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2:1) 모세의 지팡이만 바라본 이스라엘

조회 수 1384 추천 수 120 2006.02.01 18: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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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32:1)



오늘날의 신자가 구약을 읽을 때에 한 가지 불가사의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많은 은혜, 그것도 세상의 어느 민족도 보고 듣지도 못한 큰 이적들을 수도 없이 경험한 이스라엘이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것이 아마도 시내산의 금송아지 사건일 것입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들을 본지 겨우 몇 달 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은 출애굽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라의 쓴 물, 만나와 메추라기, 므리바 반석의 생수, 아말렉 전투의 승리 같은 이적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우리가 출애굽의 현장에 있었더라면, 또 그 많은 이적 중 한 두개라도 직접 체험했더라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두려워서라도 감히 못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한 것을 직접 목격까지 했습니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 우상을 절대 숭배하지 말라는 십계명도 받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두 번째 강림 때에는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은 그 발 아래가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한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기까지 했습니다.(출24:9-11)

물론 그 후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시내산을 가리고 모세는 그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2차 강림 이후로 이제 겨우 46일(6일간 대기하고 40일간 계시를 받음)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혹시라도 그 불꽃이 사라졌다면 모를까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출24:17) 보였는데도 말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 두려움 없이 자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본문에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산 위의 불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모세와 그의 지팡이만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로를 상대로 그 큰 승리를 거두고 척박한 광야 땅에서 먹고 마시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모세의 지팡이 끝에서 나왔다고 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무엇이 없으면 그저 불안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물과 먹을 것이 제대로 없는 산 꼭대기에서 46일간이나 있었으니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 이적을 왜 일으켰습니까? 당연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처럼 모세가 죽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어리석은 불신앙의 행동을 하지 말라고 그런 은혜를 미리 겪게 해준 것입니다. 산 위에도 만나와 생수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인식이 아직도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지팡이를 모세가 갖고 갔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이스라엘을 오늘날의 신자가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아니 제대로 이해라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대신 비난이 앞서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그들보다 더 좋고 신실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미 일어난 일을 사후에 객관적으로 보니까 그럴 뿐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동안 이스라엘이 보고 들은 것이라고는 온갖 동물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우상숭배 의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당시로는 세계 최강 아니었습니까? 이스라엘로선 “아! 저렇게 해야 신들로부터 나라와 개인이 복을 받고 감히 맞설 대적이 없어지는구나”라고 느꼈을 것 아닙니까? 지금 모세와 지팡이가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그 대체물을 만들 궁리를 한 것은 그들 나름의 자구책(自救策)이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의 현장에 있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절대로 단정지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우리도 그들과 똑 같았거나 더했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얼마나 오래 감사합니까? 최소 46일 이상 감사합니까? 아니 기억이라도 합니까? 말하자면 기도 응답을 받고 46일이 채 경과하기 전에 또 다른 환난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아무 염려 없이 안심하고 그분의 때와 방법만 믿고 기다릴 수 있습니까? 환난 중에 소망을 키우며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는 성경 계명대로 잘 따를 수 있는가 말입니다.

돌이나 금속으로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않는다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의 말씀도 계명이긴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안 지킨 것이나 우리가 신약의 계명을 안 지킨 것이나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상 숭배를 형상과 연결 시킨 것은 당시의 다른 민족의 행태를 본 받지 말라는 뜻이지만, 나아가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당연히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대부분의 사람이 새해 결심을 작심삼일 밖에 이루지 못합니까?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결실이 없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 통독이나 새벽 기도를 삼일 해서 어떤 가시적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오죽하면 “받은 복을 세어보라”는 찬양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복을 삼일도 지나지 않아 금방 잊어 버리고 의심과 불평만 그분 앞에 늘어놓기 때문 아닙니까?

솔직히 우리 모두(당연히 저를 포함합니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46일간이나 찬양은커녕 회상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처럼 우리 피 속에도 수천 년간이나 해 왔던 우상 숭배의 흔적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 새벽마다 쉴새 없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했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촛불이라도 켜놓아야 뭔가 눈에 보여 겨우 안도감을 얻던 그 습성 말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시내산 꼭대기 구름 속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영광된 모습으로 다시 오실 그 때까지는 계속 그러실 것입니다. 또 그분은 우리가 자꾸 가시적인 열매를 달라고 요구하면 오히려 더 감추십니다. 우리에게 열매를 주기 싫거나 약을 올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신령하고도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더러 인격적, 도적적, 종교적으로 아주 고상하고 거룩하게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신령하고 영원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계획을 당신만의 일정과 방법으로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 일정, 방법과는 달라서 우리의 눈에 안 보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뜻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그분의 뜻은 알 수 없고 그분도 자꾸 더 숨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2/1/2006  

정순태

2006.02.04 02:43:54
*.152.78.29

목사님, 오늘도 큰 은혜얻어 갑니다! 깊이 새겨야 할 우리 신앙의 한 국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한 때, 우리 신앙과 기적의 관계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기적은 우리 신앙의 필수요소는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귀한 체험이 될 수 있고 다소의 유익이 될 수는 있겠으나, 우리 신앙 최고의 가치는 아니라는 의미였지요. 아무튼, 기적과 참 신앙의 관계를 새로이 생각하도록 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샬롬.

날마다순종

2020.08.23 14:36:05
*.14.99.253

정말 진토같은 인간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고 또 그런 모습까지도 그대로 사랑하시어 한없는 긍휼과 은혜로 붙잡아 주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또 감사로 찬양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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