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막6:22-24)
인간이 어떤 경우에 가장 괴로워 할 것 같습니까? 너무 막연한 질문이라 그 범위를 좁혀 볼까요? 세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먹고 살 것이 모자랄 때입니까? 중병에 걸려 고통이 심할 때입니까?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울 때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경은 그 답을 세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속으로 다른 답을 생각하셨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아시는 분이 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자 절대적 진리가 됩니다. 과연 그 답이 맞는지 살펴볼까요?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계수 즉 동생 빌립의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안티파스에게 그 결혼의 부당성을 율법(레18:16)에 근거해 통렬하게 지적하는 바람에 그 아내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롯의 생일잔치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왕과 손님들을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헤롯왕이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심지어 나라의 절반까지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구한 것은 오히려 세례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그 요구는 사실 헤로디아의 딸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헤로디아가 꾸민 흉계대로 진행되었고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한 것도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디아로선 진작에 요한을 죽이고 싶어서 남편 헤롯을 여러 번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으므로”(20절) 그 요구를 쉽게 들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21절) 헤롯의 생일잔치에 자기 딸로 춤을 추게 해서 남편의 마음을 홀리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남편의 평소 성격과 기질을 잘 아는 아내만이 꾸밀 수 있는 작전입니다. 헤롯이 소심하며 비겁하지만 그럴수록 자기 부하들 앞에선 괜히 호탕한 척하며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기질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나아가 율법에 위배되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줄을 알면서도 결혼을 감행했을 만큼 자기에게 홀딱 빠져 있으니 자기 딸에게도 어떻게 하든 잘 보이려 애를 쓴다는 것도 감안했습니다. 성경이 구태여 헤로디아의 딸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전남편 빌립과의 사이에 난, 안티파스에겐 수양딸일 것입니다.
헤로디아로선 안 그래도 남편이 비겁한 자인지라 약속한 것을 취중 농담으로 나중에 취소할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기 딸더러 처음 약속을 듣고는 맹세로 그 약속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라고 시켰을 것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유대의 왕인지라 맹세를 지키는 관습을, 그것도 부하들 앞에선 반드시 따를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그녀의 계략은 당연히 성공을 거두었고 헤로디아는 의도한 대로 나라의 절반 대신에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습니다. 인간을 더 괴롭게 만드는 것은 재물의 부족보다 남을 향한 저주라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왕비인 그녀로선 재물에 부족한 것이 없었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섣불리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런 일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헤로디아가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계략을 꾸몄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낮이나 밤이나 어떻게 하면 요한을 죽이나 오직 그 궁리에 골몰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에 대한 저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밥맛도 떨어지고 심지어 시름시름 아파 눕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제 처음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먹을 것이 없어 힘들거나 질병으로 아픈 것은 육신적 고통에 불과합니다. 그것으로 마음에까지 병들지는 않습니다. 또 그 고통이 끝나면 언제 그런 고통이 있었는지 금방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이 없이 외로우면 식욕이 떨어지며 우울증이 도지고 온갖 질병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럼 과연 어느 것이 인간에게 더 괴로운 상황입니까?
헤로디아의 요한에 대한 저주와 사람이 외로운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둘 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세상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의 갈채를 받아야 살맛이 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일에 조금이라도 훼방을 받으면 절대 참지 못합니다.
헤로디아의 경우 물론 그 직접적인 동기는 자기 죄를 요한이 정죄했기 때문에 그를 극도로 미워한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알고 있는 자를 없애려 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자기 허물을 덮어 없애고 다른 사람들 앞에 자기를 더 올리려는 작업이었습니다. 스탈린이 권좌에 오른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렸을 때의 친구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허물과 잘못을 알고 있는 자를 다 없애서 자기를 과대포장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단지 예수님을 그 큰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쳐 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옥으로 떨어질 죄인이라고 저주했기 때문입니다.(예:마23장의 일곱 저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을 단 한 번도 정죄하지 않고 또 성전을 청소하지 않고(이것도 정죄의 다른 표현임) 팔복 강화 같은 훈화만 하셨다면 과연 예수님을 죽였겠는가 말입니다. 말하자면 광야에서 그냥 회개하라는 메시지만 전했다면 아무 죽일 이유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먹을 것을 안 주는 것보다, 병을 안 고쳐 주는 것보다, 자기들 자존심이 건드려진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것도 예수를 믿고 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오직 자기가 최고이며 자기 마음대로 해야 적성이 풀리며 그 일을 방해 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뿌리 깊은 죄악이 그 본성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에게 정죄 받고 무시당하면 못 견디는 것의 더 깊은 진짜 배경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앞 뒤 면일 뿐 본질 자체는 같은 것입니다. 증오란 사실 불순한 의도나 죄악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는 정말로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의 경우도 하나님의 참사랑을 잠시 외면하는 바람에 이상한 가짜 사랑에 눈이 팔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헛된 것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진짜 사랑을 찾지 못해 갈등하며 고뇌하는 몸부림입니다. 헤로디아나 스탈린의 경우도 세상 재물과 쾌락에 전혀 부족한 것이 없었어도 평생을 두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아는 자들을 무참히 죽인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누려보지도 아니 발견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얼마나 의롭게 혹은 악하게 살든 간에, 사실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똑 같아 진정한 의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지만, 그 모든 인생 여정은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는 과정일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진정한 사랑을 해야만 그 삶의 의미와 가치와 심지어 힘이 생기는 존재로 본래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입니다.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고자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연인인 인간이 배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괴로워했습니다. 서기 원년이 되도록 수천 년을 괴로워했으며 또 독생자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 사랑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드러난 그 사랑을 안고 지금도 죄 중에 있는 인간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대문 밖에 먼저 나와서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돌아오면 천국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체스트톤은 인간은 기생집을 찾아 갈 때도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말고는 인간 세상에선 절대로 완전하고 순수한 사랑은 없습니다.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그 점을 이미 인정하고 역사를 그분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었지 않습니까?
이천년 전의 인간들은 자기들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어쩌면 그것마저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선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인간의 뿌리 깊은 고뇌와 허무와 갈등을 잘 아시기에 아무 말 없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모르니 사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기에 어떤 인간도 그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평생을 두고 허공을 치며 향방 없는 달음박질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헤로디아와 스탈린은 그 헛발질이 좀 심했던 것뿐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외로움은, 사실은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가장 핵심적 요소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절대로 충족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럴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죽을 때 보면 그 큰 소리가 얼마나 거짓이었는지 본인 스스로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십시오!!! 인간이 진정으로 살 길은 오직 그 하나뿐입니다. 먹고 살고 병 안 걸리고 형통하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참 사랑을 맛 볼 길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것이 먹고 살 것이 모자라거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라면 말입니다.
이미 예수 믿은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십자가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미워서 밤새 끙끙 앓고 있다면 예수님의 참 사랑을 놓친 것일 뿐 아니라 사실은 그분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명색이 신자가 말입니다.
11/2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