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신학적으로 목사는 다양하게 설명되곤 합니다. ‘로이’니 ‘포이멘’이니 ‘패스터’니 ‘클러지’니 하는 문자적인 설명을 염두에 두고, 그 의미를 성경에 비추어, 지루하게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인 노력은 유익이 별로 없고 또 한계도 지닙니다.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이제는 그만 접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목사가 강조될 경우 어찌 되는지, 축구공에 비유하여 한번 더 생각해 보고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로 하겠습니다.
럭비공은, 발로 찰 수 있지만, 주로 손으로 잡고 뛰기 때문에 고구마처럼 타원형입니다. 비록 어디로 튈지 몰라 허둥댈지라도 그래야 럭비의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공은 완전히 둥글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로 차서 골대 안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만약 축구공이 럭비공처럼 생겨먹었다면 발로 차는 경기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담임목사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보다 먼저 떠올라 버립니다. '○○○목사하면 △△교회, ▲▲교회하면 ●●●목사'라고 즉각 연상됩니다. 완전 자동적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담임목사가 곧바로 연상되는 교회 이미지는 어떤 축구공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바로, 뿔이 달린 축구공입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거대한 뿔이 하늘높이 솟아난 축구공 말입니다.
이런 공으로는 결단코 축구 경기를 할 수가 없듯이, 목사라는 뿔이 하늘높이 솟아난 교회로는 성경의 목적을 이룰 도리가 없습니다. 목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목사교라는 사교집단이 되고 말 뿐입니다.
교회는 목사라는 뿔이 절대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생명체입니다. 오직 성령님에 의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둥근 공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지금껏 '성경이 증거하시는 목자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는 허무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짓거리 같게만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의 말입니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호크마)는 성경에서 최고의 긍정적 가치를 상징하며 때로는 ‘주님’의 별칭으로 사용되기까지 합니다.
“미친 것”(홀렐라)은 ‘정신이상, 광기’를 뜻하고, “미련한 것”(사클루트)은 ‘어리석음, 우둔’을 뜻합니다.
“바람”(루아흐)은 ‘숨, 호흡’의 뜻으로서 ‘허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영’을 뜻하기도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혜(주님)를 알고자하는 열망이 엉뚱한 것에 이를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즉, ‘피상적인 거룩을 추구하는 행위의 허무함’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성직론’을 가장 성경적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장 인간적인 오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해 정도가 아니라 무저갱 나락과 같습니다. 가장 해로운 종교적 신기루입니다.
아주 가끔 만났던 먼저 깨우친 선각자들의 가르침과 성경을 대조해보는 방황의 기간(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을 통과하면서, ‘목사성직론’의 허구를 알았습니다.
이제는 ‘목사성직론’이 전형적인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가 되고 말았습니다. 몰랐을 때는 ‘목사가 일반 성도보다 중요하고 거룩하다.’는 망상에 속아 넘어갔지만, 이제는 과거의 목사성직론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속아온 세월이 한스러울 정도입니다.
수 천 명 수 만 명의 신자들을 거느리고 온갖 존경 다 받고 사례비 풍족히 받아 맘껏 쓰는 목사들, 자식에게 교회 물려주는 목사들, 어떤 행위도 면책특권이 주어져야 하는 주의 종이라 거짓말 하는 목사들, 여성도를 마음껏 농락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목사들, 형통복음과 번영신학의 노예가 된 목사들, 방언이나 환상 등 신비주의에 사로잡힌 목사들, 무한 존경과 대접 구걸하기에 여념없는 목사들, 아무 것도 모르는 목사들, 그리고 강하고 잘 난 목사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이런 목사들, 성경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잘못 알았던 지식과 상충되어 괴롭겠지만, 목사 직분이 여타의 모든 직분보다 거룩하다는 ‘목사성직론’의 족쇄에서 하루 빨리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적 목자상의 회복이 없이는, 참된 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현대교회의 목사는 무자비할 정도로 작아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아날 것입니다!
- 大尾 -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중간의 글들은 모두 생략하고 마지막 글로써 이 시리즈는 마무리하기로 하겠습니다.
그간 마음 언짢게 해 드린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염치 없지만...
앞으로는 묵상과 단상과 이의 등 가벼운 글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