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5)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15:14-19)

 

여타 종교와 전혀 다른 기독교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 출석하여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우면서 깨달은 아주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교회 밖에서 보며 짐작했던 것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도 여타 종교처럼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과 훈련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도덕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데다 저는 남들보다 착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절대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사후 심판은 염려하지 않았고 현실고난도 자기 실력과 의지로 스스로 극복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기독교는 세계 사대종교 중의 하나요 예수는 그 인간 창시자라는 아주 단순한 지식만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성경 말씀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데다 간증 책을 쓰고도 남을 만큼 다양한 영적 체험을 하고나선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저 같은 완악한 죄인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으로 내 인생을 통째로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믿음은 도덕과 종교로 접근할 차원이 전혀 아니라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영원한 참 생명이었습니다.

 

나아가 제가 예수를 믿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에 예수를 믿게 된 경위가 제 스스로의 각성 판단 결정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저의 심령에 대고 계속 말씀하셨고 때가 차매 교회로 인도했고 당신의 십자가 긍휼 앞에 눈물로 엎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가만 놓아두었으면 저는 절대로 제 발로 교회로 찾아갈 리 없었을 것입니다. 제 교만이, 정확하게는 어리석음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언제부터 출석할지는 물론 제가 판단 결정한 것이지만 그런 판단과 결정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이 선도적 능동적으로 주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사회가 엄격히 금지하는 세리와 죄인들과의 교제를 당신께서 서슴없이 행하는 이유를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세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비유의 주제와 내용은 당연히 같습니다. 양과 드라크마는 절대로 스스로 목자와 여인을 찾아갈 수 없었고 목자와 여인이 모든 수고와 희생을 무릅쓰고 되찾아왔습니다.

 

그럼 탕자의 경우도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그가 주도적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합니다. 그럼 제가 잘못 설명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처럼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은 자기가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도록 삶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세밀히 이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눈치도 못 채는 아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 챙겨서 먼 외국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이 아니라 엄연히 건강하게 살아 계신데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두 말하지 않고 그의 요구대로 따라주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 요구를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해버렸다면 무일푼으로 다른 나라로 혼자서 떠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미리 나눠주었기에 그 다음의 모든 일들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아들의 비상식적이고 무례한 요구를 아버지가 순순히 들어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평소부터 아들의 철학, 가치관, 인생 목표, 삶의 방식 등을 꿰뚫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순히 당신의 뜻을 따르며 함께 살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아무리 타일러도 그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때가 되면 그의 몫이 될 재산입니다. 아버지로선 평생 동안 아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누르고 아비 밑에서 억지로 따르게 하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맘껏 살게 해주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미 그런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는데 계속 붙들어두는 것은 아들로 하여금 어서 빨리 아버지가 안 죽나 손꼽아 기다리게 만드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아버지로선 아들의 성격, 자질, 장단점은 물론 떠날 당시의 상태를 잘 알기에 결국은 돈을 다 낭비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아들이 삶에서 처절한 실패를 겪어보지 않으면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깨닫지도 못할 것이라는 점까지 다 계산한 것입니다. 아들에겐 그 실패가 당장에는 큰 고통이 되겠지만 그 이후의 인생에는 큰 유익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이 아담이 거역할 줄을 아시고도 선악과 금령을 제정하면서 동시에 자유의지를 주신 뜻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항상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20절) 또 당신을 그렇게 실망시키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야단은커녕 그간의 사정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께로 겸손히 돌아왔다는 사실만 크게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벌려주었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상 아버지가 주관했던 것입니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당연히 삼위 하나님을, 특별히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둘째 아들은 일차로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이 먼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동료와 죄인들을 초대해 함께 잔치를 했고 그 이후로 주님과 계속 교제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먼저 불러내지 않았다면 유대 사회의 모든 여건상 그들이 먼발치서 말씀을 들어도 맨 앞으로 나올 생각은 결코 못했을 것입니다.

