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막5:39)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비논리적이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었고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고 하니까 너무 황당하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본인이 십자가에 죽었다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데선 아예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예수님이 살리려 했을 때도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한 첫 말씀이 도저히 비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것을 완전히 확인한지라 비웃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만큼 논리적인 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딸을 살리시면서 “일어나라”, 또 살리신 후에는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음이 자는 것이라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며 다만 활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그 잠에서 깨어났다면 뭐가 달라져야 합니까? 먹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잔다고 말한 것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도 완벽하게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자면서 꿈을 꾸는 존재는 인간뿐이지 않나 싶습니다. 꿈을 꾼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자면서도 즉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서도 영혼은 계속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후에도 인간은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에게 미리 알려주려는 창조주의 배려가 꿈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죽음을 미리 알기에 동물과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동물도 죽음을 본능적으로 그 낌새는 알아챕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고 철학적으로 고뇌하고 사색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은 꿈을 꾸거나 장래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선 지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만은 따로 생각하셔서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시8:4,5) 인간을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영적인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죽음이 자는 것에 불과함은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다.
회당장의 집에 모인 사람들 중에 특별히 훤화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친척 및 친지들은 지금 유족이 소생의 소망을 안고 예수님을 모시고 온 판에 혹시 속으로 비웃거나 반신반의했을지 몰라도 대놓고 비웃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 딸의 목숨만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당장에 활동을 재개할 만큼 육신이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이라 귀하게 자랐을 것이라 아마도 사고가 아니라 어떤 치명적인 병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고 어쩌면 위장 계통의 질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비웃은 사람들 앞에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부분을 완전히 치유했다는 것까지 확인시켜주신 것일 수 있습니다.
훤화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장례식에서 유족을 대신해 전문적으로 곡(哭)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 중에 장의사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죽음에 관한한 가장 전문가로 요즘의 해부전문 의사에 해당합니다. 그런 자가 죽었다고 판정을 내렸는데 한 젊은 랍비가 나타나서 잔다고 하니 도대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자기들 논리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 논리, 과학은 완전히 타파되었습니다. 인간의 논리가 예수님 앞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논리의 주인이자 논리 그 자체였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이 땅과 또 이 땅을 넘어선 저 피안(彼岸) 양쪽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죽음을 이 땅에서 논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 땅의 부활로 이끄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만 살리고 또 신령한 육체로 부활시키는 일을 그분이라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논리를 말로만 그친 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주관자 되심을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그것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심으로써 만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논리에 실증(實證)이 따르지 않으면 말 그대로 논리일 뿐입니다. 반면에 논리에 실증이 따르면 진리가 됩니다. 죽음의 전문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은 육신은 자고 영혼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논리를 예수님은 실증하여 진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인간 이성으로 황당해 보이는 성경의 그 수많은 논리적 결함들이 진리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논리적 모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입니다.
다른 말로 부활을 믿는 믿음도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천사보다 조금 못한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또 그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며 그분의 영으로만 생기를 얻는다는 것을 실증한다면 부활은 당연히 영원한 진리가 됩니다. 반면에 인간이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지 물질에서 우연히 생긴 존재라고 믿는다면 부활을 믿지 못할뿐더러 논리적으로도 아예 부활을 가정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 신앙은 부활을 비웃는 세상 논리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비논리적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그 논리는 더욱 정연하고 확실해집니다. 예수를 논리적으로 따져서 믿게 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를 직접 만나 중생한 체험을 통해 믿는 믿음만이 세상 지식을 다 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논리적이 되도록 형성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또 인간이 동물과 달리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논리를 만드셨습니다. 당신께서 논리적이지 않고는 논리를 만들 수 없는 법입니다. 그 논리가 가장 완벽하게 발휘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제외해놓고 논리를 논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자기가 논리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조차 순전히 물질에서 우연히 이뤄진 일이라는 그야말로 완벽한 비논리에서 출발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는 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죽음, 사랑, 소망 등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할 능력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논리, 그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가장 완벽한 진리인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에 성경 기록, 아니 자기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기만 하면 비록 하늘의 논리이긴 하지만 여전히 논리의 수준에 머뭅니다. 정말로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주께로 오지 않은 것 하나 없으며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의로운 손에 붙들린바 되지 않은 것 하나 없음을 실제 삶에서 증험하여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감사와 찬양의 제물을 바칠 때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라면 논리적으로 아예 말도 안 됩니다. 혹시 아직 성경이 이해되지 않거나 주위 환경과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비논리적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까? 오직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당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1/2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