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당신을 보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바울은 세상의 원리와 반대되는 복음을 전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핍박을 로마의 개선 장군 퍼레이드에 끌려가는 적국의 포로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구경거리’에 해당하는 원어의 뜻이 단순히 불구경이나 싸움 같이 흥미진진한 볼거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극장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특정 배경이 마련된 무대 위에서 특정 배우가 특정 스토리에 따라 연기하고 있는 것을 모든 관객들이 시선을 집중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 관객을 바울이 누구라고 합니까? 사람뿐 아니라 천사도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천사들이 가득 찬 극장의 무대 위에 선 배우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영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비가시적 존재이며 사람은 물질계인 이 땅에서 신자가 매일 만나고 부딪히며 사는 존재입니다. 신자가 죽은 이후에만 영적인 영역과 연관을 맺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천사가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경찰서 취조실에는 한쪽 벽면에 특수한 거울이 달려 있습니다. 범인은 자기가 주목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다른 방에서 수사관들이 범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신자는 천사를 볼 수는 없지만 천사는 신자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불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에게도 주목의 대상입니다. 나아가 천사, 즉 영적 존재에는 선한 천사 악한 천사 둘 다 있으므로 사단도 신자를 보고 있습니다. 시선이 가는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보이는 것(being seen)이 아니라 극장에서 연극 보듯이 주목해서 관찰 당하고(being watched)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자신이 연기하는 인생을 영계의 관객들은 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본을 자기들이 수정, 가감, 취소, 대체까지 합니다. 욥기의 서두가 한 마디로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그의 삶을 주목해서 보고 있다가 직접 간섭까지 했다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사단은 욥을 무너뜨리려고 하나님과 그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욥 인생의 대본을 개작할 권리를 두고 사단과 하나님이 일종의 힘겨루기를 한 셈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단과의 내기는 하나님이 아주 쉽게 이겼습니다. 사단은 욥이 시험에 들 만한 모든 수단, 아니 여느 인생도 견딜 수 없는 최강이자 최후의 수단을 두 번이나 동원했습니다. 재산과 자식을 하루아침에 몽땅 앗아갔고 자신도 중병에 걸리게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단의 궤계를 알고 묵인하면서도 그에게 이미 심어준 믿음만 흔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욥은 끝없이 이어지는 질병의 고통도 괴롭지만 그 모든 재앙의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몰라 괴로워했습니다. 세 친구들과 밤을 새워 토론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고 오히려 도덕적 영적으로 권면하는 그들이 더 원망스럽고 하나님마저 불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취조실 밖에서 그를 주목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절대로 하나님의 시선, 아니 관심에서 욥이 벗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엘리후가 등장하여 충고한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34:21)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33:12,13)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37:23,24)
재앙이 연속해서 들이닥쳤을 때에 욥 자신은 몰랐지만 하늘의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이라는 취조실 안에 있어서 관찰하고 있는 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아무 원인도 모른 채 사람이 평생에도 겪지 못할 재앙을 한 순간에 당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재앙을 이겨냈습니다. 아니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믿음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하늘의 측면에서 따지면.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하는 바람에 욥에게 온갖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고쳐진 대본에 따라 연극의 무대배경을 바꾸고 욥을 다시 그 무대 위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욥은 사실 하늘의 어마어마한 영적 전투의 주역으로 참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과 직접 맞대놓고 씨름하지 않고. 신자의 믿음을 통해 승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삶이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자기가 하늘의 영적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바울은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천사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또한 욥이 겪은 만큼의 고난을 이 땅에서 겪었습니다.(고후11:23-27) 그는 그 모든 고난이 하늘에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했고 또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신자에게 욥이나 바울 같은 극심한 고난이 닥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취조실에서 범인의 잘못만 찾아내어 벌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취조실에는 범죄를 참소하는 검사 사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범죄를 자신의 보혈로 중보해주는 변호인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때로는 묵인해도 궁극적으로 절대 그의 편을 들지는 않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가 그 범죄를 심판하고 구원하는 잣대일 뿐입니다.
신자는 이미 영벌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더 이상 자기 죄에 대한 참소를 신경 쓸 필요나 이유가 없습니다. 대신에 구원 이후의 삶에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눈에 안 보이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또 하늘에서 하나님이 풀면 땅에서도 풀립니다. 땅에 원인이 있으면 하늘에 결과가 있고 하늘에 원인이 있으면 땅에 결과가 나타납니다.
본문대로 천사와 사람의 구경거리가 된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사람에게 선하고 좋은 구경거리로 서게 되면 하늘에서도 좋은 결과가 맺힙니다. 반대로 천사에게 선하고 좋은 구경거리가 되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더욱 겸비해져서 십자가 보혈의 공로와 권능만 온전히 믿는 것뿐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신령한 존재로 서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생의 초점을 혈과 육에 관한 싸움에 두지 않고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전투로 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기까지 낮추어 예수님의 긍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것같이 미말에 세워 조롱거리가 되게 하더라도 하늘에서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더 큰 영적 승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 이 싸움, 아니 더 큰 승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바꿔 말해 사람만 당신을 바라봅니까? 천사도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까?
8/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