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을 대적하는 기도가 성경적인가요?

조회 수 5624 추천 수 24 2010.09.23 02:03:30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가 성경적인가요?


[질문]


성경에는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이 나옵니다(약 4:7). 혹은, 악한 날에 싸워야 한다고도 합니다(엡 6:13). 그래서 야고보서와 에베소서, 베드로전서의 이런 구절들을 대적기도의 근거로 서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래의 예 같이 대적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것인가요? ?

예) 사단아 물러가라, 병마는 물러가라. 시험에 들게 하는 마귀 물러가라,  나를 유혹하는 마귀 물러가라, 내 몸 안에 있는 세균은 예수 이름으로 다 죽을찌어다, 산불은 꺼질지어다. 가난과 저주를 갖다 주는 마귀는 떠날찌어다.. 등등

[답변]

질문하신 주제에 대해 한마디로 답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신자가 타협 굴복해선 절대 안 되며 단지 대적해야만 할 대상이고 또 물리치기 위해선 기도해야 한다는 면에선 맞습니다. 반면에 신자가 대적 기도를 하기만 하면 물러간다고 믿거나 이해한다면 틀렸습니다. 말하자면 대적 기도라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를 하는 믿음의 자세가 올바르게 서야함이 더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껏 일반적으로 배우고 이해해 온 대적기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는 오류가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질문자님이 든 예에도 나오듯 신자 자신의 잘못까지 사단에게 탓을 돌리는 경우마저 생깁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례와 말씀에 따라 온전한 대적기도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따져보기로 합시다.  

기도 외에는 귀신이 쫓겨나갈 수 없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간 사이에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던 이유를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탓하시고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막9:29)고 대답했습니다. 역으로 말해 믿음으로 기도하면 귀신이 물러간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사례를 봅시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19:12) 그런 모습을 본 어떤 유대 마술사가 자기도 시험 삼아 귀신 들린 자에게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빙자하여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또 유대 제사장 스게아의 일곱 아들도 똑 같이 행했지만 악귀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15절) 오히려 “뛰어올라 억제하며 이기니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16절)치기 바빴습니다. 대적 기도한다고 귀신이 다 물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믿음에 찬 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나 오늘날의 신자는 분명히 믿음으로 기도했는데도 귀신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음이 적거나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은 올바른데 기도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예수님 당신께선 대적 기도하여 사단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명령하여 쫓아내었다는 사실입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9:25)고 명하자마자 바로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이시이므로 당연히 명령할 권능이 있으며 말씀 한마디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그런 권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쫓아내어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의 근본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아오니 주님이 대신 해주시옵소서.”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신자에겐 사단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사단은 신자가 직접 상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바로 그런 의미로 제자들더러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명령하려 하지 말고 그 대신 기도를 하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사단을 쫓아내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데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귀신을 쫓을 때에 하시던 모습을 흉내 내어 단순히 명령만 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확신 없이 기도했던가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음에 찬 기도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기도 외에는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제자들이 스승 흉내만 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도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단을 호령하는 명령을, 그것도 믿음의 본질과 원리는 미처 모른 채로 했으니 귀신이 쫓겨나갈 리는 만무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권능을 입고선 그들도 기도만으로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씀의 뜻을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또 이전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는 약속의 뜻도 함께 말입니다.

아니 그전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의미부터 온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생생하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죄인을 묶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당신의 보혈로 완전히 깨트렸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신케 되었을 것입니다. 천국 열쇠로 음부의 권세를 이길 것이란 약속은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온전히 믿을 때에만 이뤄짐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단을 대적하며 나가라고 명령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목소리를 엄숙하게 높여서 흉내 내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또 그러자 실제로 귀신이 쫓겨 나가는 권세가 드러났습니다.(행5:16)
  
마술사의 엉터리 대적 기도

반면에 예의 유대 마술사와 유대 제사장 아들은 십자가 복음의 권능에 대한 확신은커녕 아예 알지도 못했습니다. 성경 기록의 정미함을 보십시오. “시험적으로 ...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시험적으로 대적 기도해 보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믿음은 전혀 없이 단순히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했습니다.  