 

아들은 완전한 실패를 겪기 전까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처절하게 망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도 여전히 아버지의 심령이 어떨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받아만 주어도 좋겠다고 말했습니다.(19절) 아버지가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로 여기며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끝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철없는 아들은 아버지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깊은 심사는 짐작조차 못하고 모든 일을 스스로 분별 판단 선택 결정 시행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방향이 아버지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들의 유익을 위해 세운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가뜩이나 아버지와 엮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보려 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흉년 후에 비로소 궁핍해진 아들

 

주님의 모든 가르침이 그러하듯이 이 비유도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서 당신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서 드러나게 만듭니다. 인간 랍비의 이성적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를 도덕적 차원에서 보면 불효한 아들만 보이고 그가 자기 잘못을 회개했다는 정도에서 더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 복음이 들립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교하게 의도된 영적진리가 곳곳에 보석 같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 증거가 14절인데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재산을)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재산을 다 없애면 이미 궁핍해진 것인데 크게 흉년이 들자 비로소 궁핍해졌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적게 망했고 나중에 완전히 쫄딱 망한 것입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런 뜻이지만 앞뒤 문맥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개연성 있게 추론해 보면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수중에 재산을 탕진했을 직후만 해도 그 동안 자기에게 신세 진 사람이나 함께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일상적인 생활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큰 흉년이 들자 숙식을 제공해주던 자들도 도무지 그럴 형편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들 코가 석자인데 남을 도울 여유는 없습니다.

 

이 아들은 생전 처음으로 하루 세끼를 연명하는 일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그런 처지에 빠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나라 백성 한 사람에게 빌붙어서 돼지치기로 연명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자 돼지가 먹는 양식조차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돼지 주인은 품꾼으로 채용한 이 사람이 굶어죽던 말든 상관 않고 자기 재산인 돼지는 죽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청중들을 대상으로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므로 이 아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유대인이 다른 나라로 이주해서 그 나라 백성처럼 살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반길 사람이라곤 하나 없습니다. 그럼 탕자는 바로 유대인이지만 로마 사람 취급을 받은 세리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처지가 지금 이 탕자와 다름없다고 말한 셈입니다.

 

로마는 세리를 단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채용한 것일 뿐 절대로 자기들 동족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소용이 없어지거나 상황이 바뀌면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로 대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또 다른 뜻은 세리들에게 그들의 직업과 신분에 대해 정확한 실상을 깨우쳐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돼지농장주인도 이 탕자가 외국인이 아니라 동족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유대인인 그가 돼지 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자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들은 바다에 빠져 몰살했습니다.(막5:1-20) 그 지방이 데가볼리였는데 열 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헬라제국이 갈릴리 호수 인근에 헬라 방식으로 지은 이방인 도시들을 말합니다.

 

모세율법이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고 있어서 유대인들은 아예 먹지 않았고 돼지 치는 일도 비천하게 여겼기에 이방인들 그 중에서도 비천한 자들의 몫이었습니다. 탕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서 도저히 행해선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돼지를 먹는 것도 부정한데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먹겠다고 나섰습니다.

 

비빌 언덕도 없다.

 

