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0-33)

 

초점을 놓치고 있는 백성들

 

예수님은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고 열렬히 쫓아온 유대인들에게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할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생명의 떡은 인자인 당신께서 주니까 당신만 믿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다시 당신을 믿을 만한 표적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거기다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하면서 모세보다 더 큰 기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이 강조하려는 초점을 백성들이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현실적 탐욕이 지나치거나 지적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의 지능은 아주 뛰어나며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를 받아 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영적으로 따져 지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민족입니다. 

 

그들은 아직 신약성경이 저작되기 전이라 구약성경과 그에 기초한 유대교 교리에 따라 예수님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한 까닭도 구약성경 말씀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신18:15,18)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대비하라고 세례를 주자 산헤드린공회에서 파견된 조사단이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요1:21)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즉 메시아인지 밝히라는 뜻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아니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이때에 이미 조사단에게 증언했습니다. 지금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 쫓아온 사람들도 어쩌면 요한의 그 증언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먹고 마실 것이 없는 광야에서 죽을 지경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생존케 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저녁 끼니가 없어서 허기가 진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 되는 백성들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배 물리 먹게 해주었습니다. 한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보고 축사를 한 후에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 온 떡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물론 그 후로도 유대의 어떤 선지자도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비록 한 끼이지만 수많은 군중을 먹여 살렸다면 언제든 그런 기적을 손쉽게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얼마 후에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에게 칠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보여주었습니다.(마15:29-39) 예수님은 모세가 행한 만나는 물론 수많은 치유 이적들까지 보여주었기에 구약성경 예언대로 그 선지자가 되는 자격은 차고 넘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바로 그 선지자인 줄 알아채고 왕으로 삼으려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대화의 흐름에 비추어서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현장에 있었더라면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게 반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완전히 부인하는 예수님

 

예수님은 영생의 떡은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니까 당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백성들로선 정말로 예수님이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신분인지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영생의 떡을 주는 일은 하나님만이 가능하기에 그들이 정확하게 의식했던 안했던 사실상 주님더러 당신이 하나님임을 증명해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덧붙여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는데  해야 할 일이 더 있는지 물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믿어야 한다니까 당신이 하는 일로서 당신을 믿어야 할 이유를 증명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과 같은 뜻을 반복한 것입니다. 백성들 나름대로 절실한 요구였는데  모세 이상의 최소한 동등한 표적을 보이면 당신을 믿어보겠다는 뜻입니다. 

 

