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것을 더 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身後)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전6:11,12)
여자 테니스계의 철옹성 같았던 나브라틸로바를 신예 만들리코바가 꺾었을 때 한 기자가 그 감상이 어떤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큰 승리는 그것을 위한 모든 고생과 연습들이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전 세계를 소유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그 느낌이 얼마나 갔는지 물었더니 “한 2분쯤”이라고 답했습니다.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었다면 엄청난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흘렸던 땀과 눈물은 그야말로 가치 있고 흘릴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 최대의 기쁨도 잠시 잠깐입니다. 세계 정상에 올랐다면 며칠을 뜬 눈으로 새울 것 같은데도 2분 정도라니 너무 허망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비등해져 어느 정도 예견된 승리라 하더라도 너무 짧습니다.
실제 정상에 오른 자의 고백이 그렇다면 단지 그런 순간적 기쁨을 위해 그렇게나 고생을 하다니 너무 허망하지 않습니까? 또 일단 정상에 오르면 수성(守成)하는 것이 더 힘들고 고된 싸움이 될 것도 빤합니다. 과연 그 짧은 승리의 쾌감을 위해 젊음을 다 바쳤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영악하고 이기적입니다. 세계 챔피언으로서 명예와 자연적으로 따르는 부가 이 땅의 삶의 평생을 안락하게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는 지금 그런 삶은 신후에 즉, 죽은 후에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으며 누구도 그에게 고할 수도 없다고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죽음으로 완전히 끝날 것을 죽어라고 소유하려 드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이냐고 탄식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꿈꾸는 자는 남들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삶의 기쁨, 의미, 가치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오직 사람들의 갈채만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엄밀히 말해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대신 살아 주는 인생입니다. 그러니 항상 진정한 자아 충족이 없으며 갈급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로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으면 부귀영화가 최우선의 가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존재가 영속된다면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갈채는 더 이상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영원을 주관하는 이의 관심이 과연 무엇인지에 가장 먼저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후 심판이 두려워 이 땅에서 선하게 사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죽음 이후를 진지하게 따져보고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심각하게 숙고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는 더 이상 사람의 갈채를 받으려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고 그분이 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그런 소망이 살아 있고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해 그렇게 헌신하는 한 성령님께서 반드시 거룩하고 신령한 인생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그 은혜가 너무 귀해 주위에 나누고 싶어집니다. 정신적인 기쁨이라면 순간을 지속하기 힘들지만 그 영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시기에 순간순간마다 채워지는 기쁨이 영원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정과 갈채에는 아무 관심이 없되 도리어 이웃의 안녕과 생명을 걱정하게 되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되지 않고는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가 하는 일들이 그들 인생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가 없기에 예를 든 대로 그런 큰 승리 뒤에도 단 2분간의 만족밖에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더 신비한 인생의 비밀은 따로 있습니다. 세상사람 가운데도 죽음 이후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는 많습니다. 아주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종교성을 지니고 정말 평생을 두고 수도 정진하는 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소의 삶도 이웃을 위해 바치며 아주 의롭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전 평생을 걸고 씨름한 결과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십자가 복음에 대한 전도의 말을 들었고 심지어 스스로 심도 있게 예수님에 관해 연구를 해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죽어도 싫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의 갈채에 목말라 하고 오직 그 목적을 위해 살고 싶은 것입니다. 수양하며 의롭게 산 자로 신후에도 사람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 비해 신자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지성, 종교성, 도덕성 모두 그들에 비해 형편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아니 죽음 이후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 소중하게 체험되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택하시고 먼저 찾아와 사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는 날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는 자입니다. 초자연적인 초월의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이 땅에서, 나아가 신후에도 사람들의 갈채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또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낼 수 있기에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평생을 두고 감사할 일 아닙니까?
5/1/2007
천국을 체험하게 해 주시고, 변화산을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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