나아가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16절)라고 합니다. 제사장 스게아의 일곱 아들 전부가 그런 기도를 흉내 내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곱 중에 두 아들이 했다는 뜻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유대 마술사가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고 한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서 불 질렀습니다. 그 가운데 섣불리 예수의 이름을 시험하다 큰 코 다칠 뻔 했던 그 마술사도 포함되었지 않겠습니까? 마술사와 제사장 아들 한 사람 그래서 두 사람이 흉내만 내다 악귀에게 크게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스승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었지만 아직 십자가의 권세에 대한 온전한 확신은 없이, 그것도 기도를 하지 않고 명령만 흉내 내었으니 귀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더더욱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인지라 악귀는 제 멋대로 대놓고 조롱하고 혼을 내준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마술사들이 먼저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미신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악귀는 분명히 인간 주제에 자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니까 화가 나서 그들을 혼내주었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일시 패배하는 것 같아도 오히려 사단이 철저히 패배 당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분의 정체성을 알아본 자는 귀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완전히 멸망당할까 두려워했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니이다.”(막1:23,24) 그래서 악귀가 유대 마술사와 제사장 아들에게 예수님도 바울도 알지만 너희들은 모른다고 거꾸로 야단쳤던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을 이겨 물리치려면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기도하는 길 뿐입니다. 그러나 확신은 없이 형식과 의무로 하는 기도로는 귀신이 절대 물러가지 않습니다. 대적 기도했으니까 귀신이 물러갈 것이라고 믿는 것을 믿음의 기도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진짜로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그분의 이름의 권세가 얼마나 귀한지 확신해야만 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실제로 복음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면서 그분의 권능을 넘치도록 체험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사단은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게 마련이라고 자신해야 합니다. 대적 기도 자체가 귀신 쫓아냄의 방법이 아니며, 자신들의 믿음조차 그 일에 힘을 보탤 수 없으며,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이 직접 사단을 혼내며 쫓아내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 대적기도가 하나의 방법인양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기도를 하기만 하면 귀신은 물러간다는 식입니다. 그것은 주문(呪文)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알리바바가 도적패의 일원도 아니면서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만 외어서 동굴 속의 보물을 차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믿음이 없다고 야단치신 숨겨진 뜻도 바로 기도를 주문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문으로 이뤄지는 것은, 사실은 주문 자체도 속임수이지만, 마술입니다. 마술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 쫓는 기도를 할 때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하니까 대적 기도의 깊은 뜻은 모르고 자기들처럼 주문을 외우는 줄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식만 차용하여 주문 외우듯 했으니 능력이 나타날 리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술사가 더 힘센 귀신을 불러오면 먼저 들어있던 귀신이 쫓겨 나간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마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12:24)고 비난했지 않습니까? 유대 제사장의 아들마저 그런 생각을 갖고 주문 외우듯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다 못해 너무나 참람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신자도 대적기도를 단지 귀신 쫓는 방식으로만 생각한다면 동일한 우(遇), 아니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주님의 십자가의 권세를 확신하고 또 그 은혜를 간절히 누리겠다는 소원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대적 기도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형식에 초점이 모인 대적기도는 틀렸지만, 사도들 같은 확신과 담대함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정말로 사도들 같은 온전한 믿음과 성령의 권능을 크게 입고 있다는 확신이 없는 한 괜스레 담대하게 명령하는 기도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주님께 물리쳐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단을 쫓아내려면?

그리고 대적기도에는 신학적으로 정작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 신자가 함부로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사단의 능력은 엄청 크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기도하지 않고는 오히려 신자가 사단의 농간에 넘어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사단과의 대결은 항상 능력보다는 진리 대결로 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믿음 실력이나 기도 열성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만 대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적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온전한 확신을 갖기 위해 기도자가 먼저 말씀에 능하고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가 실제적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기도해야만 할 상황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구체적 말씀에 비추어 영적으로 제대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단이 현재 훼방하고 있는 술수와 그로 인한 결과를 정확히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각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어 붙들고 하나님께 그대로 이뤄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단을 각 시험에 맞는 말씀으로 물리쳤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지간한 믿음의 수준으로는 각 상황에 맞는 약속의 말씀을 찾아서 대적하기가 쉽기 않습니다. 자칫 평소 외우는 성경구절만 암송하듯이 기도하기 쉽습니다. 암송하는 것은 여전히 주문의 수준에 머물 수 있습니다. 꼭 기도할 때마다 성경 말씀을 동원하려 하기보다는 성경을 통해 사단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지금 사단이 어떤 신분과 위치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사단의 종국적 운명이 어떻게 결정지어 있는지도 말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일 뿐입니다. 어떻게 하든 사람과, 특별히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무너트리려 합니다. 불신자는 예수를 못 믿게, 신자는 예수님과의 교제에 나태해지게 만드는 것만이 존재 목적입니다. 신자로 호사 형통하게 만들어 그 안일함에 안주하게 하거나, 그 반대로 극심한 상처와 시련을 주어서 스트레스와 죄책감에 쌓이게 만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지만 자신의 흑심은 교묘히 가린 거짓입니다. 현실적 여건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자신이 잘못이 크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예수님과 사이가 멀어지면 사단의 농간이 아닌지 의심하셔야 합니다.

