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사52:13-15)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인류 역사는 BC와 AD 둘로 나뉘었습니다. 8세기(672/673-735) 영국의 역사가 Bede가 자신의 역사기록에서 최초로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한 역사가가 나누었지만 아무 반발 없이(최근에는 조금 있음) 통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탄생, 정확히는 그분이 이 땅에서 이루신 일이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했다는 점을 널리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마침 본문은 역사가 그렇게 나뉘고 나아가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전파되지 않았던 것을 보았고 듣지 못한 것을 깨달아 놀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없었고 인류가 처음 듣는 메시지였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한 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신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유독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듣게 되어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 오시기 전 2천 년간이나 그분의 너무나도 크고 직접적인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나아가 이방인들도 자기들 신에게 열심히 빌다보면 복 받을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만 놀란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놀랐고 두 번째는 입이 봉할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놀라는 것은 기대치를 크게 뛰어넘을 경우지만 아예 입이 봉해지는 것은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말하자면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놀란 이유는 하나님의 종의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당연히 아주 장엄하고 근사한 모습이어야 하는데도 얼굴이 상하고 그 형색이 일반인보다도 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후에는 열방이 입을 봉할 정도로 놀랬다고 합니다. 메시야라고 자칭하는 자가 골고다 십자가에 무참히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으로 끝이 났다면 입이 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왕에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한 자가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하나도 이상할 것 없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습게 알고 멸시했던 자가 사흘 만에 그것도 생전에 본인이 예언한 그대로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이야말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활한 자가 없습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죽은 자를 살리는 표적을 보이고 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고 스스로 예언한 후에 그랬습니다. 생명을 직접 주관하는 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통사람들보다 더 형색이 못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자가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생전에도 사람들이 놀라고 입을 봉하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귀신을 쫓았습니다. 당시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희생물을 바치며 그저 달래기에 바빴던 사단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습니다. 이 또한 아무도 그렇게 못했던 아니 꿈도 꾸지 못했던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폭풍우도 말씀 한 마디로 잠재웠고 나면서 봉사 앉은뱅이 중풍 나병 등을 고쳤습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그분이 전하는 말씀도 전혀 처음 듣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했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요, 형제를 향해 분노를 품으면 살인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자는 천국에서 멀고 오히려 죄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들을 하나님이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혈통, 가문, 지성, 신분, 종교와 아무 상관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라도 자기에게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역과 말씀과 심지어 그분이 부활한 사실조차 그분의 제자들까지 포함해 사람들은 한갓 신령한 초능력자의 매직으로 치부하려들었고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당신이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신을 그 부활을 믿는 모두에게 부어주어서 이제는 그 제자들이 당신이 했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역사상 초유로 신전에 종사하는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들도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간 역사를 둘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분은 창조 때부터 영원까지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했고 하고 있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죄에 빠진 자를 사랑해서 이 땅에 비천하고도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직접 오셨다는 것은 도무지 인간이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랑할만한 자를 사랑해주러 온 것이 아니라 인간 상식으로는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창기나 세리 같은 천하의 죄인들을 사랑해주러 온 것입니다.
더더욱 입을 봉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런 사실을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삼년이나 따라다니며 배웠던 제자들조차 성령 세례를 받고서야 그분이 생전에 했던 사역, 전한 말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그분께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했더니 자신의 죄가 깨끗이 씻음 받고 처음으로 온전한 평강과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분께로 나아가는 모든 인생이 그분으로 인해 그 전과 후과 확연히 뒤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인간 역사도 둘로 나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컨대 예수님 바로 그분이 경이자체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적을 일으켰고, 전파하는 말씀도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역사는 필연적으로 둘로 나뉠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의 승리가 역사를 둘로 나뉘게 했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로 그전까지 닫혀 있던 구원의 길이 모든 죄인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성령의 임재로 이제는 모든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르고 그분이 했던 일을 그대로 아니 더 크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약하고 무지하고 무능한 인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영으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동행해주는 일이 일어났는데 어찌 역사가 둘로 나뉘지 않겠습니까?
이제 신자는 전과 전혀 다른 새 시대에 살게 된 것입니다. 새 시대에 걸맞게 살아야 하고 새 시대를 이어갈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예수님 오시기 전의 뒤로 돌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신자야말로 역사를 둘로 나눈 목적을 수행하는 새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분이 하신 대로 오직 골고다의 십자가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 또한 사람들로 놀라서 입을 봉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듣고 보지 못한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도 남들보다 상한 얼굴과 형색을 띄고 말입니다. 신자는 아무리 현실적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오히려 하늘에서 주는 평강과 위로와 권능에 사로 잡혀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무슨 일이든 기도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당장에 현실적 보상이라고는 전혀 따르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사는 모습을 저들이 보고 놀라야 합니다. 정말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도 그 방식이 너무나 부럽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전하는 말씀도 단순히 도덕적 수양을 하고 현실적 축복을 받으라는 식의 메시지와는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전해야 저들이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놀랠 것 아닙니까?
그러려면 세상의 권력자, 도덕군자, 종교인들이 아니라 죄와 고난 가운데 빠져서 정말 힘들어 하는 자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왜 신자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언제 어디서나 그분이 함께 해주신다고 했겠습니까? 모든 열방의 입이 봉해질 정도로 놀래주라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형통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부러워는 해도 놀라지는 않습니다. 자기들 예상과 전혀 다르고 생전 처음 듣는 말씀을 들어야만 놀랩니다. 놀래주는 길은 얼굴이 상했는데도 항상 기뻐하며 현실의 축복이 아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길과 살았던 방식과 인생을 마감한 모습을 닮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지금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자기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고 놀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들과 똑 같거나 조금 나은 정도라 전혀 놀라지 않고 있습니까? 요컨대 얼굴이 상해 있는데도 기뻐하고 있습니까? 오직 영원을 향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신자들도 그러하듯이 이 땅의 지금 당장의 문제를 위해서만 기도하고 있습니까?
5/17/2007
한편으로 너무나 편하게 주님을 믿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주님이 걸었던 길과 살았던 방식과 인생을 마감한 모습을 닮아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 위해 아낌없이 생명을 드릴 수 있기를 사모해 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