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곱 귀신이 들지 않으려면?
마태복음 강해 (141)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고양이는 영물(靈物)인가?
오래 전에 나온 미국 영화 “사랑과 영혼”(the Ghost)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억울하게 죽은 남주인공의 영이 사랑하는 애인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하루는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에 강도가 들었다. 자칫 강간당할 위급한 상황인데 애인은 전혀 낌새도 못 채고 있었다. 죽은 영으로선 그녀에게 그 사실을 도무지 알려 줄 길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강도 앞에 고양이가 있어서 그 영이 고양이와 강도 사이에 들어가 고양이에게 자꾸 해코지를 했다. 고양이가 화가 나서 영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실체가 없는 영 대신에 강도의 얼굴을 할퀴게 되었다. 갑작스레 얼굴에 피가 나도록 깊이 할퀸 강도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말하자면 사람은 죽은 영혼과 전혀 교통을 못했지만 고양이는 알아봤다는 뜻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서양인도 한국 사람처럼 고양이를 영물(靈物)로 간주하는가보다 생각했던 적이 잇다.
예수님은 지금 비유이긴 하지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 영물인 고양이에게 들어가 쉬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이야기다. 사탄이나 하나님과 교통(communication)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는 만물 중에 인간뿐이다.
또 죽은 자의 영혼은 반드시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마련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히9:27) 귀신이란 타락한 천사장 즉, 사탄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영계에서 쫓겨날 때에 함께 동조했던 악한 천사들이다. 세상에 미련이 남았던 죽은 자의 영이 구천(九天)으로 가지 않고 이 땅에서 떠도는 것이 귀신이라는 것은 민간의 미신일 뿐이다.
귀신이 쉬려고 찾아간 “물 없는 곳”은 광야 사막을 뜻한다. 당시의 이스라엘에선 광야는 사탄의 본거지로 간주되었다. 비유이긴 해도 귀신이 광야로 갔지만 쉬지 못했다는 것은 이런 뜻이 된다. 한 귀신이 어떤 사람을 실컷 갖고 놀면서 더럽고 추하게 만들고 그 인생을 실패케 한 후에 자기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기고 보스에게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 사탄은 겨우 그것으로 쉴 수 없다고 도리어 크게 야단치면서 네보다 더 강한 동료 귀신 여섯을 더 붙여줄 테니 어떡하든 돌아가 더 열심히 맡은 일을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또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이 깨끗하게 소제되는 바람에 이젠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신나게 데리고 놀면서 그 자의 인생을 완전히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사탄과 그 졸개인 귀신들이 설치는 무대는 오직 인간과 인간이 활동하는 세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들고 세상을 더러운 죄악으로 만연케 하는 것만이 사탄과 귀신들의 존재 목적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다닌다. 사탄의 식욕은 끝이 없다. 포만감을 절대 느끼지 않으며 활동을 쉬는 법이 없다. 신자로선 항상 깨어 경성하여 기도하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귀신 하나가 들어있을 때보다 일곱이 들었으니 얼마나 형편이 심해졌겠는가? 그러나 단순히 이전보다 일곱 배나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일곱은 완전 숫자, 더 이상 찰 필요가 없는 숫자를 뜻한다. 더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말한다. 나아질 가능성은 물론 소망마저 전무(全無)한 것이다.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완전한 멸망이다. 그럼 대체 예수님은 누구를 대상으로 비유한 것이며, 또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궁금해진다.
완전히 멸망당할 자는 누구인가?
많은 신자들이 이 비유의 대상에 대해 한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먼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귀신이 물러나갔다가 도덕적 종교적 죄를 많이 지으면 다시 일곱 귀신이 들어와 멸망한다고 여기는 신자들이 간혹 있다. 신자는 하나님에게 야단 징계는 맞지만 절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거기다 사단과 귀신이 신자를 훼방, 시험, 유혹은 해도 절대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신자 내면에 들어와서 점거하고 마음 놓고 갖고 놀 수는 결코 없다.