또 다시 주님은 곧바로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부인해버립니다. 먼저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32절a)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맞지만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그분의 일을 대신 수행한 자일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따지면 모세는 예수님의 제자인 셈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참 떡도 아니라고 합니다.(32절b) 그 이유를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33절) 모세가 광야에서 준 만나도 분명히 하나님이 베푸신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자 엄청난 권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만나는 이 땅의 육신적인 생명만 일시적으로 보존하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 오병이어로 당신이 준 양식도 일회용으로 썩어 없어질 떡이라고 백성들에게 이미 설명해주었습니다. 주님의 오병이어 떡이나 모세의 광야 만나나 인간이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참 떡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백성 중에 욕심을 내어 만나를 이틀 치를 따서 모아놓았더니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만 났습니다.(출16:20) 혹시라도 오병이어에서 떡을 더 많이 받아서 집으로 갖고 갔다면 틀림없이 그날 밤에 썩어서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은 물질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혼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입니다. 주님은 지금 인간 모세는 그런 참 떡은 도무지 줄 수 없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언뜻 예수님이 모세를 깔아뭉개듯이 부인하는 것 같지만 그가 행한 일이나 이룬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상 그만한 인물이 없었으며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상징 예표하는 인물로 선정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선지자와 달리 직접 대면하여 육성으로 교제한다고 당신께서 인정해주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생 말년에는 하나님에게 잘못을 범해 필생의 소원인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쓸쓸히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오래 동안 많이 했어도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님이 강조하려는 초점은  너희가 나를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 참 떡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종 그랬듯이 지금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칭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구약에서 말한 그 선지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세와 달리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참 생명을 주시는 독생자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유대인 인간 랍비가 이런 선언을 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차원을 넘어서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이른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장에 의심 반발할 것을 감안하여 제발 당신을 믿으라는 간곡한 당부이지만 뒤집어보면  죄송하지만 주님은 지금 죽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셈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을 진실로 진실로 간절히 살리고 싶다는 뜻이며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죽으려고 작정하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와 만나의 비교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준 만나나 예수님이 오병이어에서 주신 떡이 일시적 효과 밖에 없다는 주님의 설명을 유대인들이 못 알아먹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오병이어나 광야의 만나나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신 참 떡이 아니라 그것의 예표였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이 죽을 줄 뻔히 알고도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만나나 오병이어와 비교할 수 없는 큰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은 바로 이 더 확실하고도 가장 큰 표적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악한 것과는 한시도 공존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인간은 그 자리에서 소멸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나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올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에 임재하여 생전 처음으로 모세와 일대일로 대면해주었습니다. 불에 가장 빨리 붙고 순식간에 활활 타버리는 광야의 덤불에 분명히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 사회에 오셨는데 죄로 타락하여 그분의 원수가 된 인간들은 도무지 그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모세 때처럼 주님도 광야의 덤불처럼 순식간에 타서 없어져야 할 인간들과 오히려 따뜻한 사랑의 교제를 나눠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받아야만 할 형벌까지 대신 감당하셔서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 복음에 대해선 전혀 무지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켜서 당신이 누구인지 증명해  보일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 실현될 구원도 인간 내면의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에 제 삼자가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현실적 증거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먹고 배가 부른 그런 현실적 이유로 나를 찾지 말고 표적부터 보라고 촉구했는데 그것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따져보라는 뜻입니다. 얼마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할 텐데 그것이야말로 모세를 포함한 그 어떤 인간 선지자도 보여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보여줄 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진짜 표적의 의미를 제발 깨달아서 인자인 당신을 믿고 영생할 떡을 먹으라고 미리 예습을 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이해 못하겠지만 막상 당신이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고 성령이 강림하면 지금 예습한 내용을 손쉽게 복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백성들과 주님의 대화는 서로 겉 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단지 현실 삶에서 풍요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 사십 년은 풍요와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 하루치 만나를 모아서 하루 먹으며 생존만 했던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했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와 유대 당국 양쪽에 시달려서 궁핍하기 짝이 없었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생업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시니까 제자들에게 기도로 그것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었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모세를 그리워하는 진짜 이유는 만나로 사십년 간 이스라엘 국민 전체를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애굽이라는 세계 최강국의 노예로 사백 년 동안 고생하고 있었는데 팔십 넘은 노인이 혼자서 열 가지 재앙과 마지막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구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동안에도 이방족속이나 도적 떼의 침입이 한 번도 없었고 어쩌다 마주쳐도 다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처럼 예수님도 외부대적을 다 물리치고 전 국민이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해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을 믿어야 하나님이 세상에 생명을 내려준다고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에는 죽음밖에 없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백성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을 생각은 않고 전 국민에게 무제한 무기한의 만나를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라는 뜻이 됩니다. 

 

문제는 유대인들로선 자기들이 죽어있다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 구태여 하늘로부터 생명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율법을 소지했고 날마다 세밀하게 지키려 노력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할례로 맺은 영원히 변치 않는 그분의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제는 오히려 하나님 쪽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탄식한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할례도 없고 우상숭배와 온갖 음란한 죄악으로 타락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큰 고초를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아무리 따져도 악의 도성이자 하나님의 대적인데 왜 그냥 두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공의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모세의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는 사실상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었듯이 예수님더러 우리를 로마에서 구출해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로마 대신에 바리새인을 저주한 예수님

 

