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5:16,17)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구원관은 너무 단순한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싱겁기까지 합니다. 그러다보니 작금 이 구원이 너무 쉽게 마치 바겐세일 하듯이 소개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에는 구원을 아무에게나 싸구려로 팔아넘긴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65: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그는 자기 죄악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주께서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단순한 원리는 바로 이 같은 고백이 전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 죄악을 이길 수 없다면 하나님이 용서해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럼 모든 자를 무조건 다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용서나 구원에 아무 가치와 의미가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짓든 모든 자를 다 용서해 준다는 것은 다른 말로 어느 누구도 용서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집 안에서 무슨 난장판을 벌려도 부모가 무조건 다 용서해준다면 용서가 구태여 필요 없으며 또 아이도 따로 용서를 구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무조건 용서해 줄 수 없으니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조건을 단 것입니까? 아니면 그 죄를 회개하는 자만 구원해 주기로 한 것입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것같이 보이지만 이 또한 싸구려 구원으로 전락할 소지가 있습니다. 믿기로 한 결단이나, 자기 죄를 회개한 그 자체로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재삼재사 말하지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자 근거입니다.
믿음이나 회개가 구원의 전제가 되면 그것으로 죄 사함의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를 이기고 그 죄과를 처리한 셈입니다. 하나님도 단순히 믿음과 회개의 진정성만 보고는 바로 구원 허가서에 사인해준 셈이 됩니다. 그러나 믿어보려 결단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는 데 가식으로 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는 구원 얻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자기 죄를 고치려 드는 회개와 아무리해도 그 죄가 고쳐지지 않더라는 회개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스스로 죄를 고칠 수 있고 또 고쳐 나가겠다는 회개인지라 자기 죄를 자기가 이길 수 없더라는 다윗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없습니다.
후자의 회개는 다릅니다. “나는 죄에게 꼼짝도 못하고 당했다. 너무나 자주 무참하게 당했다. 수도 없이 많이 회개해봤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더라.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니 또 동일한 상황이 닥치면 손 한번 못 써보고 어이없이 또 죄를 범했다. 급기야는 습관이 되었고 오히려 죄를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너무나 부끄럽고 말이 안 되어 치를 떨었다.” 처절하게 죄를 이겨보려 몸부림 쳐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완전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체험이 있은 후에 저절로 따라 나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첫 메시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단순히 행동, 말, 생각으로 지은 윤리적 죄를 반성하고 고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마음 전부를 천국 지향적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생의 가치관을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완전히 바꾸라는 요구로서 그러기 위해선 죄를 스스로 회개하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을 바꿔먹어야 합니다.
불신자도 죄를 회개하며 고치려 노력합니다. 단순히 죄를 회개한 것으로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는 얼마든지 자기 죄를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자이며 신자는 철저하게 그 반대인 자입니다. 자기에게 죄악을 이겨낼 힘이 아예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없이는 자기는 천만번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에서 절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고 또 그런 고백을 한 것은 분명히 본인이지만, 자기 스스로는 도무지 그런 고백조차 할 수 없었다는 인식도 따라야 합니다. 스스로 죄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죄가 자기를 무참하게 이겼다는 고백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불신자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으로는 스스로 십자가 앞에 항복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간섭을 받은 신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런 깨우침조차도 하나님의 너무나 큰 은혜였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이 죄악을 이길 수 없었다고 고백한 후에 바로 이어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오직 주님이 자기를 택해서 은혜를 주셨기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며 또 그런 은혜에 든 자만이 참으로 복을 받은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본문에선 바울이 또 뭐라고 예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은사(공짜로 주는 구원의 선물)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아담으로 인해 모든 자가 죄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고 또 예수로 인해 그 많은 죄인이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대조한 것이 근본 뜻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인류 전체로나 개인적으로나 많은 죄를 범한 후에라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그 온전한 효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죄가 누더기처럼 온 몸에 잔뜩 붙어 있어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떼어내려야 낼 수 없을 만큼 많다고 고백하는 자를 구원해주십니다. 그 수많은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이 흘린 모든 피로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 모든 죄와 당신의 생명을 맞바꾸었습니다. 그분의 핏 값으로 사신 구원이 어찌 단순히 인간의, 그것도 죄에 빠져 있는 자의 믿음과 회개로 취득될 만큼 싸구려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도, 본인이 자기 죄를 무거운 짐이라고 처절하게 깨달아 그 짐을 더는 것이 너무 수고스럽다고 여기는 자를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는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의 진리 앞에 자신의 그 더럽고 추하고 부끄러웠던 모든 것을 바쳐서 완전히 항복하고 그분의 이끄심대로 따르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나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오직 예수로 인한 것이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의 외형적 변화가 절대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과 매일의 삶과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 때까지 자기가 품고 있던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엎어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과 이유를 도무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기는 이전의 불신자 시절과는 전혀 달라졌는데 그 일이 오직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택하셔서 먼저 찾아와 주신 일로만 말미암았다는 체험적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죄를 내가 도무지 이길 수 없고 죄에 완전히 졌다는 처절한 실토입니다. 또 그 죄를 이길 수 있고 해결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날마다 순간마다 변함없이 동일해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이라고는 아예 없습니다. 모두 죽은 시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가 바겐세일로 팔린다면 교회와 신자는 권능이 줄어든, 아니 없어진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5/2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