또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나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다시 귀신이 들어갔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침묵하고 있기에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 예단해선 안 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영육 간에 어디를 고쳐주던 완전한 치유이며 다시 사탄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다시 망하도록 놓아둘 양이면 처음부터 고쳐주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때로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갈 수 있어도 영원한 멸망과는 영원히 거리가 멀다. 한 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의심나는 거의 모든 질문의 해답은 명료하게 혹은 어렴풋이 반드시 본문(text)과 문맥(context) 안에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본문 내의 해답 혹은 힌트부터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5절)고 말했다. 귀신이 쫓겨나간 그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는 등 하나님 앞에 음란한 죄를 많이 지었지만 히스기야왕, 요시야왕,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절에는 죄를 회개하고 영적 부흥을 이뤘다. 그런 때에 귀신이 잠시 떠나고 깨끗이 소제되었지만 다시 죄악으로 타락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그처럼 앞으로의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일리가 있고 올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얻은 해석은 다시 문맥의 의미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기 시작한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라고 했다. 결론에서도 “이 악한 세대”라고 말했다. 한 문맥이나 이야기 안에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면 그 의미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할 세대가 직접적이고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며 성전 제사를 열심히 수행했고 율법을 성실히 준행했다.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에 능해 경건한 자들로 존경받았다. 거기다 유대 대중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들로 오늘날로 치면 목사 선교사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대체 어떻게 해서 일곱 귀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본문을 해석할 때에 흔히 범하는 우가 하나 있다.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표현에만 주목한다. 그래서 더 나빠진 나중 형편을 죄를 많이 지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 당대에선 가장 의로운 자들로 죄를 많이 짓지 않았다. 귀신이 나갔으니 당연히 깨끗해진 것이다. 예수님 표현대로 하자면 귀신이 스스로 나간 것이지 사람이 내어보낸 것이 아니다. 귀신은 사람의 내면이 깨끗하면 아예 들어오지 못한다. 더럽고 추하고 어두운 심령에 잘 들어가는 법이다. 특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외롭게 혼자 따로 떨어진 채 사는 자들에게 더 잘 들어간다.
본문의 해석의 키는 그 사람의 내면이 텅텅 비워졌다는 사실에 있다. 외롭게 격리된 자에게 귀신의 훼방이 심하다는 것도 결국은 내면이 비워졌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내면이 비워진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채워져 있었다면 일곱 귀신이 아니라 그 보스인 사단이 와도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본문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잘 알고 열심히 믿어도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상대방 코트에 넘어간 공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물었다.(요8:1-11) 간음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로 쳐서 죽이면 되었다. 구태여 물어볼 일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예수님 앞까지 끌고 온 수고를 한 까닭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작정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이라고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반한 위선자라고 몰아붙이고, 그 반대로 용서해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긴 이단이라고 정죄할 판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는 것이었다. 죽이라고도, 살려주라고도 하지 않았다. 예수를 완전히 꼼짝 못할 함정에 빠트렸다고 믿었던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주님은 절묘하게 도리어 그들에게 그 여인의 처분을 맡겼다. 공이 상대방의 코너로 넘어간 셈이다. 인간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수는 결코 없다. 너무나 교만하고 완악한 죄이다 못해 정말로 하늘에서 보시고 웃을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다.
예수님의 뜻은 “율법에 대해선 너희가 전문가이자 집행자가 아니냐? 그러니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라. 실은 나한테까지 데리고 올 필요 없이 율법대로 바로 처리했어야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그렇게 의롭다면 너희야말로 정죄할 자격이 있지 않느냐. 이 중에 너희 말고 이 여인을 정죄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되는가? 누구라도 먼저 돌을 들고 치면 자신은 전혀 무죄한 성자가 된다. 반면에 돌을 들고 치지 않으면 율법을 수호해야할 자들이 오히려 율법을 어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다. 팽팽한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찼고 이제 곧 피가 튀는 비참한 장면이 연출될 상황이 너무나 싱겁게 종료되었다. 기세등등했던 그들이 왜 모두 물러가버렸는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이전에 지었던 크고 작은 죄들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면서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선하지 않다. 아니 사실은 아주 위선적이고 치사하고 음흉하다. 지금 물러간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시장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스스로 회개를 쉽게 할 자들이 아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모함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또 자기들의 기득권 보호라는 내면의 동기는 철저히 감추었다. 아니 하나님을 위한다는 신념과 열정에 가득 차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평소에 미워하며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상대인 예수에게서 네 자신의 죄부터 돌아보라는 한 마디를 들었다고 결코 쉽게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로 분노와 미움만 가중된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싫은 자가 말하면 그 옳은 말 때문에라도 더 미워진다.
