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랑(2) (눅23:39-43)

조회 수 475 추천 수 28 2011.04.30 01:04:03
                      
▣ 인간이 감당해야 할 사랑의 국면

지난주에는 ‘사랑’이라는 용어의 의미, 특히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가페는 ‘인간이 실패한 율법준수보다 더 지키기 힘든 것이며 자기를 포기하고 지렁이가 되지 않는 한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공부하고 난 후의 소감은, 우리의 영을 유쾌하게 하기보다는 어쩐지 내리누르는 듯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록 아가페에 대한 진정한 정의에 근접한 해석이었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끝나면 유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담만 주시고 그만두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연설명 드린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의 몫이다’라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실 인간은 아가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도 ‘하나님이 잘못 요구하고 계신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허튼 것을 요구하시고 결국 실패하고야 마실까요? 아닙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반드시 성공하십니다(이미 성공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시발점(모퉁이돌)인 갈보리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 이루셨지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사랑의 결과일 뿐이지요. 지난주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럼 이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사랑의 의미’만을 따진다면,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바로 이점에서 묘한 현상이 발생됩니다. 즉, ‘내가 구원을 위해 한 일이 없으니 나는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라고 불안해하거나, ‘내가 구원받은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자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구원을 확신치 못하는 ‘구원불신주의’나 구원을 자만하는 ‘구원공로주의’는 모두 좌 또는 우로 너무 많이 치우친 극단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사랑)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이루어야 할 부분은 단연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의지도 목적도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천국건설이라는 태초의 목표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 혼자만으로 건설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일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랑의 첫 단계는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구원받은 강도에 관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의 하나이기도 하구요. 결말은 ‘강도의 구원’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 편’입니다.  

우리는 강도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떤 학자는 전승을 인용하면서 이 강도가 예수님 출생 직후 애굽으로 피난 갈 때 광야에서 요셉가족을 강탈했던 강도떼에 속해 있었으며 동료를 설득하여 예수님의 생명을 살려준 공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공로로써 구원 얻을 수 있다면 멸망 받을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이 강도의 일생을 추리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를 알 수는 없으나 정황으로 본다면 아마 장년에 이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0세든 40세든 그 세월동안 강도가 한 일은 살인, 강도, 강간, 탈취, 사기, 속임수 등등이었을 것입니다. 혹 홍길동처럼 빼앗은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나쁜 일, 즉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일만 행하였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세가 결정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천국행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에게 뭐 잘한 것이 있다고 천국을 허락 받습니까? 성경이 무어라 말씀하시더라도 예수님의 결정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강도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옥행이 당연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공로주의적 사고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강도에게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생각은 지금도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온 평생을 죄악으로 물들이다가 숨지기 직전, 정말로 잘한 선택 한 가지가 그의 천국행을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은 것(42절) -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remember me :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가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의 행위가 구원했습니까? 그의 다짐이 구원했습니까? 아니요. 그에게 이런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구원은 단지 예수님의 결정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엉뚱하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시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해하기 쉽지 않으나 그것은 ‘강도가 예수님께 붙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에 있습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는 위로인 것입니다.  

이 강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강도와 비교될 수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에 의해 제자로 선택받은, 구원의 백지수표를 지닌 자였지요. 유능했습니다. 또 비록 마음속이 정리되지 않았을망정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도적질 한 적이 없습니다. 행위적으로 보면 유다가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지옥 갔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물론입니다. 그러나 깊숙한 영적 비밀 가운데 하나는, 유다가 비록 예수님을 팔았다 해도 만약 그가 회개하고 돌아왔더라면 그도 구원을 잃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입니다. 그는 후회까지는 했지만 결국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처음에는 예수님께 붙어 있다가 나중에 떨어져 나갔고, 강도는 처음에 떨어져 있다가 나중에 붙었다는 점입니다. 단지 이것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지은 유일한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누구 편’이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성경 곳곳에 이러한 예가 무수히 나옵니다만, 구약에서 두 분만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먼저 아간입니다(수7:1-26).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며 그것도 보통 집안이 아니라 유다 지파 혁혁한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 또 한 분은 룻입니다.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방민족인 모압 여인입니다. 얼떨결에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붙은 것이 천국의 보증수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떨어지느냐 붙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편이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았습니다.
  