그가 처음에 재산을 흥청망청 쓸 때는 주변 사람들이 외국인임에도 상전처럼 받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자기들 동료 중의 하나로는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자 안면을 싹 바꿔버렸습니다. 그가 얼마나 비천한 자리에까지 떨어졌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인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겐 모든 인생사를 판단 결정 시행하는 기준이 돈이며 그들의 인생의 목표 자체가 돈입니다. 돈으로 살고 돈으로 죽습니다. 이 둘째 아들의 인생관 또한 같았기에 돈을 잔뜩 싸들고 그런 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자기 무덤을 자기가 스스로 판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1:28-30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어서 죄의 파괴적인 결과를 스스로 당하게 한다고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탕자는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떨어지기까지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들끓던 사람들이 다 외면하고 자기를 돼지치기로 고용한 사람도 아예 무시했습니다. 돼지 사료라도 구걸했다는 것은 스스로 돼지가 되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가 아버지에게 면목이 없어서 감히 돌아갈 엄두도 못 내었겠지만 그보다는 타국에서 스스로 번듯하게 성공하겠다고 큰소리쳤던 그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에게 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다시 자기 힘으로 뭔가 해보려 시도했지 아버지 집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비유가 함의하는 바가 너무나 예리하지 않습니까? 돈을 주인으로 삼는 불신자는 그 인생이 실은 돼지 사료를 먹는 것과 같은데도 하나님 뜻대로 거룩하게 사는 것은 싫어 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아들의 사방은 완전히 막혔고 빠져나갈 틈새 하나 없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가다간 굶어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다 떠나고 자기 혼자 발가벗긴 채 광야에 버려진 셈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로소 궁핍해졌다는 말씀은 현실적 경제적 환난보다 그 인생 전체가 완전히 파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아버지 집을 떠올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도 스스로 회개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굶을 정도로 큰 흉년이 그가 망한 후에 닥쳤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자연재앙의 일정까지 이 탕자를 위해서 주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더라도 아버지 집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되돌려 보내는 것이 그 본인에게 훨씬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큰 흉년이 그에게 사실상 좋은 소식 즉, 복음이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됩니다. 우리는 당장에는 모르지만 코로나 사태에도 곳곳에 이러저런 모양으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풍성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대준 사업 자금을 완전히 탕진하고 나중에는 아이들이 소풍 가는데 김밥도 못 싸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정말로 일용할 양식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을 찾으면 있었겠지만 손을 벌릴 만큼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런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 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경제적으로도 서서히 길이 트였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일이 슬슬 잘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려는 은혜였습니다.

 

저 또한 이 탕자처럼 헛된 자신감으로 가득 찬 너무나 완악한 죄인인지라 그런 방법이 아니고는 항복하지 않으니까 쫄딱 망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도 내 자의로 행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배후에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끔 세밀하고도 완벽하게 간섭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전혀 모르고 아니 대적하고 있을 때부터 저를 당신께서 택해서 보호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로선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 흘리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감사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이 믿음

 

지금껏 비유의 내용을 살펴봤지만 도덕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세리는 도덕적으로 따지면 유대사회에서 최고로 악한 민족의 배반자이므로 청산 대상입니다. 죄인인 이방인은 종교적으로 따져서 우상을 숭배한 하나님께 최고로 패역한 신성모독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과 교제하지 않은 까닭도 여호와를 따르는 신앙을 도덕과 종교의 차원으로만 해석해서 적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들의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을 따르는 믿음을 도덕과 종교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도덕과 종교와 담을 쌓은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그런 모습을 띄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도덕에 초점을 맞추면 선행을 해야만 안심이 되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만 같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짐승과 다른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할 기본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자신이 결코 성장하지 못하며 거꾸로 죄악의 폐해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종교에 초점을 맞추면 교회 활동의 성실성과 자신이 말씀보고 기도한 것의 양에 따라서 하나님이 복을 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게 됩니다. 종교 활동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벌 받지 않나 두려워집니다. 하나님과의 자발적이고도 친밀한 교제와 동행은 뒷전이고 어떤 보상을 바라고 행하는 의무로 부담만 됩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데도 평강과 기쁨과 자유라곤 없습니다.

 

유대인들로선 세리와 죄인을 도덕과 종교적 차원으로만 접근하니까 차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도덕과 종교로는 분명히 죄인이었으니까 그들로선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었지 한 번도 잘못하고 있다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도덕과 종교로는 유대사회에선 구원의 길이 전혀 없고 아무도 밥도 한 끼 나눠먹지 않으려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기들과 교제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도덕과 종교를 무시한 것은 전혀 아니며 그렇게 따지면 모든 이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산상수훈에서 예컨대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율법을 더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또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선 율법으로 처형시켜야 된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에게 죄 없는 자 먼저 치라고 하자 다들 물러갔습니다. 유대인들도 스스로 자기들 모두가 죄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아들의 진짜 잘못은 아버지에게 불효한 것보다는 돈과 아버지 둘 중에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돈을 택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지우고 돈을 주인으로 삼으니 불효라는 도덕적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없애자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러했듯이 아들이 택한 돈이 그의 인생을 전혀 기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최악의 절망으로 빠트렸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자 비로소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도덕과 종교의 방식을 취하지 말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들로서 나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마침 지난주에 한국에 있는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을 청했습니다. 교회 다닌 지 오래되었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도 인정이 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는지도 알겠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기가 마치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처럼 느껴져서 너무 괴롭다고 실토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과 일대일 인격적 관계를 맺어서 그분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답변해주었습니다. 본인이 실토한 대로 신앙을 유대인들처럼 도덕과 종교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예수님이 찾아와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전에 지었던 도덕적 죄들을 반성하고 또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데에 열심을 쏟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에 비추어볼 때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속에 거룩한 것은 하나 없이 나오는 것이라곤 전부 죄뿐이라는 너무나 추한 자신의 영적 실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동안 자기만 높이려 했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등을 완전히 예수님 중심으로 뒤집어서 자신의 인격체 전부를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에 완전히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추악한 영적 실체를 절대로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그 부패한 마음을 속일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심령을 찔러 쪼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서 주님의 긍휼만 구하며 겸손히 엎드리는 것만이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