잘 되라고 하는 부모의 진정어린 충고조차 반발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솔직히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면 지금보다는 형편이 한층 나아지고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겠는가? 미국 이민 와서 이런 고생도 하지 않고 말이다. 부모가 사랑으로 당부하는 지당한 말씀도 듣기는커녕 반발하는 것이 인간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길 외에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물러간 두 가지 이유
인간의 사고는 가장 최근의 일부터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물러간 개연성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죄송하지만 영화로 치면 R(성인) 등급의 이야기를 하겠다. 간음한 여인은 아무래도 얼굴이 예쁜 편이다. 한국의 한 뚱뚱하고 못난 노처녀 개그맨이 너무 외롭다 못해 집에 도적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우스개를 했다. 못난 여인은 시집도 못 가는데 간음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어쨌든 예쁜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왔으니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거의 벌거벗은 몸이다. 그런 여인이 지금 남정네들이 둘러싼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져 있다. 사람은 참으로 요상한 동물이다. 발레나 피겨처럼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쩍쩍 벌리고 올려도 예술적 감동을 느끼는 반면에 노출 여부와 상관없이 이상야릇한 모습이나 상황에서 정욕이 발동된다. 어려서부터 사탕을 뺏거나, 속이거나, 훔쳐서 먹어야 훨씬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경은 그래서 죄를 화살이 과녁을, 즉 정도와 기준을, 벗어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둘러싼 남정네들이 그 여인을 정죄하여 죽이려 들면서도 내심 그 여인의 몸매를 지긋이 감상하고 음욕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칠 때에 참여했던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예쁜 여인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을 수 있다. 그 여인은 육체로 간음했지만 그들은 마음과 영혼으로 간음한 것이다. 그녀만 돌로 쳐 죽임을 당할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돌을 맞아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따로 있다. 율법에는 간음한 남녀는 둘 다 처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상대 남자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남성을 우대했던 당시에 남자부터 돌로 처형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함에 빠트리려는 음모가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인을 술이나 미약으로 유혹했든지 간에 그 구체적 경과는 몰라도 여자만 잡혀온 것은 분명히 억울한 희생양이었다.
명색이 종교지도자들이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간사하고 치졸한지 모른다. 우선 그 여인의 생명과 인격은 정말 돌멩이보다 못하게 여겼다. 또 그녀를 돌로 쳐 죽이는 책임을 예수께 떠넘기려 했다. 아니면 예수를 일구이언하는 위선자로 매도하려 했다. 어떤 경우가 되던 예수를 죽일 수 있는 나름 타당한 근거를 쌓으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가 여인의 정죄를 책임지라고 하자 아무리 양심에 털이 난 자들이었지만 불현듯 심령에 찔림을 느낀 것이다. 만약 단순히 그녀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든지, 지난 죄들이 생각났다 치면 개인적 문제이므로 남들이 알아챌 리가 없다. 먼저 돌을 던지고 여인을 정죄하면 율법을 가장 잘 준행하는 자로 도리어 존경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음모란 여러 명이 의논하는 법이다. 조금 전에 여자만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면서 예수까지 옭아매는 일석이조의 논의를 함께 했던 자들끼리는 서로의 잘못을 익히 알고 있다.