예수님이 그들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공사역 내내 로마를 한 번도 공개적으로 견책 저주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로마에 의해 당시 지중해 세계의 자랑거리였던 헤롯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무참하게 멸망당할 것만 예언했습니다. 겨울에 그 멸망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잔인한 살육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실제로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가 비록 물질적 욕심도 일부 개입되었지만 이 땅의 굽어진 공의를 회복시켜 달라는 뜻이므로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세상은 죽음뿐이라고 말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유대인들이 갖는 로마에 대한 반감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정당하다고 인정해준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인간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고 공의를 회복할 수 있는 근본 방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종일관 당신의 사역을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에 따라 수행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이스라엘의 요구는 자기들 같은 의인을 왜 죄인인 로마의 지배를 받게 그냥 두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스스로 병이 없고 의인이라고 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이 부분에서 서로의 초점이 맞지 않으니까 서로 결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로마는 물론 이스라엘 너희까지 포함해 모든 인간은 일대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자야말로 오히려 진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유일하게 정죄 저주한 자들은 당신을 직접 대적하며 사역을 훼방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 뿐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은 로마와 헤롯까지 포함해서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자신은 천하 죄인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소망이라고 고백하면 로마에 빌붙은 민족의 반역자 세리라도 구원해주었습니다. 

 

단순히 당신의 사랑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평생토록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목자 잃은 양들처럼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라기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이고 순전한 사랑에 굶주려서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늘에서 참 떡을 받아먹지 못하기에 죽음뿐이지 참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런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선 이미 저주 받아 죽어 있는 자들을 다시 저주하며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긍휼만 베풀어야 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죽지 않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의인이므로 자기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열등한 저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벌을 내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배척했습니다. 아니 그들이 끝까지 완악하게 주님을 대적했습니다. 주님은 도리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해주었습니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저주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심판을 베풀지 않고 구원만 베푼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생명의 떡을 준다는데도 아무도 남지 않고 다 떠나는 판국인데  저주한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가만 두어도 아담의 타락 이후로 당신께서 다시 올 때까지는 다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근본적인 뜻은 언제 어디서나 재앙이 아니라 구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모든 이에게 똑같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로마인과 유대인 우열을 나누지 않았고 자유자와 노예를 차별하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인종 민족 피부 지위 재물 신분 문화 관습 종교 언어 등등 그 어떤 것도 당신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모든 장벽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서 불쌍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골라 당신께서 먼저 찾아가서 만나주었습니다. 인간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잣대로 판단 정죄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사랑만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참 떡, 참 생명, 참 구원은 일대일 개인에게 이뤄질 뿐입니다. 오병이어도 끼니를 잊고 허기진 그들이 안타까워서 배불리 먹게 해주되 한 사람에게 일일이 하나씩의 도시락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중간에서 배달만 했기에 사실은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직접 준 셈입니다. 하늘에서 만나처럼  무차별로 전 백성들 머리 위로 내리는 떡이 아니었습니다. 

 

바꿔 말해 주님은 사악한 나라를 벌주고 의로운 나라를 흥하게 해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선한 냄새보다는 구린 냄새가 훨썬 더 많이 진동하기에 사악한 나라와 의로운 나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은 집단적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오직 개인별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서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같은 친밀한 관계를 생성해야만 가능합니다. 

 

결국 본인만 손해다. 

 