간단한 예로 귀신들린 자를 조종해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도 신자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주님과의 관계를 어지럽히려는 시도입니다. 대적 기도를 담대하게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신자 스스로 두려운 마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에 힘만 잔뜩 들어가고 주문처럼 반복해서 외치게 되지 않습니까? 또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으니까 더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모두가 사단이 노렸던 바입니다.

사단의 모든 거짓된 모략과 흉계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부셔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 앞에선 사단이 절대 꼼짝도 못한다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대변합니다. 군대 귀신이 제발 돼지 떼에 들어가서라도 세상에 더 남아있기를 예수님께 간절히 빌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신자에게도 동일한 권세가 있습니다. 신자가 능력이 세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단은 신자를 협박, 회유, 훼방, 유혹은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특권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합니다. 신자라도 때로는 사단에게 넘어가 쓰러질 수 있지만(manipulation), 귀신이 들어와서 완전히 점유하지는(possession)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에게 사단이 다시 들어올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그런 십자가의 권능 안에 들어오지 못한 불신자의 경우는 예수님이 경고한 대로 작은 귀신이 쫓겨 가도 얼마든지 큰 귀신이 다시 들어옵니다. 또 실제로 사단 스스로 그런 모습을 보여서 무당이나 주술사가 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입니다.

그러나 골고다 십자가 이후로 사단은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져 완전히 멸망당할 날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사단은 정말로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신자는 사단의 통치관할(Custody)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단은 더더욱 자기 수하의 이왕의 노예들은 더 단단히 묶으려 하고, 이미 예수 믿는 자는 더 심하게 방해하려 합니다.

그럴수록 사단과의 모든 영적 전투에는 신자는 더욱 성경의 십자가 진리를 붙들고서 기도해야 합니다. 일반적 기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마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온전히 들어와서 계속해서 그분의 권능을 입기를 갈망한다는 고백에만 근거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예수님이 사단보다 훨씬 더 능력이 세니까 대적 기도하면 물러가게 해주실 것이라고 쉽게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도 광야 시험에서 결코 사단과 힘겨루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사단에게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세부적으로는 인간을 죄의 노예로 묶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깨기 위해 말씀마다 고유의 의미가 따로 있긴 했어도, 틀림없이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주관하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었음을 사단도 눈치 챘을 것입니다. 당시로선 인간에게 그런 시험을 걸어 안 넘어가는 이는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사단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을 이기는 것은 진리일 뿐입니다. 사단이 불신자의 영을 잠시 묶어서 자기 종으로 삼고 또 자기 부하인 귀신들로 제멋대로 조종하게 할지라도 모든 이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 하에 있습니다. 신자는 귀신들린 자의 영혼을 정말로 불쌍하게 여기는 동시에 사단과 그 졸개들을 철두철미 저주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심정으로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열망과 함께 대적 기도를 하면 사단은 필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감기의 원인도 사단인가?

일부 이단에선 세상의 모든 문제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을, 예컨대 감기마저 사단이 준 것으로 간주하여 대적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질문자님이 드신 예처럼 병마, 내 몸 안에 있는 세균, 산불, 가난과 저주 같은 것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물러가라 명령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비록 예수님 다시 오시기까지 사단에게 공중권세를 맡겨 놓았어도 만사를 제 멋대로 다해도 되게끔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불신자의 영혼에 비취는 것을 막는 일로만 제한시켰습니다. 원죄로 타락한 불신자의 영이 복음을 향해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끔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계속 묶어두는 것이 사단의 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때로는 인간의 길흉사에도 직접 관여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이며 완전한 통치 하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또 불신자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부하게 공급하십니다. 비와 해는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공평하게 비취는 법입니다. 요컨대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 있지 사단이 제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쁜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흉사의 일차적 직접적 원인은 사단의 탓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탓도 아닌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 가운데 있으며,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지음, 피조세계 전부도 하나님의 벌을 받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흉사의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인간의 탓, 그것도 죄와 죄로 인한 결과 때문입니다. 산불은 자연발화거나, 실수든 고의든 인간의 잘못 때문입니다. 감기나 몸 안의 세균도 아름답게 다스려야 할 세상을 인간이 오염 부패시켜서 생긴 것입니다. 가난은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것이 주원인이며, 저주하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조절하지 못한 탓이 가장 큽니다.