성경이 얼마나 정미한 기록인지 모른다. 어른부터 물러갔다고 한다. 어른은 나이든 장로,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의미하는데 악하고 추한 모의에 함께 참여했던 자들로선 도무지 먼저 돌을 들고 칠 자신이 안 생긴 것이다. 율법 집행자들이 물러가니 구경꾼으로 따라온 대중들이야 더 머물 일이 없다. 어른이 직분과 상관없이 순전히 나이만 뜻한다 쳐도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고, 아니 늙은이가 더하다는 뜻이 된다. 노아 홍수의 심판 후에 하나님이 탄식했던 상황에서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물론 그들이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었거나, 또 그 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를 꾸몄다는 성경의 언급은 없다. 단순히 행간의 의미를 추적해 본 개연성 있는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어 죽일 구실을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 것만은 확실하다. 또 그래서 그들이 희미하게나마 양심에 찔려 물러 간 것은 오늘의 본문으로 치면 한 귀신이 물러간 것이다. 그들의 심령을 묶고 있던 사단의 사슬에서 일시적으로 풀린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음모가 완전히 무력화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으니 씁쓸한 패배감, 낭패감, 수치감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예수에 대해 얼마나 이를 갈았을지 눈에 빤하다. 광분하여 예수를 더 심하게 대적하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았다. 일곱 귀신이 들어가 나중 형편이 더 심해진 것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 권세, 명예, 재물이 줄 것만 염려해 하나님 그분을 대적했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히 영원한 멸망 외는 없지 않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반면에 그 여자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유대 율법으로 따져 그녀의 운명은 곧바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아예 모든 이의 관심 밖이었다. 본인도 이제 곧 돌팔매가 날아올 텐데 그 고통을 어찌 견뎌낼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어떡하든 머리에 돌 맞는 것은 피해보려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지 모른다. 벌거벗은 여인네들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는데 머리를 감싸고 있으니 더 야릇한 포즈가 되었을 것이다. 그 벌거벗은 몸 위로 남정네들의 끈끈한 시선이 지렁이처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기에 부끄러워서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을 것이다. 소망이라곤 단 한 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미련을 포기했을 것이다. 어서 죽어 이 상황이 한 순간이라도 빨리 끝나기만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 것이다. 새 인생을 덤으로 허락 받았다. 아마 유대 사회에서 간음한 여자가 처형 안 당한 최초의 사건일지 모른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는가? 물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 쪽에서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다. 물론 자의로 그랬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긴 했어도, 그 속마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 영원한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의탁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고 칭송 받았고, 율법을 해석 판단하고 집행하는 권세를 가졌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앞을 떠남으로써 나중에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반면에 인간의 상식, 법률, 관습, 종교, 양심 어느 것으로 따져도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은 예수 앞에서 아무리 부끄럽고 치사한 모습이라도 끝까지 남아 있음으로써 천국의 영광스런 구원을 얻었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진짜로 살고 죽음이 누구에게 달렸는지 깨닫겠는가?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본문의 일곱 귀신의 비유가 뜻하는 것은 우선 지정의로 인식은 못해도 인간의 내면에 영이 자리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영이 오히려 지정의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은 비워있지 않고 반드시 사단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더러운 사단의 영에 조종을 받아서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의 인도에 따라 밝고 빛나는 하늘나라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자다. 하나님에 속했느냐, 사단에 속했느냐 둘 중 하나다. 그 중간 지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속한 자는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지성, 도덕성, 종교성이 뛰어나서 세상에서 의인으로 칭송 받아도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없으면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수 없다. 그 여인처럼 주님 앞에 자신의 전부가 썩고 추했음을 진실로 고백하고 엎드리는 길 말고는 말이다.
일곱 귀신이 들었다고 해서 괴상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도 가장 경건한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심판권을 넘겨주었지만 차마 양심에 찔려 정죄하지 못했다. 그럼 자기들도 이미 죄인임을 시인했다. 가장 경건했던 그들마저 죄인이라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절대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이 간음한 여인 사건의 또 다른 의미다.
그 장소에서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자는 오직 메시아 예수님뿐이었다. 그런데 그분 하나님조차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용서하는 사랑을 베푸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음모에 억울하게 희생되었음을 아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그들의 음모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대중들이나, 현장에서 간음하고 잡혀온 여인이나 모두가 똑 같은 죄인임을 아셨던 것이다. 인간이 너무나 연약, 무지, 무능 한데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사는 진토 같은 존재임을 철두철미 아시기에 너무나도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기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당신께서 택하신 자기 사람을 당신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사실은 외면한 것이 아니다. 그들만 유독 저주하며 야단치셨지만 아무 관심이 없다면 상대도 않았을 것이다. 지도자들이니까 더더욱 안타까워 바로 서라고 꾸중한 것이다. 죽기 직전에도 그들이 자기들이 한 짓을 모른다고 성부께 용서를 구했다. 그들에게 죄 없는 자 먼저 치라고 말한 것도 음모했던 일에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구원으로의 초대였다.
