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32:25-29)
금송아지 우상에 절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참으로 가혹합니다.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벌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더러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형제, 친구, 이웃들을 죽이게 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선 참으로 못할 짓을 자행하도록 시켰습니다. 친구, 이웃은 둘째 치고 같은 혈육인 형제를 죽이면 그야말로 천륜(天倫)을 어기는 짓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이 아예 회개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어떤 큰 죄를 지었던, 지금 현재 어떤 상태에 있던,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면을 선포할 때에는 어떤 조건도 따라 붙지 않습니다. 그 분 앞에는 왕이나 방백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죄인이며, 바늘 도둑과 소 도둑이나 같은 도둑이라는 죄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는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지금 인간으로서 도저히 하지 못할 짓, 그것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천륜을 스스로 어겨가며 형벌을 가했다면 이는 당신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라는 뜻입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이스라엘은 금 송아지 앞에 춤을 추어 여호와의 이름이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취하게 해준 은금 패물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조롱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너희 신의 힘만 믿고 우리 은금 패물을 강탈해가더니 이제는 오히려 우리 신을 지어서 그 앞에 경배하는구나. 결국 너희 신보다 우리 신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너희 스스로 인정하지 않느냐? 너희 신이 우리 신을 이긴 것은 어쩌다 날씨, 기후, 조건이 너희 신에게 유리했거나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야?”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당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했는데 알려지기는커녕 그 이름에 당신의 백성들이 완전 먹칠을 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제가 하나님이라도 당장 그들을 갈아 안 마시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갈아 마시지 않고 은금 패물을 그들로 갈아 마시게 해 살려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너희들이 은금 패물과 금송아지를 그렇게까지 좋아한다면 아예 너희들이 마셔서 너희들 속에 간직해라”라는 엄중한 경고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회개의 기회까지 주었습니다. 너무나도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심판의 가혹함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공정하면서도 긍휼을 절대 버리지 않는 그분의 사랑 앞에 도저히 설 수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로선 용서 받지 못할 요인이 또 하나 더 있었습니다. 회개하여 여호와 편으로 돌아온 자들은 주로 레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자이고 또 모세의 가문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론도 분명히 회개의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모세가 없었을 때에 금송아지 사건을 주도한 지도자였습니다. 아론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도 끝까지 여호와의 반대 편에 선 자들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래도 하나님이 가혹합니까?
나아가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에게 헌신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알고 믿고 경배하는 것, 열심과 정성을 바치는 것, 심지어 평생을 두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사람, 기쁨, 가치, 목표 등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개입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당연히 부모 형제 자식 배우자 친구 이웃과 그들과 연관되는 모든 것도 포함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식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 자식이 그 거룩한 관계에 방해가 된다면 자식마저 희생하며 그 관계부터 살리는 것이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식을 회개 시켜 하나님의 거룩에 동참 시키려는 노력과 기도는 해야 하지만 항상 최우선권은 아니 삶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자신의 바로 선 관계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형제를 쳐 죽인 후에 비로소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고 본문이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 구약의 이런 하나님은 부정 내지 외면되고 오직 무조건 사랑하는 신약의 예수님만 부각시키려는 잘못된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던 있는 그대로, 예를 들어 동성애를 범하든 낙태를 하든 인간 복제를 시도하든 예수님의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 문제에 있어선 구약의 하나님과 하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10:36,37)
또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분은 절대 죄인을 무조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각기 사람이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죽이는 만큼, 아니 당신께서 자기를 죽일 만큼 더 철저하게 죄를 증오했습니다. 말하자면 금송아지를 갈아서 죄인더러 마시게 해야 할 것을 당신이 대신 마셨습니다. 죄를 그대로 둔 채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그분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여호와처럼 진노의 하나님이요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 아닙니까?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0b-41) 오순절날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힌 베드로가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설교를 결론짓자 그날 새 생명을 얻은 자도 삼천 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십일 간 하나님과 직접 맞대면하여 말씀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받은 성령의 권능을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모세가 베드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모자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은 모세를 거역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성령을 훼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역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막3:28,29)
예수님도 모세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누구든지”라고 하시면서 구원을 베푸심에 인간적 조건에 대한 제한을 전혀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여호와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당신이 조롱을 당했기에 진노하셨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만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값싸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면 그 자리에서 삼천명도 심판하지만 은혜를 베풀면 그 자리에서 삼천명도 살립니다. 그런데 그 심판과 구원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보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가 아니면 그런 십자가를 보고도 사단의 편에 남아 있는가 입니다.
사람이 도저히 못할 짓은 부모 형제를 희생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하나님께 이 아침에도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제가 제대로 헌신하고 있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되돌아 봅니다.
2/6/2006
제 블로그에도 놀러오세요~ 머 볼것은 밸로 없지만 노래 들으러 오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