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당신과 교통이 가능한 영(靈)을 주셨습니다. 바꿔 말해 영은 당연히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이 갖고 있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동물에게도 그 수준이 인간에 비해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지정의는 있습니다. 따라서 영은 지정의와는 다르며 더 고급한 차원에서 지정의를 통솔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따져서 지정의로는 영의 흐름과 작동 과정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들이 때때로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자인하지 않습니까? 바로 지정의적 차원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방향으로 마음이 흘러가면서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을 너무 어렵고 신비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동물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인간에게만 주신 것에 대해서 창세기 3장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영이 바로 자유의지는 아니지만 처음 아담이 갖고 있던 자유의지는 지정의적 차원보다는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분석해 보아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아담이 갖고 있던 자유의지는 죄를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시행하는 능력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근본적으로 자기의 전존재를, 즉 지정의 전부를 통괄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 쪽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쪽으로 흘러가게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힘이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선악과가 맛있어 보여서 먹느냐 마느냐를 결정한 지정의적 차원의 자유선택권 이전에 자기 존재 전부를 어떤 사람으로 형성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권이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 둘 것인가 밖에 둘 것이냐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이미 자유의지가 그 영에 작동되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고 그 후에 선악과를 따먹는 지정의적 의지의 결단과 행동이 따라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한 마디로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처음에 인간에게 바랐던 것은 인간의 영의 자유의지가 당신의 뜻을 받아서 그 뜻대로 자기 지정의적 의지를 통제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간절한 소원이 있었음에도 인간의 영을 당신만을 향해 자동적으로 작동되도록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또 다른 영적 존재인 사단과도 그 영이 작동되어질 수 있게 했습니다.
따라서 아담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는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사단 중에 어느 쪽으로 향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영의 영역에서 작동되는 자유의지였던 고로 지정의가 인식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다른 말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지정의가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과 사단 둘 중의 하나와 교통하고 있으며 그 중립지대에 서 있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하여 자유의지가 왜곡되었다는 것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원죄 하에, 즉 자유의지가 왜곡된 이후에 태어난 인간은 항상 선행 대신 악행만 선택하여 죄만 짓고 있다는 차원으로 따져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윤리적 죄는 불신자도 얼마든지 의지를 동원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며 심지어 신자보다 더 의롭게 사는 자도 많습니다.
불신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단순히 죄를 범하느냐 선을 행하느냐를 선택 시행하는 능력으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선악과 사건에 나타난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아담의 잘못이 모든 인간에게 형벌로 나타나느냐? 하나님은 내가 빨갱이도 아닌데 왜 연좌제로 처벌하는가?” 자기는 죄를 안 지으려 선택하고 실제로 선행도 많이 한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인간 특유의 자유의지를, 사실은 영적 차원이 아닌 동물에서 조금 나은 수준의 지정의적 의지에 불과한데도,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죄 하에 있다는 것은 아담의 영이 사단을 택한 이후로는 그 영이 하나님 쪽으로의 접촉 경로가 차단된 채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모든 자연인이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알지도, 찾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신자가 선행을 해도 자기의 지정의적 의지로만 한 것이지 영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원죄로 인하여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와 순서가 하나님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받아서 자신의 지정의를 통괄해야 함에도, 이제는 세상을 접촉한 지정의가 먼저 모든 것을 선택하여 결정하게 되었고 또 그런 결정에 영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원죄란 얼마나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와 관계없이 오직 보이고 들리는 대로만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라 그 영에 당신의 생기가 채워지지 않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전혀 교통을 할 수 없는 불신자로선 아무리 세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 많아도 항상 갈급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부패한 인간의 영을 하나님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소생시켜 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에 작용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거듭난 신자의 영이라고 항상 하나님 쪽으로 향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향할 수 없도록 이전에 사단이 막아놓은 자물쇠만 열어준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영에 성령이 좌정해 있지만 창조 당시처럼 여전히 강제적이고 일방적으로는 신자의 영을 조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매순간마다 자유의지로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사단 중에 어느 쪽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를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은 이후에도 자신의 지정의적 의지로만 자신 있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자가 의외로 너무 많습니다. 내가 잘 믿으려 노력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훈련프로그램과 모임에 개근하고 성경 말씀대로 따르고 기도 열심히 하면 신앙이 쑥쑥 자란다고 확신합니다. 또 그 자란 믿음으로 매사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처럼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말씀이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수많은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연륜이 쌓일 대로 쌓인 믿음을 갖고도 자기 지정의조차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찬양이 뜨겁고 말씀은 너무나 은혜로운 집회에 참석해도 잠시 그 때뿐이고 교회 문만 나서면 또 다시 좌절되지 않습니까? 잠시 은혜 받은 것은 지정의적 영역 안에서만 일어난 일일 뿐 실제로 그 영은 아직 충만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제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니 자신의 의지로 이전보다는 선과 의를 잘 선택하여 더 성실하게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으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이 있기에 불신자시절보다 더 거룩하고 평강해졌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섣불리 자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는 단지 그동안 잠겨있던 영적인 자유의지의 자물통이 풀린 것뿐이지 지정의적으로 더 선해지고 의로워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자가 자꾸 지정의로, 다른 말로 의지적 믿음으로, 영을 조종하려 들어선 불신자시절의 실패만 반복할 뿐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먼저 충만해진 후에 그 영이 지정의를 주관하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자기 전 존재가 그분의 은총과 자비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게 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망해야 합니다. 그분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영에 당신의 긍휼을 부어달라고 정말 야곱처럼 밤을 새워서라도 씨름해야 합니다. 자기 전부를 완전히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자신의 외부 환경에 당신의 능력을 부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처음 믿음을 가져보려는 단계를 제외하고는, 신자에게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그 일이 해결된 후에 다시 외부 환경이 악화되면 그 영 또한 다시 좌절될 것은 너무나 빤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계속 경험했고 하고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런 기도는 자신의 지정의적 만족과 기쁨을 채워달라는 요구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서두에 지정의로는 영의 흐름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말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영은 움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자는 웃을 수 있고 울 수밖에 없는 여건에서 웃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정의로는 영의 흐름을 파악 못해도 영이 충만해져 있으면 비로소 지정의와 나머지 육신도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원죄로 뒤바뀌어진 의사결정 구조를 바로 잡아서 이제는 영이 지정의를 통제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낙망된 자신의 영을 하나님이 소생시켜 주기를 소원하십니까? 자기 믿음으로 소생시켜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12/13/2006
귀한 은혜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