어떤 문제든 해결방안은 그 직접적 일차적, 나아가 궁극적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흉사의 원인이 사단이라면 당연히 항상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사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 있기에 쉬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병이 사단의 탓이라면 바울은 왜 장이 약한 디모데더러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고 권면했겠습니까? 또 예수님 당시에 누가 같은 의사가 있을 필요가 없고, 그더러 성경을 저작하도록 할 리는 더욱 없지 않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것도 기존의 물고기와 떡을 사용하고 제자들을 동참시켜서 일으킬 이유도 하나 없지 않습니까? 그냥 단순히 “배고프게 만드는 귀신아 물러가라.” 한마디만 했어도 될 테니 말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고 당신의 종으로 삼아 당신의 일을 하게끔 하는 일은 제외하고 나머지 일상사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을 잘 수행하라고 피조물 중에 가장 고급한 지정의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나쁜 일의 대부분의 원인이 인간의 잘못에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없앨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나쁜 일을 대적기도하며 이겨내는 것은 바로 인간이 책임져야만 할 일을, 특별히 죄를 회개하고 거룩해지는 일조차 사단에게 미뤄버리는 무책임입니다. 비록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역하는 범죄를 했어도 그 잘못의 책임은 아담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만사를 궁극적으로 따지면 하나님과 사단이 주관하는 일 둘 중의 하나라고 해도 인간의 일차적 직접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재차 확실히 해둘 것은 사단에 속한 일조차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아래 있습니다. 만약 동양의 이원론처럼 두 세력이 대등한 세력으로 분할통치 한다면 사단만 물리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인을 전제로 활동하기에 나쁜 일에 무조건 사단과만 대적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이원론을 인정하고 믿는 꼴이 됩니다.

물론 사단이 귀신 들게 해서 인간을 직접 농락하는 경우는 온전한 믿음으로 대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성숙된 영적 분별력으로 사전에 세밀히 검증해야 합니다.  유전적 뇌질환이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과민 등의 증상도 귀신 들린 것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단순 우울증 환자에게 무조건 사단아 물러가라고 대적기도하면 당사자가 크게 상처 받고 예수님에 대한 반발심만 생길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들의 생각.

바울은 흔히 간질로 추정되는 고질병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제거해 주도록 간구하였지만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 사단의 가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약한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온전해지며 또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도록 하려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래서 그 병을 안고 사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했습니다.

그가 구태여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한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증상이 귀신 들린 것과 비슷했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도무지 그런 증상을 갖고선 주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떠나도록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병이 있어야 당신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병마를 없애준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악한 것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고 있으며 또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오히려 선으로 바꿔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복음의 은혜 가운데서 가장 믿음이 견고했던 바울 같은 사도에게도 사단과 대적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이 더 시급하고 소중했다는 뜻입니다. 바울더러 주님의 품성을 닮아가며 더욱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특별히 사도를 보호 인도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사단이 절대 훼방하지 못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가시 같은 병을 지고 가더라도 하나님 당신께서 하실 바는 바울을 통해서 반드시 하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적기도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두 성경구절을 살펴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사단과 대적하기 위해서 성령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무시로 기도해야 하지만 단지 대적하여 명령하기만 하라는 권면은 없습니다. 대신에 진리, 의, 평안, 믿음, 구원, 하나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복음 안에서 온전하고도 확고한 믿음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격용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호신용 장구에 비유했습니다. 공격용 무기란 사단을 직접 마주칠 때에 즉, 직접적인 귀신의 방해가 있을 때에 물리칠 수 있는 방도인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말씀으로 대적할 때에도 내면으로는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런 영적전투의 궁극적 결말로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19절)라고 소망했던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7,8)

먼저 하나님께 순복 한 후에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할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죄를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합니다. 또 그 전에 세상과 하나님을 향하는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는 성결한 믿음을 먼저 갖추라고 합니다.

바울과 야고보 두 사도가 일관되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사단은 아예 겁먹고 피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충실하면서 수시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영적전투의 실체가 사단과의 직접 전투라기보다는 사단이 자꾸 하나님을 가까이 못하게 만드는 방해를 물리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지만 귀신 들린 것 같이 사단의 직접적 방해는 당연히 대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적이 단순히 명령하는 형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단에게는 절대로 타협, 조종, 관용, 수정, 포기 등의 틈을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어 아예 상대도 말고서 담대히 물러가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는데다 거짓말밖에 못하는 사단인지라 십자가 진리로만 상대해야 합니다.        

또 그전에 기도하는 자가 온전한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개인적 중생 체험을 하고 그 후에도 주님의 권능과 은혜를 실제로 받아 누려야 합니다. 삶에서 얻은 확신으로 담대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의 능력으로, 특별히 대적기도라는 방식으로 물러갈 상대가 결코 아닙니다. 앞선 믿음에 형식이 따라야지 형식이 앞서고 믿음을 그에 맞추려 해선 대적기도뿐 아니라 모든 영적 전투에 패배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듣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 신자가 죄를 씻고 거룩해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히 발휘 됩니다 항상 성결을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평소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것이 영적전투의 본질입니다. 두 마음을 갖지 말고 순전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흉사를 사단에게만 탓을 돌리면서 대적기도로 사단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헛된 기대는 문제부터 빨리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현실의 형통만 바라는 잘못된 신앙의 발로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8/2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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