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최고의 난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내노라.’ 하는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 나름대로의 명답이라고 내어놓고는 있으나 역부족인 듯합니다.
성경도 이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고 있는데, 세상의 설명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과연 인간을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인간론’을 다루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성경에 기록된 인간 관련 구절들만 찾아보는 수준으로 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인간은 진토요 벌레요 지렁이이며 구더기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원자재는 흙입니다(창2:7). 히브리말로는 ‘아다마’요 영어로는 ‘dust'요 한자로는 진토(塵土)라 합니다만, 그냥 쉽게 ‘티끌 또는 먼지’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성경도 증거하고 있고, 더욱이 이방종교에서까지 흙을 생명의 원천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겠으나, 그에 못지않은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물질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뭐 내놓고 자랑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이지요. 흙 분자 하나하나가 귀중하지만 절대적 가치를 지닌 물질이 아니듯, 인간 한사람 한사람이 귀하나 절대적 존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상대적 평가로 볼 때, 인간은 저열한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특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흙과 같이 별로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시22:6에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편의 1절(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으로서 당시 예수님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땅 위를 꿈틀꿈틀 기면서 사람에게 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존재인 벌레! 스스로를 보호할 아무런 특징도 가지지 못한 약한 존재인 벌레! ‘나는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무능력한 존재인 벌레! 자존자요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느끼셨다면, 우리 인간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인간은 벌레와 같이 별로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사41:14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한 가지 호칭입니다. 땅 속에서 꿈틀대는 지렁이,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썩은 흙이나 먹고 사는 지렁이, 정말 내세울 것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지렁이와 같이 별로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욥25:6절에는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가치가 이렇다는 선언입니다. 벌레라면 그나마 나을 것입니다. 구더기라니요? 배설물 속에서 살아야 하는 구더기, 파리로 변태된 이후에도 병이나 옮기고 조금도 환영받지 못하는 구더기,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은 존재인 구더기 - 인간이 바로 이 구더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더기와 같이 별로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은 인간을 ‘아침이슬과 같고 호흡과도 같은 허무한 존재’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어찌되었든 인간은 「흙이나 벌레나 지렁이나 구더기 같이 별로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변개할 수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 구약 신앙위인들의 자기 인식은 어땠는가?
먼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창18:27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다(I am nothing but dust and ashes)’라고 고백합니다. 티끌과 재와 같이 형편없는(쓸모없는) 존재라는 자기인식인 것입니다. 이를 신학에서는 신전의식(神前意識 : Coram Deo)이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모두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잃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까지 ‘나는 그래도 무엇이다(I am something)’이라는 교만이 싹트게 됩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한하고’(despise)는 히브리어로 ‘마아쓰’라 하는데 그 의미는 ‘싫어하다, 멸시하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의 뜻은 ‘자신의 존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아주 올바른 자기인식인 것입니다.
율법의 대표 모세입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일생을 3기(期)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아주 잘 표현한 것입니다. 첫째는, 40세까지의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굉장한 사람이다’(I am somebody)라는 시기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쓸모 있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살아온 기간입니다. 둘째는, 80세까지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I am nobody)라는 시기로서 광야에서 양떼나 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깨달은 기간입니다. 셋째는, 나머지 120세까지의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I am God's body)라는 시기로서 하나님께 붙잡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간 기간입니다. 역시 바른 자기인식입니다.
가장 용감한 사사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시자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기드온은 용감하다거나 큰 용사(12절)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겁쟁이입니다(11절). 다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크고 용감한 사사로 만들어 주신 것일 뿐입니다. 기드온은 이러한 사실(자기인식 내지 정체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에 감격하여 고백드린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자기 자신은 가난한 집안의 목동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인식으로 인하여 사울의 10년간의 핍박을 견디며 자기 손으로 사울을 징벌하지 않고 주님의 판단에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 대표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I am a man of unclean lips)’(사6:5)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자기인식인 것입니다. 이사야도 결코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나는 아이다(I am only a child)’(렘1:6)라고 말합니다. 민족 사랑이 너무 깊어 온 삶을 눈물로 이어간 위대한 선지자가 자기 자신은 말도 못하는 아이에 불과하다는 자기인식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적 자기인식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엘리야든 사람은 그 누구든 ‘무엇’(대단한 존재)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지도자든 오늘날의 이름 없는 성도든 모두가 ‘하나님 없이는 전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엄숙히 선포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 위상은 「흙이나 벌레나 지렁이나 구더기 같이 별로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조금도 잘 나지 않았으며 자랑할 것이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특히 저는 아래 두 구절을 좋아(?)합니다.
- 지렁이 같은 야곱 (사41:14)
- 죽은 개 같은 므비보셋 (삼하9:8)
나의 본질적 위상을 놓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