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8:12-23)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18:21)
고린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18:10) 대적들의 어떤 핍박에서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했다고 한다. 여전히 바울의 편에 서있는 자가 훨씬 적다. 그럼에도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신 하나님은 허풍쟁이인가? 단순히 바울에게 담대함을 잃지 말라는 격려 차원의 립 서비스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자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충분히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한 신자 단 한 명만으로도 당신의 뜻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그럼 두 명까지도 필요 없으므로 그 한 명이라도 충족한 즉, 많은 수자가 된다. 그리고 그 한명의 도움으로도 바울이 필요한 것들을 다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므로 많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붙여준 당신의 백성은 먼저 갈리오 총독이다. 로마 총독은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대적이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의 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로 유대인들의 방해를 막아주게 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변론하기도 전에 아예 고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 기각시켜버렸다. 총독은 일상적으로는 식민지의 유력자와 백성들의 의견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식민지의 종교문제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이 로마의 정책이었고 갈리오는 그 법을 강직하게 지켰다. 그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은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고 나는 관여치 않겠다”(15절)고 선언함으로써 바울의 혐의는 벗겨졌다. 그런데 그 말이 화근이 되어 유대인들이 바울더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한 회당장 소스데네를 법정 앞에서 때렸고 총독은 방관했다. 그럼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불완전한 것 아닌가? 아니다.
소스데네는 애꿎게도 분풀이 대상이 된 것뿐이다. 유대인들은 정작 바울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이미 총독이 무죄로 선언했으니 어쩔 수 없다. 대신에 바울에게 복음 전파의 기회를 준 그를 핍박했다. 유대인들은 소스데네가 친기독교적이라 아주 못마땅했었는데 회당장이 라는 직분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다가 막상 총독의 그 말을 듣고는 꿩 아니면 닭이라는 식으로 실컷 두들겨 팬 것이다. 죄에 찌든 인간들이 얼마나 추하고 비겁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로마의 정책이 그런 줄 유대인들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전 총독 때에는 잠잠히 있었다. 새로 부임하는 총독은 아무래도 식민지 백성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쓸 것이라 짐작하고 고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 갈리오는 원칙대로 행한 반면에 여호와를 따르는 유대인들이 도리어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했다. 그들이 소스데네를 핍박하려면 진작했어야 했고고 그 전에 바울에게 설교기회를 주지 말도록 막았어야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본인은 의식 못했어도 그 회당장 직분을 통해서 바울을 지켜주도록 예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정작 본받을 것은 바울의 믿음이다. 에베소에서 여러 사람이 더 있기를 청하나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끝내 이별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지키려는 것이 일차 목적이지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에베소 사람의 복음에 대한 갈증은 자기가 없어도 브리스길라 부부가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그 길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주님은 자신의 안위나 형통과 상관없이 반드시 복음이 흥왕해지는 모습으로 역사하신다고 확신했기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도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했는데 바로 자신과 같은 믿음으로 어떤 핍박이 있더라도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라는 것이다. 그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중의 많은 당신의 백성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주변에 이처럼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그분의 백성들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전에 갈리오 총독 같이 불신자 중에도 하나님의 오묘하고 광대하신 권능은 역사하기에 모든 사람을 주님에게 하듯이 진정한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10/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