그들은 주님의 그 초대마저 거절했다. 자기들 음모가 들키고 양심에 찔려 물러 가긴했어도, 어쩌면 먼저 물러가는 그 조차 자신의 의이기에 내심 자랑스럽게 여겼을지 모른다. 엄밀히 따져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했어도 자기는 주위의 누구, 누구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오늘 날에도 지성과 도덕성과 종교성이 뛰어나서 하나님까지는 인정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린 적이 없는 의로운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동일한 행태이지 않는가?
예수 믿은 가장 큰 표적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치명적 잘못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보았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야단친 이유는 그들이 표적을 보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마12:38) 만약 진정으로 표적을 보기 원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떡하든 예수님의 메시아 됨에 시비를 걸려고 덤볐기에 악한 것이다.
인간적 수단이 고갈되면 기적을 구할 수밖에 없다. 신자는 표적을 구할 수 있고 또 구해야만 한다. 아니 기도의 의미 자체가 그러하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이지 않는가? 그래서 아무리 적은 모습이라도 기도가 응답되면 그것은 기적이다. 아니 죄에 찌든 추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예수 믿기 전에 너무나 교만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기도라는 것을 해 본적이 전혀 없었다. 불쌍한 이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부모 형제는 물론 내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 심령이 완전히 깨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도하도록 만든 것이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기적인 까닭이다.
그랬던 제가 지금 단상에서 설교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표적인가? 여러분을 만날 것은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저의 자격, 의, 공로, 노력, 능력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끄신 일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이 교회에 나오고, 주위의 성도를 만난 것도 기적이다. 나아가 지금의 아내나 남편이나, 죽도록 말 안 듣는 자식을 만난 것도 다 하나님의 기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라면 정말로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가뜩이나 진정으로 사랑할 시간이 너무 모자라는 인생이니까 말이다.
예수 믿고 난 후에 얻은 가장 큰 표적이 무엇이겠는가? 신자가 되어 가장 수지맞은 것 말이다. 오늘의 본문으로 치면 절대로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나를 갖고 놀 수 없는 신분이 된 것이다. 주 예수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기적을 성경은 또 이렇게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세상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은 당할 수 있으나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단의 훼방과 시험과 유혹은 받을 수 있으나 절대로 그 노예로 묶여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이 비워져 있지 않고 예수의 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환난과 질병으로 고통이 끊이지 않고 인간관계에 상처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으며 죄에 빠져 추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용서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신다.
불신자나 신자나 도무지 해결책이 안 보이는 너무나 갑갑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의 나락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다. 오직 흑암과 멸망과 죽음만이 기다린다. 여태 주인 행세하던 사단마저 또 한명 예수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기뻐 날뛸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술, 마약, 섹스, 모든 수단을 써보다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저 자포자기한 채 살아 간다. 유일한 위로인 술병을 끌어안고 말이다.
신자가 떨어지는 나락에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아니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38년 된 행려병자, 12년간 혈루병을 앓은 여인,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린 된 자, 밤늦게 찾아온 니고데모, 거기다 죽은 지 나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안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는 비춰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절대로 일곱 귀신에 물려가도록 우리의 내면을 비워두지 않는다. 그분께 엎드리기만 하면 당신의 사랑과 긍휼로 채워주신다. 아니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우리더러 이제는 이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롭고도 거룩한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망과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앞에서 부모 권면만 제대로 따랐어도 미국에 이민 와서 이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만약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직도 절망의 나락에 홀로 떨어져서 지난 실패를 한탄하고 세상을 불평하면서 술독에 빠져 지새웠을 것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당신께서 이 교회, 이 자리에 옮겨놓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절대로 이전의 헛된 삶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얼마나 의롭고 경건한지가 아니다.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불신자도 할 수 있다. 신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래야만 하는 당위다. 물론 교회 안에서 그러도록 가르치고 훈련 받고 실천해야 함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란 성도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곳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왜 신자더러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는가? 자신이 부인해지는 만큼 성령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그런다고 당장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담담해지게 된다. 흔들리지 않고 요동치지 않게 된다. 불신자처럼 자포자기에서 오는 담담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기에 그분의 권세에 힘입어 죄와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다. 또 현실에서 비록 우겨쌈을 당해도 주의 영이 함께 하기에 절대로 망하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6/9/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