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영적 고향은 어디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겨놓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중학생보다 수학 문제를 잘 푼다고 자랑하는 대학생은 바보입니다. 반면에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면 자랑해도 흉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겨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분명히 약한 자를 택해 강한 자로 부끄럽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한 쪽이 부끄럽게 되었으면 다른 쪽은 자연히 우쭐하게 됩니다. 또 부끄럽게 된 자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아주 우쭐해져 자랑하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 받는 일에 관한 언급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우월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신분, 지혜, 재물 등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나 자격이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인생관이 얼마나 틀렸는지 하나님이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은사를 그렇게 많이 받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복음의 이런 기본적인 원리도 잘 몰랐다는 뜻 아닙니까?
이상할 것 하나 없습니다. 오늘 날도 비슷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다 그럴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정말 겸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수처럼 미워했는데도 벌을 주시기는커녕 먼저 찾아 오셔서 이런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어찌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지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Amazing Grace 안에만 파묻혀 삽니다.
그러다 차츰 날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좋은 일도 자주 일어나면 그 기쁨이 줄듯이 말입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마치 자기에게 그런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구비된 것처럼 여깁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연히 나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된 것처럼 여기기까지 합니다.
결정적으로 남들과 유별난 영적 은사를 받고나면 더 그렇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영적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교회에 덕을 세우고 본문 말씀 그대로 세상에서 강하고 지혜롭고 많이 가진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인생을 사는 방식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깨닫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은사를 받을 만큼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교회 안에서 서로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그 은사가 자기의 능력인양 과시했습니다. 당연히 은사가 더 강하게 나타나는 자들 주변에 일반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교회 안에 덕이 세워지기는커녕 그 반대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가 그런 초자연적 외적 은사가 신앙의 핵심 내지 전부인양 간주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경향마저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신비주의로 흘렀던 것입니다. 신령한 일을 하는 자는 세상의 일상적 일에 초월할 수 있기에 무슨 일이라도, 율법을 어기는 잘못을 포함해, 해도 된다는 인식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도덕적 불감증이 생겼고 교회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상관하는 말도 안 되는 음행이 벌어져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일은 오래 된 역사책에 기록된 옛날이야기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날에도 똑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원죄 하에 태어나는 인간의 부패된 심성은 시공간을 넘어서 모든 세대에 똑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하므로 스스로 노력하면 세대가 진행됨에 따라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부패한 심령이 만들어내는 것은 잘못일 수밖에 없는데도 심령 자체가 부패했기에 그런 간단한 진리조차 못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그렇게 되고 싶은 소원이 있고 가끔은 그런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어서이며, 더 나아가 사단이 오히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꾸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최초 인간에게도 사단은 죄를 지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훌륭하게 될 수 있다고 부추겼을 뿐인데 불신자들은 지금도 그런 거짓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그 본성은 쉽사리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사방에서 신자를 삼키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방해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신자더러 죄를 지어라고 유혹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기는 은혜와 은사를 받을 만큼 우월하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요컨대 우쭐해져 남들 앞에 자기 자랑을 앞세우게,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당당하게 자기 뜻대로 요구하게 만듭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그 경이로운 은혜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은 오로지 신자로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등지게 하거나 아니면 가능한 더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로 이전으로 되돌아가 세상 사람처럼 문벌과 재산과 신분에 메여 살게 만든다는, 물론 그런 경우도 많지만, 뜻은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더 교묘합니다. 이제는 의로움, 경건함, 심지어 영적인 은사를 동원해서 하나님과 흥정하게 만듭니다. 그 모든 것이 성령을 통해 당신께서 이루시는 당신의 일인 줄도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단순히 상업의 중심지만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큰 대학이 있을 정도로 지성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또 고래로 큰 도시에는 당연히 깨인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부족함 없이 다 갖춘 곳입니다.
그런 곳의 교회에 하나님이 더 풍성한 영적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시적인 인간적 능력으로 인간이 절대 인간다워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배제한 상태로는 인간이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갖추고 큰일을 해도 다 허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적 은사를 사용해 열심히 믿고 또 종교적 업적을 크게 이루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약하고 가진 것 없고 미련하고 비천한 자를 주로 택하여 예수를 믿게 만드십니다. 세상 사람으로 자기들과 다른 신자의 모습과 비교해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선 당연히 신자를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약하고 가진 것 없고 미련하고 비천한 상태에 둔 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신자더러 믿기 전이나 후나 고생만 실컷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심지어 아무리 영적 은사를 많이 받은 신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이 진정한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받은 영적 은사가 많습니까? 그래서 왠지 세상사람 뿐 아니라 같은 교인 사이에도 우쭐해집니까? 혹시라도 십자가 대신 자신부터 자랑하고픈 생각이 듭니까? 사단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중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천국 가는 그날까지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으로 붙들어야 할 것은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신자가 순간순간 그리워해야 할 영적 고향은 골고다 언덕이지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영적 고향은 어디입니까?
7/1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