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생기지 않는 절대적 비결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 다른 곳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28:16,17)
어쩌면 신앙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냥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사실은 대부분의 신자가 그러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평소에 그 잘하던 성경 읽기와 기도의 페이스마저 처집니다. 처음에는 간절히 기도하다가도 기대했던 만큼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매사에 짜증과 불만이 겹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차지한 야곱 앞에 기다리는 것은 험난한 도피 길이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리는 재주는 있었지만 장막에 거하는 종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냥꾼으로 천하를 휘젓고 다닌 에서는 자연히 아버지 마음에 들었던 반면 마음이 여린 그는 엄마의 모성애만 자극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맘마보이인 그가 생전 처음 부모 품을 떠나는 바람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야곱이 그런 불안을 안고 하란을 향해 가는 도중 노숙을 하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으로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서 땅의 티끌 같이 많아진 자손으로 인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해주겠다는 언약을 재확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덧붙였습니다. 모든 신자가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참으로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특별히 심오할 것이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매사에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연유든 신자를 떠나면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신자가 힘든 일만 생기면 하나님이 혹시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그저 불안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는 물론 신자 역시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능한 인간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함께 아니할 것이라는 “의심” 자체가 문제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신앙에 의심이 든다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혹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부터 인정한 것이 문제라는 뜻입니다.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격려와 비교해보면 우리 염려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허락한 것을 다 이루면 떠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고 있는 동안에는 떠날 이유라곤 아예 없으니 혹시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더라도 전혀 불안해하지 말며 또 그 일들이 바로 약속을 이뤄나가는 과정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에게 받은 약속에 온전히 헌신하고 있다면 어떤 환난이 생겨도 불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약속이 없다면 자기 소원과 계획을 이루는 일이므로 혹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연스레 생길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환난 중에 겪는 불안의 실체입니다. 내 계획을 내 힘으로 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아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리라 무의식중에라도 인정하게 됩니다. 또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인정했기에 필연적으로 그 불안을 말씀과 기도로도 이겨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자가 어떤 환난이 생겨도 의심과 불안이 생기지 않는 절대적 비결이 나왔습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약속 안에 붙들어 매면 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와 언제 어디서든 동행해 주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럼 여전히 야곱에게 주신 약속의 전반부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주신 구체적 소명이 분명히 있기에 모든 것을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걸라는 뜻입니다. 자기 존재, 삶, 일생을 오직 하나님의 소명이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매사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그분이 이뤄나가는 과정이라면 당연히 어떤 환난에도 불안해 할 이유가 구태여 없지 않습니까?
예컨대 모든 신자는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사 리빙스턴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을 다 이룰 때까지 나는 불사(不死)다.”라고 큰소리 친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명에 사로잡힌지라 사자에게 두 번이나 물린 팔이 덜렁거리는데도 기어이 아프리카를 일주했지 않습니까? 사자 외에도 온갖 고난들이 쉴 새 없이 따랐음에도 말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6,12,20,21) 바울은 감옥에 갇힌 것 심지어 죽는 것도 자기가 받은 소명이 더 진보되는 일이며 또 그 일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확신이 없고서야 어떻게 환난 중에 오히려 더 기뻐하라고 선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가나안 땅으로 무사 귀환해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반면에 앞으로 어떤 환난이 닥칠지, 언제 돌아 올 수 있을지, 형의 마음이 언제 풀릴지, 아니 어떤 일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할지 사방은 완전히 막혀 막막했습니다. 하나라도 딱 부러진 해답 없이 초조, 불안, 염려만 계속 엄습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틀림없이 야곱은 꿈속에서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지 내가 지금 불안해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비록 내가 얕은 수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이제 나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분명히 들어와 있지 않는가? 당신께서 약속하고 당신이 변경 취소할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불안해하면 오히려 그분의 신실함과 권능을 믿지 못하는 불경죄가 아닌가? 약속을 받은 자가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두려워해야 할 큰 죄로구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말이 지리적으로 그 장소에 계셨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가는 곳마다 그 땅을 차지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신자가 자기 욕심대로 행하는 땅에선 함께는 가시지만 아무런 역사를 일으키지 않고 침묵하며 동행합니다. 신자가 기꺼이 소명을 이루고자 행하는 땅이라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차지하게 해주십니다. 때로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거치게 하더라도 말입니다. 야곱이 말한 “과연 여기”는 바로 하나님이 하신 약속, 다른 말로 신자가 받은 소명이었습니다.