▣ 사랑의 더 깊은 단계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강도는 구원받기는 했으나 너무 늦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구원받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냥 먹고 마시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에덴동산의 관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직접 통치하시기보다는 인간을 대리자로 하여 통치하시기로 태초에 이미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동역(同役:work together)의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천국건설에 동참시키시겠다는 것임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에는 더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건설에 인간을 참여시키되, 결코 억지로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억지로(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인간을 억압한 상태로) 천국을 건설하는 것은 기계적 구원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거된 상태로 비교할 수 없는 상대인 하나님께 그냥 굴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천국에 만족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완전한 천국 - 그것은 무한의 자유의지를 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동참할 바로 그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를 ‘인격적 구원’이라고도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세계인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의존자입니다. 동화될 수 없는 존재론적 구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신으로, 친구로 여겨주셨습니다(아브라함과 모세 등). 아담의 실패로 말미암아 다소의 수정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승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 계획은 멋지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살펴본 강도는 분명히 구원받았으나, 아쉽게도 천국건설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즉시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강도에게는 천국에서의 상급이 없을 것입니다(그렇다고 상급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최고의 상급은 구원이니까요). 어쨌든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마지막 요구는 배수진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받은 자라고 선포하십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로서 인간이 참여할 영역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무 공로나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분명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모습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죄 의식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뭐 그러냐?’는 것이지요. 그럴듯하지만 이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우린 그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처럼 공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는 조금 죄송하지만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적 비밀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그것은 ‘배수진 믿음’입니다. 구원은 어차피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의 행위(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는 구원 자체에는 전혀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더 깊은 교제를 위해서는 변화된 우리의 삶(행위)이 요구되지만 최악의 경우 이것이 없다해도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원 취소의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게 뭐냐구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나 데마처럼 말입니다. 이 경우가 아닌 한 우리는 안심해도 됩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든, 강도 같은 구원이든, 구원은 구원입니다. 이것이 배수진 믿음입니다. 배수진 믿음의 진짜 뜻은 ‘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애인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시다’는 비밀을 깨닫고 이를 붙잡는 것입니다! 일단 안심하십시오.

구원받은 자로서 일상의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을 수는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요일5:16)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죄 의식에 사로잡혀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보다는, 염치없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책망을 듣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진면목은 아닙니다. 더 발전해야 합니다. 이 비밀은 야베스의 기도에서 발견됩니다. 즉,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동역하는 것’ - 이것이 아가페 사랑의 정점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현재 이 정상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붙어 있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너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다만 내게 붙어만 있어라’


▣ 잠시 숨고르기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는 죄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양심적인 결정이라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 외에,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단연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절하신 요구일 뿐 아니라, 주홍 같은 죄를 가지고 있다해도 끝까지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염치없음이 우리 신앙의 요체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비록 칭찬은 없었으나 그러나 분명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인 아가페에 대한 정리입니다. 아가페는 ‘비록 나에게 주홍빛 같은 죄가 있고 또 내세울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회개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 주시는 무한하고도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측면에서는 ‘그래도 내게로 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인간 측면에서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염치없더라도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차피 나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뻔뻔스러운 배짱(?)까지가 내포되어 있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런 것임을, 우리 생각과 다른 것임을 깨우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성숙된 삶을 사시기 바라며,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동역의 역할 미흡)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소망(배수진 믿음)만은 결코 놓치지 마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 후기 : 배수진 믿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가 가장 알기 쉬운 곳 중의 하나는 이사야서 43장일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인간 창조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임을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절대적 안심의 군거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5절에 가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누구를 위해서라구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죄사함의 문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때 죄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친히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절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건은 오직 하나 - 그냥 붙어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비밀을 깨우친다면 배수진 믿음이 얼마나 성경적 지지를 받는 참 믿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쌀로별

2011.05.04 20:22:00
*.234.16.126

많은 위로를 받고 갑니다 꼭 저를 위한 글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저를 위해서 몸소 지렁이(?)가 되어서 와주신 예수님께 꼭 붙어있어야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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