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5-37)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율법과 지혜의 말씀에 능한 서기관들에 비해서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권세가 있다고 놀랬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천국 복음에 관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나아가 예화로 사용되어진 비유의 적절함이나 그 논리의 흐름이 정연하고 아주 예리한 면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 내용에서나 논리에서 주님의 변론의 탁월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목숨이라는 한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두 가지 목숨의 의미가 있고 또 간혹 그 단어가 생략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아래처럼 알기 쉽게 고쳐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육신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영적인 목숨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그 영적인 목숨을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영적인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영적인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지막에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사람이 무엇을 주고 영생과 바꾸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앞에 온 천하를 얻고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역으로 온 천하를 잃더라도 영생을 얻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질문의 답은 무엇이 됩니까? 당연히 온 천하와 맞바꾸더라도 영생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과 연결시켜 보면 더 흥미로운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자 베드로가 그러지 말라고 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야단치고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의 일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것으로 영적인 목숨을 살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좇는 것도 영적인 목숨을 살리려는 것입니다. 비록 육적인 목숨이 죽고 천하를 다 잃더라도 말입니다. 그럼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영적인 목숨을 포기하더라도 육적인 목숨이 살고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더러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다고 해서 베드로가 사단은 아닙니다. 사단에게 넘어가서 하나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하는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얻게 하여 육신의 목숨에 활력이 넘치게 하더라도 영적인 목숨만은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이 살아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팔도록 해서 영적 목숨이 살아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집요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준다는 것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라고 해서 악한 수단만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하게도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스승 예수의 생명을 나서서 보호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제자도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로 그것이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목숨이 죽을 것이며 제자들도 그 육적인 목숨을 죽이며 따라오라고 했는데도 베드로는 오히려 육적 목숨을 살리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지금 육신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이원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차지하여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 중에 사람이 가장 잃기 싫어서 끝까지 지키려는 육신의 목숨도 당연히 포함해서 말입니다. 반면에 사단은 이 세상을 다 줄 테니 예수만은 절대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잃더라도 구해야 할 일이라면 모든 인간이 가장 시급하고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그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을 구한다면 천하를 얻은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있는 자들을 예수님이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38절)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무슨 이유로 그렇다고 합니까? 성적으로 문란하고 흉악한 범죄를 많이 저질러서입니까? 아닙니다. 단 하나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처럼 메시야라면 왜 헛되게 십자가에 죽느냐고 따지며 또 오히려 저 나쁜 사람들을 물리쳐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어떻게 됩니까?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 예수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따지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유주의 신자들처럼 그분의 십자가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당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알거나 소유하고는 있는데 별로 떳떳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예수를 도덕과 종교 스승으로는 인정하겠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논증이 예리하다고 한 뜻이 바로 이런 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세상 윤리나 종교에서도 사람이 낮아져야 오히려 높아진다고 다들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세상에서의 겸손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죽을 때에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신자더러 선교사가 되어 순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과 그분의 말을 정말로 부끄러워하지 않기만 해도 됩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십자가만이 나를 구원하며 인류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사람들 앞에도 그렇게 담대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참 구원의 길 예수님을 알고도 다른 길도 함께 인정하는 것, 바로 영적인 간음을 뜻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천하를 다 잃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를 줄 테니 심지어 너를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선한 자로 칭송받게 해 줄 테니 십자가 복음만 부끄럽게 여기라는 사단의 집요한 흉계를 깨트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정말 진지하게 자문(自問) 해 보십시오. 내가 혹시 사단의 조종에 놀아나는 음란한 신자가 아닌지, 내가 과연 사람과 하나님의 일 중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지 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 분 외에는 구원 받을 길이 없음을 확신하는지 말입니다. 혹시 교회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혼자서는 그렇게 믿기로 작정은 했는데 다른 사람 앞에는 그 길이 너무 독단적 배타적이라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그런 나를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제쳐두고,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런지요?
12/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