그럼 하나님은 세상의 공의는 이대로 굽어진 채로 버려두시는 것입니까? 당신의 직무유기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아담 때부터 이 땅은 가시덤불을 내고 모든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거기다 자기만 높이는 인간들끼리 필연적으로 분쟁 다툼이 끊이지 않아서 세상 공의가 굽어진 것입니다. 온갖 죄악이 난무하고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지 하나님께 핑계 돌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백성으로 삼아 그 크신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해 만나를 준 것부터 어떤 삭막한 광야라도 오직 당신만 의지하면 생명을 보존해 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더러 열방 앞에 당신을 증거 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모든 열방이 죽음의 저주를 받은 상태에서 당신의 백성만 따로 세우신 이유는 당신의 참 생명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광야에서도 만나로 먹여살렸듯이 범사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고귀한 신분과 권능을 받은 이스라엘이 도리어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해 바벨론 포로가 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포로 귀환 직후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모세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경건히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 당시에 이르자 예루살렘 성전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조각으로 빚은 우상 신들은 물론 없었지만 인간더러 그 모든 우상들을 만들어 내게끔 통제하는 최고의 우상인 돈이라는 신이 성전 안에 가득 찼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집을 추악한 도적의 소굴로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실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멸망시켰기에 구원은 오직 개인에 따라 이뤄진다는 진리가 다시 증명되었습니다.  

 

세상에 굽어진 공의를 바로 잡는 하나님의 방법은 모든 세대에서 똑같이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면서 인간 사회의 소금과 빛의 역할에 충성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분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굽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 사건,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본문과 같은 맥락에서 불쌍하고 연약한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 대국 로마의 폭력적 수탈과 지배에서  해방시켜주지 않는 예수인데 믿을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제 개인적으로 선천적 장애인을 태어나게 해서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게 만드는 하나님이 너무 의롭지 않아서 믿지 않겠다고 반박하는 분도 만났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부분이 세상의 공의가 왜 굽었는지 진지하게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 외면만 한다고 비난은 하면서 그분이 정말 어떤 존재인지 성경을 통해 탐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굽게 하는 데 자신도 한 몫을 했다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 최대한 양보해도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라도 굽어진 공의를 앞장서서 바로 세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이 세상 공의가 굽은 것을 그대로 두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개인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하나님이 공의를 굽게했는지 혹은 외면하고 있는지 따지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뿐입니다.그 중간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아무리 굽은 공의를 핑계삼아 그분을 믿지 않아도 본인만 손해로 그분의 심판을 모면할 길은 없습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스스로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인정하고 그래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부터 선보다 악이 많다고 겸손히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만약 겸손히 인정한다면 공의가 굽어지는 것은 인간의 잭임이고 인간이 해결할 문제이지 하나님께 탓하고 핑계를 댈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공의가 굽은 세상에서 성도로 따로 불러내신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잘 나거나 예뻐서가 절대 아닙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주변 모두에게 보여 주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인생이 얼마나 기쁨과 자유와 평강이 넘치는지 증명해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한 실패와 죽음만이 기다리는 불신자로 십자가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품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더러 로마를 물리쳐서 공의를 세워달라고 요구한 것은 정당합니다. 이스라엘만을 위한 공의를 세우라고 요구한 것이 잘못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신자들이 세상보다 훨씬 의로운 자기들에게만 공의를 세워달라고 이와 똑같은 요구를 예수님께 하고 있지는 않는지 정말로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의 공의는 참 생명을 얻은 신자가 참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만 신자 주변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그러나 아주 강력하게 세워질 뿐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세가 주는 만나가 소원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서 주변에 나눠주고 있습니까? 

 

(7/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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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해야 하나요? master 2023-05-30 26
157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습니다. master 2022-09-30 64
15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master 2022-08-10 36
155 (창3:8-13) 수동적 하나님 능동적 사탄 master 2022-07-26 54
154 세상이 메트릭스처럼 설계된 것은 아닐까요? master 2022-03-11 54
153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서 왜 원수를 갚아주는가? master 2022-01-19 89
152 (행 18:12-23)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 master 2021-10-04 42
151 하나님은 약한 자를 더 사랑하는가? master 2021-09-04 179
»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master 2021-09-04 43
149 하나님은 왜 선천적 장애아를 태어나게 하셨는가? master 2021-06-28 66
148 하나님의 절대적 또는 조건적 언약? master 2021-06-28 154
147 동방교회 필리오케 논쟁에 관해? master 2021-03-02 45
146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55
145 단풍으로 코로나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master 2020-12-1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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