왜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다짐을 받고도 “두렵도다”라고 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져 “이제는 두려움이 없어졌도다.”라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자기 앞날에 대한 염려가 계속 남아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앞에 두려워진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 그분께 두려워진 것입니다. 야곱 자신이 그 약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권적으로 이뤄나가시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야곱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사로 잡혀 의심과 불안을 떨치지 못했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로 그 힘든 일을 반드시 통과시킨 후에야 약속을 이루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다루시는 당신만의 신실하심, 세밀하심, 전지전능하심, 나아가 자기보다 더 큰 열심을 깨닫고선 자기도 모르게 소름끼치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만약 자기 쪽에서 앞으로 닥칠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헌신에서 나태해지거나 외면하거나 포기한다면 그 때 가서는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를 떠날 것이라고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 앞에 더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남은 인생 전부를 걸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도 모르게 쏟아낸 고백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이 신자와 항상 함께 한다는 보편적 진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아니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그는 정말로 꿈속에 보인 사닥다리를 타고 하나님이 계신 곳 바로 앞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그분과 일대일의 인격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면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객관적으로 보면 어떤 곳이었습니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야반도주하여 객지로 피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것도 마땅히 유숙할 곳이 없어 노천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자야 하는 형극의 길이었습니다. 언제 실현될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만 이불 삼아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정말로 받고 있는 신자라면 도저히 처해 있어선 안 될 그런 처지와 장소에서 말입니다.
세상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한 구석에서 절망의 나락에 빠진 나약한 한 인간과 천지만물을 영원토록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만남은 이뤄졌습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하신 언약을 매개체로 해서 당신께서 먼저 찾아와 주셔서 말입니다. 야곱은 맘마 보이로 집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했고 부모마저 사기 친 죄악에 찌들고 연약한 죄인이었지만 당신의 언약 안에 참여하려는 간절한 소망만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망 때문에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보좌 앞까지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전 안에 들어와 사는 것입니다. 그 약속에 자신의 일생을 걸고 구체적인 소명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자는 이미 하늘의 문을 연 것입니다. 비록 환경과 여건에 눈이 어두워져 육신적으로는 자꾸 초조 불안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영적으로는 구태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의심,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분의 약속을 붙들면, 다른 말로 자신의 소명에 자기 전부를 온전히 바치면 바로 그곳에 신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자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사닥다리가 즉시 세워집니다.
요컨대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자신을 통해서 이 땅에 드러나기만을 소원하지 않는 한에는 염려 불안이 절대 그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무리 말씀을 보고 기도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는 데에만 우선적으로 작동되는 법입니다. 인간이 제 멋대로 정한 탐욕의 소원을 이루는 데까지 동원되기엔 그분의 권능은 너무나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물론 그분이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던 함께 하시지만 탐욕에서 벗어나 당신의 거룩한 소명으로 되돌아오기 전에는 은총과 권능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혹시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심지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먹어 보아도 염려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과연 정말 내 존재와 삶과 일생을 전부 걸만한 소명을 받았는지부터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소명을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정말 내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이 나를 통해 존귀하게 되도록 간절히 소원하면서 말입니다.
이 외에는 염려를 없애는 절대적 비결은 절대 따로 없습니다. 이 땅은 아담의 원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죄악으로 부패 되었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사단에게 지배받으며 또 그 동안에는 신자더러 그 지배와 맞서 싸우도록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다면 우리 믿음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그분의 뜻을 실현 하지 않으면 염려가 없어지지 않을 것은 너무나 빤한 이치 아닙니까?
4/23/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