최소한 기린이 높은 곳의 잎을 따먹다보니 키가 커진 것이 아니고 또 뇌에 기린이 기린답게 살 수 있도록 특별한 장치를 심어준 이가 따로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자에게만 하나님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시겠다는 뜻이다. 강요 협박은 물론 설득 권면도 하지 않으신다. 그 판단은 오로지 너희 인간의 몫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분은 오직 한 분뿐이기에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고안 창설한 종교는 여럿이다. 인간이 그 장단점을 비교 분석해서 자기 마음에 합당한 것을 선택해 믿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은 반드시 만나져야 할 대상이다.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에 선택 결단할 사항이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이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모든 종교적 의식과 행동을 성실히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럼 믿음도 온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을 가능성마저 부인하지 못한다. 본문 말씀대로 하자면 정직한 자가 아닐 수 있다.

 

신자라면 마땅히 할 바는?

 

성경의 어떤 인물도 구약시대에는 유대교를, 신약시대에는 기독교를 선택해 믿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면한 자들뿐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만나준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당시로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럴 수는 없다. 말년에 자기보다 더 소중했던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스스로 바쳤을 리는 없지 않는가? 또 하나님 명령대로 순종했더니 주님이 미리 예비해놓은 제물 어린 양으로 인해 아들이 살아나는 은혜를 받았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에 임재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베드로는 독생자 하나님 예수님의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워주신다는 부르심을 받아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바울은 나사렛 이단인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죽여 없애려고 설치다가 다마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성경의 모든 인물들의 인생은 그 전과 정반대로 180도 바뀌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진 것이다. 우리 또한 주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이다. 그렇다고 성경 인물들처럼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종이 되어서 순교의 자리까지 갈 필요까지는 없다.

 

본문 말씀대로 정직한 자라면 마땅히 행해야할 바만 하면 된다. 바로 찬양이다. 찬양을 종교적 의식과 행동으로 여길 필요 없다. 찬양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 무엇인가? 그분이 좋다, 그분이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었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또 그러려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그분을 잘 알려면 실제로 그분을 만났어야 하고 또 그분과 교제 동행하고 있어야 한다. 그분께 축복과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받은 그대로를 더 보태고 뺄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바로 찬양이다. 아무리 뜨겁게 박수치며 찬양을 해도 찬양의 가사가 자신의 체험과 정확이 일치하지 않으면 음악에 따라 감정이 위로 받고 고양된 것뿐이지 찬양이 아니다.

 

찬양할 수 있는 자의 상태는?

 

본문 1절을 다시 보면 찬양할 수 있는 자의 조건과 상태가 정직한 것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 무엇인가? 바로 의인이어야 한다. 의인은 누구를 말하는가? 시편 33편은 바로 앞 32편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32편의 결론 격인 11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의인들더러 여호와를 즐거이 외치라고 한다. 그리고 33편 1절에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는 권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의인을 32:10절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라고 묘사했다. 그럼 여호와를 신뢰하여 그분으로부터 인자하심을 받았거나, 그분으로부터 인자하심을 받았기에 그분을 신뢰한 자가 의인이다. 그 순서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인자를 받은 자다. 그분의 인자는 32:1,2절에 설명이 되어 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용서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이 그분의 인자다.

 

아브라함은 자기만 살려고 마누라를 바로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자다. 모세와 다윗은 살인자였다.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데 앞장선 자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그들에게 베푼 은혜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허물의 사함을 주었고 죄를 가려서 더 이상 정죄를 당치 않게 되었다. 지난 모든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어서 의인으로 삼아주셨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정확히 세 번을 물으셨다. 왜 나를 부인했느냐고 정죄는커녕 이유도 따지지 않았다. 그가 부인한 깊은 내면의 이유도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오히려 그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베드로를 완전히 용서해주었을 뿐 아니라 더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으로 임해 바울을 사흘간 봉사로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곧바로 죽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다시 눈을 뜨게 해서 이방인의 큰 사도로 삼아주셨다. 주님을 일대일로 만난 모든 자들이 가장 먼저 생생한 체험으로 절감한 것은 주님이 자기를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의인이 된다. 도덕적 성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요, 그분의 위대한 일꾼이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체질이 진토 같으며 수시로 죄에 넘어지는지 잘 아신다. 모든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모를 정도로 그 내면의 실체가 허망한 반면에 일생을 두고 자기만 앞세우는 하늘을 찌르는 교만 가운데 살고 있음도 너무나 정확히 아신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지으신 이후의 인간이 당신을 거역해 타락하고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들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신다. 비참한 영적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인간의 모든 역사를 그분이 통치하고 계신 위에 예수 십자가 구원으로 이끄셨다. 기린에게 특수한 뇌혈관 장치가 없으면 활동조차 못함을 그분만이 아셨지 않는가? 기린이, 인간이 그런 원리를 알기는커녕 상상도 못했지 않는가?

 

새 노래로 찬양하라.

 

인간은 자신의 출생과 죽음 즉, 자기 인생의 시작과 끝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한다. 그럼 그 중간의 삶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인생의 모든 여정을 그분만이 아신다. 우리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단 하나 그분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우리 모든 허물과 마음의 간사함과 죄악을 사해주실 수 있는 분도 그분 한분뿐이다.

 

그분을 직접 일대일로 대면해 만난 자가 그분께 들은 말씀은 한 결 같이 동일하다. “내가 택한 나의 백성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끝까지 사랑한다. 앞으로의 네 인생을 전부 내게 맡겨라. 어떤 두려움, 염려, 슬픔, 갈증, 허망함, 죄책감 모두 내 앞에 쏟아 놓으라.” 이 음성을 들은 모든 자들의 정직한 반응은 바로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일 수밖에 없다.

 

오늘 시편 3절은 그래서 의인은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일대일 만나기 전에 단순히 음악의 곡조로 찬양하는 것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종교적 의무감으로 부르는 찬양도 그만 두라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며 다함이 없고 풍성한지 알고 있는 그대로 칭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이, 넓이, 높이, 깊이를 아는 만큼 찬양하라는 것이다. 매일 체험하고 누리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칭찬하는 것이 새 노래인 것이다.

 

오늘은 야외예배로 모였다. 날씨가 쨍쨍하지 않고 좀 춥지만 비가 온 뒤라 아주 청량하고 상쾌하다. 숲의 기운이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고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싹 풀린다.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느낌이고 시간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대자연 속에 나오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신자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 정말로 정직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만나주셨는가? 그래서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음성을 직접 들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분을 만남이 일회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신령한 체험만은 아니다. 간절히 그분에게 마음이 열려서 만나주기를 갈망하는 자에겐 각자에게 가장 합당한 시기와 방식으로 만나 주시고 정말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찾아오셨다는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확신과 기쁨을 심어주신다.

 

이미 그런 대면의 체험이 있는 자라면 지금 어떤 문제와 고난이 내 인생을 짓누르고 있을지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선 안 된다. 오늘 자연 속에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주신 이가 다른 모든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공중 나는 새도 주님이 먹이시고 이름 없는 들풀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귀하기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 자연 속에서 다시 똑똑히 듣고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불신자를 포함해 모든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인간이라면 정말로 인간답게 정직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바다. 또 정직해지려면 한분뿐인 당신을 만나서 당신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당신을 알고 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사랑만이 인생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이며 영원한 소망과 구원과 생명이 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마땅히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 신자의 정직이라는 것이다. 만약 현실의 문제와 고난이 자꾸만 그분께 찬양 드림을 어렵게 만드는 핑계가 된다면 기도와 말씀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다.

 

4/23/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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