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않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네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햐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1-8)
이사야가 하나님이 현현(顯現) 하신 모습 앞에서 엎드려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는 온전한 실체는 아니지만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분명히 만나 뵈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심지어 비록 화저를 통해서였지만 신체적 접촉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 뵌 그는 결국 선지자로 헌신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하신 곳은 항상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그 척박한 바위산마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스랍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가득 찬 이 땅에 와서도 주님이 계신 곳이기에 거룩하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마침 스랍의 문자적 의미는 “불타는 자들”입니다. 주님 곁에서 죄와 더러움을 불태워서 주님의 거룩성을 보존하는 천사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것들과는 공존할 수 없는 절대적 선이라 스랍의 도움이 사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께서 소멸하는 불이라 죄 많은 인간이 그분의 실체를 대면하면 바로 죽습니다. 따라서 스랍은 본문에서 보듯이 오히려 그분을 대면하게 되는 인간의 죄와 더러움을 불태워서 죽지 않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사야가 소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여 의지적으로 결단한 계획은 비록 의롭고 신령한 것이라도 비전(Vision) 내지 소명(calling)이 아닙니다. 그럼 자신이 세운 계획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은 신비적 초자연적 체험이 하나님과 대면했다는 사실을 결코 입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사야가 성경에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은 것만 기록했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혼자 공상에 빠지거나 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면 초감각적 현상을 지각할 수 있고 심지어 사단도 인간으로 그런 현상을 겪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가장 먼저 그분의 거룩함을 너무나 온전하게 맛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분의 거룩과 대비해 이 땅이 얼마나 더러운지 절감합니다. 그러나 그 더러움은 단순히 도덕적인 죄악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말이 부정한 백성 중에 자기 입술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도덕적 부정이라면 몸이 부정하다고 말했어야 함에도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망령되이 일컫거나, 그분의 계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추하고 참혹한 형편을 발견하지 못하고 야심찬 계획만 앞세우면 하나님과 대면이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대면한 자는 반드시 자신부터 얼마나 죄에 찌들어 있는지 깨닫게 마련입니다. 도덕적 죄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 정욕대로 인생을 꾸려 나가려 했던 죄를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특정인을 불러서 당신의 일을 맡기려는 절차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사야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분이 직접 그 죄를 사하여 주어야 합니다. 부름을 받게 된 자도 하나님의 거룩 앞에 자신의 죄성을 철저히 깨달아 회개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또한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기 위해 그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을 때는 단순히 자신이 주님께 택함을 받아 종으로 세움을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자신의 모든 것을 다시 새롭고 충만하게 변화시켜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영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말씀 보고 기도 하면서 마음에 깨우침을 얻은 것과는 전혀 다른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 곁에 계셔서 온전한 육성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교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말하자면 부름 받은 자의 몸이 속해 있는 곳은 여전히 부정한 이 땅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주위가 완전히 거룩한 빛으로 감싸여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꼭 밝은 조명이 비취지는 않아도 최소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즉 거룩한 영역으로 변했고 그 안에서 주님이 나를 일대일로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알게 됩니다.
예컨대 한 겨울에 추위를 전혀 못 느낄 정도로 주님과의 영적 대화에만 한 동안 몰두하게 된다든지, 그 공간에 있는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으로 얼어붙어 있는 것 같고 오직 주님과 두 사람만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또 그 대화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잠시 시공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주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했으니 당연히 초자연적, 영적인 영역인 것입니다.
물론 당시로선 앞으로 맡기실 일의 구체적 내용까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나를 쓰실 것이라는 확신은 듭니다. 그래서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함과 또 두렵고도 떨리는 경외함으로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던져 헌신하게 됩니다.
모세처럼 몇 번이나 주저하고 사양한 것은 예외에 해당합니다. 모세로선 자기를 하나님이 80년이나 외면했다고 여겼고 또 자기 신분이 애굽으로 돌아 갈 수 없음을 따진 것입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너무 어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주님의 음성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물론 몇 번의 주저와 갈등하는 예비 단계는 있을 수 있지만 선지자로 확실하게 세움을 받을 때는 본인이 정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때는 완전한 성령의 교통 안에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와 인간의 자발적 순종이 동시에 이뤄집니다.
이사야도 화저가 자신의 부정한 입술에 닿자 여호와가 자신의 죄를 직접 사해주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도덕적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한 성자로 변모시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입술을 깨끗케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의심, 불만, 부인하는 죄를 없애준 것입니다. 두 번 다시는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 대해 불신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일말의 주저함 없이 자기 남은 일생을 완전히 바칠 것이라는 확고한 결단을 갖게 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세우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아직 그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대신 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하여 병이 낫고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 받은 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처럼 입술이 부정한 자가 이제 깨끗케 되었으므로 아직도 말이 부정한 자에게 입술을 불태우는 주님의 은혜를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먼저 받은 자가 죄 사함의 은혜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한다는 담대함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므로 자연히 권세가 붙거나, 자기 임의로 하나님의 종임을 강조해 말씀이나 행동에 권위를 앞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맡은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철저하게 깨달았기에 주님 앞에 항상 정말로 겸비하게 서게 되고 또 그런 자에게는 주님이 성령 안에서 말씀과 행동의 권위를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일에 대한 온전한 확신과 열정과 소망으로 충만케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연약한 기질도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게 하고 오히려 그 일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과 권세의 모습으로 바꾸어줍니다. 베드로 같이 학문이 없고 성격이 급해 실수만 했던 자가 오순절 날 담대하게 설교하여 삼천 명을 회개시키듯이 말입니다. 이사야도 처음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는 자기는 죽게 되었다고 낙심에 빠졌으나 마지막에는 주님의 부르심에 담대하게 응했듯이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비전 내지 소명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발견하여 인간의 참혹한 형편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 특별이 인간 세상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 소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는 반드시 세상 사람과 자신이 얼마나 망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발견한 신자라면 그 실현하는 구체적 모습은 각기 다를지라도 반드시 세상에 보냄 받은 자라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비전이란 자기가 하는 일과 인생의 목표를 크게 잡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의 일과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일과 목표로 바뀌는 것이 소명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자신의 영적 안목을 하나님께로 크게 열면 하나님이 그 눈을 사단에 묶여서 입술이 부정하게 된 세상과 사람들 쪽으로 크게 열어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 생각으로 사고의 폭을 넓히거나 행동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로 불쌍한 영혼들에게 관심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소명이자 비전입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윌리암 캐리는 성경과 손으로 그린 세계 지도를 항상 갖고 다녔습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에게 온전히 몰두하였고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지상 명령을 생각하며 지도 속의 끝없는 수평선 너머로 갈 것을 항상 꿈꿨습니다. 결국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세계 선교로 나섰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의 영적인 시야가 너무 좁지 않습니까? 당장 중국이나 이슬람 선교사로 나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 친척, 친구, 친지 등의 현실적 문제만 붙들고 기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과 이 땅 전부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입술이 얼마나 부정하며 이 땅이 얼마나 죄악의 피로 물들어 있는지는 관심이 없거나 잊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단의 농간에 대부분의 신자가 놀아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당신 대신에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자를 말입니다.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자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나눌 자를 말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바로 당신을 향해 계속해서 애타게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신자가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계속해서 듣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의롭고 신령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영적인 안목이 그분 쪽으로 향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큰 뜻을 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적 현실적 심지어 도덕적 종교적 업적을 크게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 전체를 두고 눈물을 흘리시고 또 인류 전부를 두고 안타까워하시는 그 크신 긍휼을 우리 마음에 최대한도로 크게 담으라는 것입니다.
5/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