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뛰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두려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6:6-10)
신자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불신자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날 세상 향락을 찾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고 주중에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에 빠짐없이 참석해도 그렇습니다. 간혹 물질에 넘어지고 세속적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불신자 시절에서 전혀 바뀌지 않는 교인이 많다는 뜻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은 비유컨대 코페르니쿠스 적(的)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평평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처럼 둥글고 또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에 두고 돌고 있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통용됐던 어떤 지식도 무용지물이 되고 그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이며 스스로 자기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실체이며 자기 인생이 어떤 절대적인 분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 자아가 중심에 있고 세상이 그 주위를 돌았습니다. 이제는 자아가 있던 자리에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자아가 밖으로 밀려납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에서 신본주의(神本主義)로 가치관의 완전한 전도(顚倒)가 생깁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성령의 거듭남, 즉 가치관의 전도를 통해 출발합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내어도 교인일 따름이지 아직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항상 새롭게 바꾸어진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입니다. 물론 새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잘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인생이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달라졌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 보고 기도하는 것은 그 준비와 훈련으로 정확한 표현은 오히려 종교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삶은 바뀌지 않은 가치관으로 살면서 종교생활만 열심히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양 착각합니다. 신앙생활은 전혀 시작도 하지 않은 셈입니다. 그나마 조금 양심적인 신자는 잘 믿다 보면 가치관이 바뀌겠거니 기대합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에게 받는 징계의 고통이 너무 심해 밤마다 눈물로 지샐 정도였고 하나님에게 구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도 때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분명히 자신의 과오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이제 자기가 회개하고 간구했으니 하나님은 마땅히 용서하고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믿거나 기대합니다. 그것도 새벽 기도에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눈물 콧물 쏟으며 간절히 기도했으니까 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자가 회개하며 기도했다는 그 자체가 앞으로 되어질 일의 근거이자 동력(動力)이 됩니다. 종교 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여전히 자기가 중심이 된 인본주의적 가치관입니다.
반면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틀림없지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믿는 소수의 신자가 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는 회개하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해주지만 그 다음에 이뤄질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환난이 끝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만의 뜻이 있기에 달게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만사를 섭리한다고 해서 독단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 역사를 꿰뚫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당신의 의에 바탕을 두는 통치입니다. 신자의 죄를 용서하고 환난에서 구원해주는 것도 신자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는 여전히 도저히 용서 받을 자격이 없고 또 그 죄 값으로 징계가 마땅하지만 오직 당신의 긍휼과 의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마지막으로 아니 항상 해야 할 고백은 “무엇을 먹거나 마시거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하며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하여 죽었다 다시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모든 일에 기독교라는 종교적 냄새를 피우며 살고 교회 활동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바뀐 가치관에 따라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통치에 기꺼이 또 절대적으로 순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근거와 동력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신자 자신의 뜨겁고도 열심인 종교적 활동은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일 뿐이지 그 은혜를 늘리거나 줄이는 수단은 절대 아닙니다.
다윗은 밤마다 침상을 적실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원수가 물러가리라”라고 미래형으로 표현했듯이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여전히 외적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다, 간구를 들으셨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습니다. 기도로 자기 모든 형편을 보고한 것이 하나님께 청각적으로 들려졌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내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위 환경에만 묶여서 하나님의 긍휼을 잠시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도 오랫동안 밤마다 눈무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바뀌어 그분의 긍휼이 실체적인 진실로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 대적이 물러가되 “홀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것에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으니 반드시 구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신자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환난에서의 탈출입니다. 그래서 환난이 그치지 않으면 끝까지 계속 울며불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확인하여 곧 환난이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구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그 긍휼에 맡긴 자만이 어떤 대적과 환난이 닥쳐도 비록 힘이 들기는 하지만 넉넉히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며 새롭게 바뀐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가치관이 바뀌리라 기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시선은 세상으로 향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종교생활만 하면 현실이 바뀌리라 믿고 있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판단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자는 때때로 울며불며 기도하지만 반드시 기도 중에 울음이 그치고 현실에 바뀐 것 하나 없어도 확신에 찬 구원의 기쁨을 맛봅니다. 두 번째 신자는 기도 하면서 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보내다가 어느 날 환난이 닥치면 울어보지만 여전히 밋밋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신자는 기도만 하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그치지 않는 한 그 울음도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간혹 종교생활을 잘하면 삶이 바뀌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종교생활을 잘하려면 그 종교생활 자체도 전적으로 신본주의에 따라야 합니다. 종교생활 열심히 한다고 신본주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착각부터 교정하면 어떤 대적과 환난도 전혀 두렵지 않게 되고 언제나 어디서나 인간인 자기 대신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날 것입니다.
11/20/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