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우리말 표현은 그 의미가 참으로 애매해 성경 특별히 로마서에서 뜻하는 원래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말 문법상 완료나 수동형 등이 정확히 잘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 되느냐 아니면 구원을 얻은 ‘결과’이냐를 잘 분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선 마침 그 둘을 잘 비교해볼 수 있는 우리말 표현이 나옵니다. 2절에서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서 있는(stand by faith)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합니다. ‘믿음으로’에 ‘서’가 붙어 있고 떨어져 있고의 차이입니다. 단순히 철자 하나의 띄어쓰기에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전자는 믿음이 조건이 되어서 은혜에 들어감을 얻게 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게 된 것이 먼저이고 그 후 그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된 원인은 믿음 대신 다른 것이어야 하는데 성경은 “그(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구원을 얻게 된 조건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믿음은 그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서 서 있은 데에 필요한 조건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1절에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마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믿음이 조건이 된다면 우리말 표현으로는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의롭다하심”(누군가 의롭다고 해주어야 함)을, 또 “얻었은즉”(누군가 또 그 의롭다하심을 주어야 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그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또 1절에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바로 구원인데 그 조건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 바로 앞 구절에서도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사해지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사죄와 중생은 오직 십자가 공로뿐이지 인간의 공로라고는 비록 믿음이라도 단 한 치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하게 믿으면 되지 왜 자꾸 따지느냐고 의아해하는 신자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무신론자 철학 교수가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고 칠판에 “God is nowhere!”라고 크게 썼습니다. 그러자 한 크리스천 학생이 나와서 글자는 그대로 두고 띄어쓰기만 고쳐서 썼습니다.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를”과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를”은 철자는 똑같되 띄어쓰기 하나만으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안 따지고 넘어갈 수 있습니까?
믿음이 조건이 되면 필연적으로 믿음의 질과 양이 문제가 됩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인지 아닌지 일종의 카트 라인이 생깁니다. 따라서 구원의 최종 결정권이 인간에게 달렸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아닙니다. 나아가 믿은 후에도 은혜를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가 순전히 인간의 믿음의 질과 양에 달려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믿음의 질과 양을 자랑하게 되는 우스운 상태가 발생합니다. 어떤 이는 믿음이 좋아서 구원을 얻었고 또 지금도 은혜를 많이 받고 있지만 저 사람은 믿음이 좋지 못해 구원조차 얻지 못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생깁니다. 구원의 은혜든 구원 이후에 주시는 은혜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렸을 뿐입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오직 그분의 뜻에만 달렸기에 신자의 믿음은 얼마나 많이 그 주권을 발견하느냐만 좌우하지 믿음으로 그 주권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을 얻은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되려면 구원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먼저 한 죄인을 찾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정말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원에 올라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기적적으로 낫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죄에서 구원입니다. 도저히 자기 죄를 스스로는 어쩔 수 없더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는 은혜입니다. 자기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백시키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대신 십자가에 죽는 방법이 아니고는 자기에게 구원의 가능성이라고는 절대 없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케 하는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자기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죽을 몸이었다는 것을 절감케 하는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스스로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믿으려는 꿈이라도 꾸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롬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5;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과 철천지원수 사이였습니다. 오직 자기 공로로, 즉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어떻게 로마의 한 사형수 죄인에게 고귀한 구원을 의지하느냐고 길길이 날뛰었던 자 아닙니까?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진짜 영육 간에 완전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주님의 완전 일방적인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대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먼저 찾아오기 전에는 그는 실제로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기는 했지만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전의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로선 엄청난 표현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배, 선행, 기도, 구제, 금식, 십일조 등 종교적 행위로선 최고였던 자가 하나님과 원수였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은혜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의 주권대로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 사랑 없이는 어떤 지성적, 도덕적, 종교적, 심지어 영적으로 위대한 인간도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이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칭찬을 많이 받고 또 세상에서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겨도 그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서 이 죄인 아니 그분과 원수 된 나에게 일방적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믿음은 있어도 말입니다. 이 믿음은 당연히 구원이후에도 도저히 그분 외는 바랄 것이 단 하나 없으며 나아가 자기를 앞세울 자랑이라고는 단 하나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오직 예수만이 내 인생의 목표요, 가치요, 의미요, 전부가 된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신자가 누릴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가 현재 이루고 있어야 할 상태는 하나님과의 화평이고 앞으로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이 있어야 할 주소는 어디입니까? 믿음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본문이 말하고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단순히 그 은혜 안에 자신이 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나님 당께서 내 대신 죽으신 그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신분, 위치, 소속, 특권을 재삼재사 확인하여 더 이상 세상과 인간의 일로 흔들리지 않고 환난 가운데도 기뻐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소망하는 데에 믿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라면 믿음으로 은혜를 더 많이 받아 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풍성하게 넘치는 은혜 안에 이미 자신이 서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정말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한지? 아니면 여전히 자기 믿음의 공로로 인해 더 보태어져야 할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아쉬운지? 선뜻 대답하기 힘듭니까? 그럼 바울과 베드로 같은 사도들은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5/8/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