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9:2-4,9)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모한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간적 측면에서 갖는 의미를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늘에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메시야 되심을 확증 받은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처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였습니다. 그 동안 메시야가 곧 오신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한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이 예비했던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또 이 땅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릴 예수님의 왕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아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울려 퍼지고 천국이 도래될 것을 너무나 기뻐하신 하나님이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고함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곧 마감해야 할 이 시점에도 동일한 선언이 하늘로부터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 베드로가 주님의 주님 되심에 대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따라서 그 고백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영원한 진리임을 보증한 것입니다. 또 수난의 종으로 인류 역사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죽음으로 그 역사를 바꿀 예수님의 권위를 다시 한 번 확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울리는 팡파르와 함께 사역을 시작하시고 마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엿새 후에”라는 시간적 서술과 함께 이 사건의 설명을 시작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전에 있었던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일(8:27-9:1)의 엿새 후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자 비로소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고 끝맺었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죽기 전에, 즉 엿새 후에 실제로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를 생생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자기들 세대 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 땅을 완전한 천국으로 바꿔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기대가 맞으려면 예수님이 여기 섰는 사람 “중에”라고 표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 전부가 본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일부를 지칭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본 것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이 부활할 때까지는 아무리 신령하게 변모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봐야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부활을 귀신인가 의심하고 환상으로 치부해 믿지 않을 제자가 있을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의 모습을 세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어 부활의 참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많이 실망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어 절대로 죽음이 끝이 아니며 오히려 이 땅에서의 어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과도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아름답고 좋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아니 실제 체험을 시켜 준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좋았으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겠습니까? 죽었다 소생한 신자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빛 가운데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평강과 기쁨이 솟아나서 지상으로 되돌아오기 너무 싫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해 초막을 짓겠다고 나섰다고 나무랄 일만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너무나 좋은 천국의 영광을 잠시나마 맛보고 계속 머물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을 비췬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희 앞에서 변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형되는 과정 전부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변형의 과정이 어떠했습니까? 옷 색깔이 세상에선 아예 볼 수 없는 진짜 순백(純白 100% pure white)으로 바뀌면서 광채가 났습니다.
부활 때에는 모든 더럽고 추한 것이 다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집니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말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생전에 이 땅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재림 때에는 초림과 달리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또 이 땅에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성도들도 홀연히 그렇게 변모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변화산 사건이 예수님의 메시야로서 권위를 보이시려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더러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권위만 보이려 했다면 제자들과 성정이 동일한 죄 많고 연약한 인간인 엘리야와 모세가 구태여 함께 나타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는 우리 모두도 얼마든지 엘리야와 모세 같은 자리에 설 수 있고 또 그런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육신적으로 죽은 시기와는 상관없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서로 의논을 하며 이 땅을 다스리듯이 우리 또한 동일한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처음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을 때는 아직 천국 복음이 선포되기 전 예수님이 세례 받는 현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 앞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택하시고 복음을 가르치신 제자들만 보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은 세상에 선포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지식적으로는 그분을 압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택함을 받은 자는 소수이며 또 그 소수는 반드시 예수님과 시공간을 초월해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죽기 전에” 그런 영광을 맛보게 해준다고 약속했겠습니까? 또 왜 당신의 부활 후에야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했겠습니까? 제자들도 당신께서 가신 길을 똑 같이 걸을 때에 그런 영광스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5:16,17)
예수님은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부할 할 때까지 변화산 사건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역으로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면 변화산 사건의 영광을 기억하고 너무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될 것이라는 뜻 아닙니까? 바울 사도도 예수님 재림의 영광된 순간을 묘사한 말씀을 어떻게 끝맺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정말로 예수님을 닮고 싶은 참 제자라면, 아니 십자가 복음 안에 제대로 들어온 신자라면 주님이 가신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선 반드시 낙심과 핍박이 연속되는 수난의 일상사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아무리 극심한 고난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해도 우리는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우리도 주님과 같이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질” 소망을 서로 나누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흰 옷을 입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멸시를 받아가며 골고다 언덕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까? 변화산의 소망만이 신자가 매일 겪어야 할 십자가 수난을 담대하게 감당해낼 수 있는 근거이자 힘입니다. 세상에서 같은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활과 재림을 소망하는 말로 서로 위로 받는 성도가 주위에 얼마나 있습니까?
12/7/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