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예배 시에 주기도문 암송을 가끔 하는데 많은 신자들이 그야말로 암송으로 그칩니다. 마치 누가 뒤에서 쫓아와서 급히 도망이라도 가야할 듯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정확하고도 빨리 외워야 되는 듯이, 심지어 재빨리 입에서 줄줄 나오는 대로 외우지 않으면 잊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정말 숨차게 후딱 외우고 치웁니다. 주기도문 암송이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기도문으로 함께 기도하자는 것이지 암기력 테스트 하자는 것이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또 기도란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예배의 통상적인 순서로 진행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분명히 그런 자세를 갖고 암송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마치 흑인들이 빠른 템포의 랩송 부르듯이 자기 요구를 잠시 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줄줄 외우고 가버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그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주기도문과 함께 모든 신자들이 아마도 한 장을 전부 다 외울 수 있는 성경구절의 대표인 시편 23편을 대하는 모습도 대동소이합니다. 시편 150개 중에서도 그 문체가 미려하며 은혜가 가장 풍부해 참으로 많은 분들이 아주 상세하게 강해를 했으며 또 그런 내용을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감정적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연인에게 편지로 적어 보낸 시처럼 암송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은 무조건 복을 많이 주신다는 단순한 한 가지 생각만으로 숨차게 외우고는 치웁니다.
요컨대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셔! 사망에서도 건져 주시고 잔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니 말이야!”가 신자가 이 시편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의 전부입니다. 모든 성경구절이 다 그러하듯이 이 시편도 이성적으로 내용을 정확히 분석해서 냉철하게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이 1절의 해석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먼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두말하면 잔소리 같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립니까? 과연 그럴까요? “여호와” 대신에 다른 것이 대체될 여지가 전혀 없는가요? 가장 손쉽게 돈은 어떨까요? 자기 삶을 진짜로 주관하고 인도하는 대상이 돈, 자존심, 체면, 감정, 명예, 권력 등인데 여호와는 그것들이 부족하고 피해볼 때 보충해주는 도우미(Helper)가 아닙니까? 사실은 돈이 나의 목자인데 여호와가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는 한 여호와도 목자로 모실 수 있거나 또는 그렇게 되기 위해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겠다는 심보 아닙니까?
사람에게 목자가 되는 것, 다른 말로 목을 매달고 살며 그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대상은 의외로 많습니다. 부모, 자식, 웰빙, 심지어 이웃집도 포함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말 속담과 유사한 뜻의 영어 관용구로 “keep up with John's"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John은 우리로 치면 김씨(金氏)처럼 가장 흔한 성씨로 말하자면 옆집 사는 사람을 대변합니다. 옆집에서 HDTV사면 그대로 따라하거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사야 속이 시원해지는 인간의 욕심을 꼬집은 말입니다.
인생이 이웃에게 좌지우지되니까 이웃이 목자이며 여호와는 그 이웃을 따라잡게 만들어 주는 만능 요술쟁이 할아버지일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인에게는 교회, 담임목사, 같은 구역 식구가 심지어 기도, 전도, 찬양, 은사, 예언 같은 것들이 목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또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간혹 “남의” 목자인 신자도 많습니다. 특별히 “마누라의” 목자인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마누라 치맛자락만 잡고 있으면 천국 가겠지”가 아닙니다. 그래봐야 치마만 찢어져 마누라를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만들 뿐입니다. 구역에서 그렇게도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도 남편의 변화가 없으니 구역식구 보기도 민망하고, 나중에 그 상태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먼저 믿은 아내가 남편 하나 구원 못하고 평생 무엇했느냐는 말씀에 고개라도 들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여호와가 “기독교의” 또는 “인류 전체의” 목자일 뿐인 신자도 있습니다. 개인적, 인격적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 읽기를 주중에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일 예배 때에 대표 기도를 듣고 성경을 만지작거려 보는 것이 유일합니다.(요즘은 전부 파워포인트로 화면에 비춰주니 일 년 내내 성경을 펼친 적도 사실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라는 목사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이제야 예배가 끝났구나. 어서 빨리 외우고 골프장으로 달려가야지.”하고 순식간에 외워버리지 않습니까?
나아가 여호와가 목자라는 것만 강조합니다. 이 시편을 금과옥조처럼 외우고 심심하면 묵상하는 분들 가운데도 그렇습니다. 여호와가 목자라면 나는 당연히 그분의 양이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목자라는 것은 두말 하면 입이 아픕니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내가 과연 진짜로 그분의 양인지의 여부입니다.
양은 스스로는 아무 일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쫄쫄 굶고 추우면 헐벗는 것이 양입니다. 오직 목자가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이 양입니다. 물론 목자가 자기 양을 굶겨 죽일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혹 목자가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를 빨리 발견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덤불과 바위 많은 벼랑길을 거쳐서 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양은 아무 군말 없이 따라갑니다.
신자 스스로 기꺼이 양이 되겠다는 헌신은 없으면서 여호와만 목자로 모시려 합니다. 사실 진짜 목자로 모시면 다행입니다. 강제로 여호와를 목자로 부려먹을 궁리만 합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양이 되려는 마음은 별로 없고 오히려 신자가 여호와의 목자가 되려고 합니다. 여호와가 좋은 것을 채워주면 그 때가서 쥐꼬리만큼 감사한다고 그분의 양이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구분해서 듣고 그 음성대로만 따라 해야 그분의 양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시제가 미완료형(imperfect)으로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행위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과거, 현재, 미래를 통 털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항상 채워주니까 누가 봐도 언제든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하면 때로는 현실적으로 궁핍할 때가 있어도 “내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강조됩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드러내고자 “I shall not want"라고 자기가 주어가 된 의지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하박국 선지자의 이런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또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 모두 솔직하게 자문(自問)해 봅시다. “여호와가 진짜로 나의 목자”입니까?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내게 부족함이 있더라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영히 거하리로다”고 자신 있게 고백하며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내가 먼저 여호와의 양으로 부족함이 없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로 부족함이 없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2/1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