 

사람은 오직 두 종류로만 나뉩니다. 하나님을 알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둘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당연히 큰 고난을 포함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선한 선물임을 알고 감사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둘입니다. 자기 인생과 삶은 물론이고 존재 자체도 그분의 것으로 그분의 은혜와 권능 아래 붙잡혀 있음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기에 그분께 전적으로 모든 것을 의지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쉽게 말해 돈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실제 주인으로 모시는지의 문제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면 스스로 노력하여 어떻게든 형통과 출세하려는 목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땅의 형통과 출세가 목표인 사람은 필연적으로 돈을 주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간혹 신자 중에도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을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자가 있는데 불신자보다 더 치사하고 패역한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신자는 돈이 결코 참된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자입니다. 자기 인생을 오직 하나님 안에 위치시킬 때만 온전한 기쁨과 평강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깨닫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자입니다.

 

이방인이 돼지는 살려도 이 탕자는 죽어도 전혀 상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섬기는 불신 세상에선 돼지 즉, 돈을 지키기 위해선 인간을 죽이는 곳입니다. 아들로선 신나게 살아보려고 소망을 품었고 또 그럴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그 나라가 겉으로는 화려하고 풍요롭기 짝이 없었으나 사실은 참 생명은 없고 죽음이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 탕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죽었다가 되살아났습니다. 거기까지 이른 것도 아버지 하나님의 간섭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유산을 나눠줄 때부터 당신께서 살려주실 계획을 다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살다가 정말로 죽었으나 하나님이 살려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살게 된 인생에서 주님과 함께 실제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컨대 작금의 코로나 사태도 하나님의 선하심 아래 있으므로 신자는 염려하거나 우울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십자가 앞에서 온전히 죽고 살아났다면 하루하루가 비록 현실적으로는 궁핍해도 정말로 감사할 것들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땅의 삶을 순교로 마감해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중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정말로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육체적 생명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참 생명인 영혼이 죽고 사느냐는 오직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장 시급하게 인생의 방향 전환을 그분께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그저 육체적 생명만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가끔 만약 예수님을 모르고 평생을 지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드는데 너무나 끔찍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의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완전한 은혜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온갖 실수 잘못 심지어 죄를 지어도 결국은 주님께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아주십니다. 그분과 원수일 때도 넘치는 사랑으로 그렇게 해주셨는데 신자가 된 후는 더더욱 그러실 것 아닙니까?

 

(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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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master 2022-08-10 20
155 (창3:8-13) 수동적 하나님 능동적 사탄 master 2022-07-26 35
154 세상이 메트릭스처럼 설계된 것은 아닐까요? master 2022-03-11 28
153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서 왜 원수를 갚아주는가? master 2022-01-19 72
152 (행 18:12-23)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 master 2021-10-04 24
151 하나님은 약한 자를 더 사랑하는가? master 2021-09-04 132
150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master 2021-09-04 26
149 하나님은 왜 선천적 장애아를 태어나게 하셨는가? master 2021-06-28 50
148 하나님의 절대적 또는 조건적 언약? master 2021-06-28 134
147 동방교회 필리오케 논쟁에 관해? master 2021-03-02 27
»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39
145 단풍으로 코로나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master 2020-12-1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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