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4:1-23 마음의 생각의 반전 10/29/2017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2절)
무명의 저자가 세상에 악인들이 흥하고 약자를 핍박하는 상황을 애통해하며 하나님께 공의로운 징벌을 요구하는 비탄의 시편이다. 여호와를 “복수하시는 하나님”(1절)이라고 칭하며 심판을 요청할(2절)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심판이 단순히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이 아니며 또 심판할 대상을 악인이라고 호칭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히브리어의 일상적인 두괄식(頭括式) 표현으로 “교만한 자들”이라고 먼저 결론짓고서 ‘악인’이라고(3절) 동일시한다. 그 후 그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간다.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이인데 다시 죄악보다 오만함을 먼저 말했다. 오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죄보다 즉, 주의 백성을 짓밟고 과부 나그네 고아들을 살해하는 죄보다 더 중하다는 것이다. 그 오만은 여호와가 하나님이 자기들 행위를 전혀 알지 못하니까 마음껏 행해도 된다고 심지어 하나님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고 장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완악한 마음인가? 오만이 더 중한 죄라는 기자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면, 다른 말로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믿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형통 안락이 최고 목표가 된다. 그럼 사람들 사이의 분쟁으로 윤리적 죄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악행은 교만에서, 교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데서 온다.
그리고 교만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어리석음이라고 한다.(8-10) 그분이 인간의 귀와 눈을 지으셨는데도 악인의 행위를 눈치 채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9절) 눈으로 알 수 있는 행동의 죄, 귀로 들을 수 있는 언어의 죄, 즉 악행(惡行)뿐만 아니라 생각의 허무함도 아신다고 덧붙였다.(11절) 그래서 하나님은 “곧 지식으로”, 말하자면 악인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신 그대로 징벌하신다고 선언한다.(10절)
이어서 극적 반전이 나타난다. 기자가 악인을 복수해달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징벌을 받고 교훈을 받는 이가 더 복이 있다고 한다.(17절) 악인이라면 주의 징벌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다. 악인에게 핍박 받는 의인이라면 주의 교훈으로 그분을 더 깊이 알 수 있다. 나아가 불신자에게 핍박 받음으로 사람들 앞에 악의 추악한 실상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다. 결국에는 악인들을 끊어 공의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 때문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죄의 본질이 자기를 하나님보다 위에 놓는 교만이다. 그 본성이 아직 살아 있는 신자도 항상 그리고 가장 먼저 다스릴 것은 마음의 교만이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내 마음의 생각까지 언제 어디서든 정확히 아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알아야 한다. 신자임에도 남들 앞에선 의로운 척하고 혼자 있을 때 알게 모르게 죄를 지으면 그분 보시기에 가장 역겹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그분이 세우신다.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주님의 공의를 실현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멸시 핍박을 받는다면 바로 그 자체가 믿음의 보상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 또한 이 시편 기자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응과 추종이 있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곧바로 눈치 채는 생각의 반전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