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막5:18-20)
한국인은 성격이 급한데다 감정적이라 부흥회에서 비상한 은혜를 받거나 기도원에서 기적적 치유를 경험하면 바로 주의 종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또 그런 집회를 주관한 목회자들도 더 많은 자가 그런 길로 가도록 독려합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 들렸던 자를 고쳐주자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귀신 들렸던 자로선 그렇게 괴롭히던 군대 귀신에게서 풀려난 감격이 모르긴 몰라도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아 그 은인에게 당연히 자신의 남은 인생을 다 걸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요구를 바로 거절했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늘어나 초대 교회의 일을 분담해서 맡게 되면 더 좋을 텐데도 귀신들렸던 전력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요?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이끄셨지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한 일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기에 사실 많은 제자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전력(前歷)을 결격사유로 삼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자격과 능력이 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당신의 대적 바울을 오히려 가장 위대한 사도로 세웠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당신의 제자와 신자들이 흔히 되려고 생각하는 제자의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이제는 정상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제자도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전문 사역자가 되어 말로는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집에서부터 삶이 바뀌어있지 않는 자는 사실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목회서신(디모데서, 디도서)에 따르면 주의 종이 되는 자격 요건으로 복음을 잘 전하는 능력보다 삶에서 얼마나 성실하고 의로운가를 더 따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착하게만 살면 의로운 불신자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자기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집으로 돌아가 친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선하고 의롭게 살되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형태가 되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우선 주께서 하신 일이어야 합니다. 간혹 신자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믿기로 결심해서 이런저런 의로운 일을 했더니 복을 주더라는 식입니다. 선한 일을 한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주로 뜨겁게 기도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아주 능력 있는 해결사로만 소개하고 또 해결을 받으려면 신자 쪽에서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가 관건이 되어버립니다.
전도란 본인이 확실하게 체험한 큰일의 증거여야 합니다. 군대 귀신이 물려가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같은 큰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는데 그 일을 오직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확신과 감격을 있었던 그대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자기는 여전히 죽음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처절한 인식이 모든 증거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이전과는 정반대로 달라진 존재와 삶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큰일을 베푸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께서 너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저 큰 능력만 발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죄와 사단과 사망에 묶여 있던 자기 같은 자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 큰일을 행하셨다는 철저한 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렸던 자는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가는 대신에 가족과 근처 데가볼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이전에 어떠했던 사람인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완전히 멀쩡해지고 아니 자기들보다 더 의롭고 경건해져서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큰일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듣는 자로선 그 말이 말로서만 끝나지 않고 간접적이긴 하지만 살아 있는 체험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해지는 복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바탕을 둔 진리여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먼저 완전히 거듭나야지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공부해서 남이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데가볼리는 이방인들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에게 틀림없이 군대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 몰살당한 이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로선 율법에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규정된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또 유대 경내에서 돼지 사육을 못하니까 거라사 같은 변방에서 사육하는 것을 보고 우습게 여기고 멸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로서 바로 그 율법을 완성시키러 왔다는 한 유대인 젊은 랍비가 돼지 떼를 몰살시켜버렸습니다. 율법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방인들로선 유대인들의 율법과 그들의 신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믿는 우상들은 단 한 번도 그런 큰일을 일으킨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증거는 최소한 타 종교인들에게는 자기들 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과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고, 또 불신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차원과 그곳을 주관하는 분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바로 그분이 죄의 권세에 눌려 있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자기 체험을 통해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란 너무나 추했던 한 죄인이 너무나 의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자기 체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직접 그분을 만난 증인(eyewitness)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맛보기 전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삶으로 보여주고 말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증인의 전후 사정을 잘 아는 가장 가까운 자부터 그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신학적 실력과 종교적 열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또 맡고 있는 일로서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를 너무나 불쌍히 여겨 구원의 큰일을 주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주위 사람에게 알게 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였다는 고백이 없는 복음은 단지 능력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그 흉악했던 죄가 주님의 보혈로 씻어진 체험이 없는 복음은 또 하나의 종교일 뿐입니다. 복음은 한 죄인을 실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받는 것입니다. 그럼 그 증거도 반드시 참 생명이 드러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혹시 전문사역자가 아니니까 아직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요? 제자 훈련이나 기도모임에 얼마나 성실히 참석하는지 따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어 날마다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있음을 체험하여 그 은혜를 주위에 나누고 있다면 온전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께 받은 은혜를 집으로 돌아가 친속에게 전하는지 아니면 교회부터 찾아가 마치 자기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을 하나님에게 인정받은 양 자랑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친속이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해도 아직 제자가 된 것도 심지어 복음 안에 들어 온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11/2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