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가?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창29:20)
야곱은 살기등등한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그 집일을 도와주었습니다. 라반은 아무리 생질이지만 공짜로 일 시킬 수 없으니 야곱더러 원하는 보상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딸 라헬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7년간 무료 봉사해주겠다고 제의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또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에 칠 년을 정말 수일 같이 여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본질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강한 친밀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 남녀, 친구, 부자 등 인간관계에 따라 사랑도 달라진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랑에도, 말하자면 열정에 불타는 남녀 간에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기본 특성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행한 기다림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위해 참아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7까지 바울은 사랑의 특성 15가지를 열거했습니다. 그 중에 참는 것을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그것도 모든 것에 관해 오래 그래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마칠 정도입니다. 거기다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등도 상대를 배려해 참아내는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이것까지 보태면 15개 중에 9개, 즉 사랑의 거의 전부가 인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포용, 관용, 자비, 긍휼, 용서를 말합니다. 상대의 어떤 허물과 실수와 죄악도 품어주고 또 그로 인해 그간에 이뤄졌던 관계가 조금도 위축, 수정, 포기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 절대 빈말이 안 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참고 기다리되 반드시 ‘오래’와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합니다. 잠간 동안 일부만 참는 것은 사랑 없어도 누구나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나아가 상대의 허물과 잘못이 고쳐지지 않아도 끝까지 그래야 합니다. 장애인 부모가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상대에게 좋은 점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도 사랑 없이 아무라도 쉽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상대로부터 나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전혀 없을지라도, 아니 그런 것은 사전에 일절 의식하지 않고 도리어 상대의 유익만을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사랑이 추구하는 것은 그 관계의 질과 양에 상관없이 오직 그 관계가 이어지는 것뿐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상대 그 사람이 목표이지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모든 일에 오래 참지 못할 것 아닙니까?
사람이 목표라는 것은 상대가 단지 자기와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같이 없더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것만으로, 아니 미워하더라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장애인 아들을 둔 한 권사님이 똥오줌을 싸도 좋으니 오래만 살아주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참고 또 참는 것 그래서 그 관계가 이어져서 상대를 놓치지 않는 것을 최고, 아니 유일한 가치와 목표로 삼지 않는 한 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지 않으면 다른 가치와 목표에 관심이 분산되어서 참 사랑은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참 사랑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오직 당신께서 창조한 자녀이기에 천하의 죄인이라도 끝까지 구원하겠다는 소원의 표시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 자기 전부를 바치며 거듭난 신자는 그 온전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그분을 평생에 걸쳐 사랑하리라고 결심하고 또 그분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수시로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분에 대해 모든 것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일조차 하지 않으려 하면서 어찌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분의 허물, 실수, 잘못을 참아주지 못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분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허물과 실수와 잘못이 많이 있어 보입니다. 조금만 어렵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잘 이해할 수 없는 여건에 처하면, 사람들에게서 상처 받으면, 자기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저 하나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안달복달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 동안 기도, 예배, 전도, 헌금, 성경공부 등 그분께 갖다 바친 것이 많다는 것을 구실 삼아서 말입니다.
그분의 실수, 허물, 잘못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리석고도 무지한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그분에게 그럴 리는 절대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분에 대해 오래 모든 일에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또 정 그러는 것이 어렵게 여겨지거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아무리 오래 기도했지만 응답 안 되는 일도 야곱처럼 7년을 수일 같이 기쁨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진짜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기도해야 할 제목이 많아도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힘드니까 더더욱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 제쳐두고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소원을 묵상하고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그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말도 그분에게 하나 빠지지 않고 열납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에게 내가 바친 정성과 열심에 비례해 돌려받으리라는 기대 심리를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분 당신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해 준 것만으로 평생의 감사거리가 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목표도 바로 우리 자신이지 우리가 처한 환경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또한 보상보다 그분이 목표가 되지 않으면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지므로 내심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이뤄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또 인간끼리 참 사랑을 제대로 못한 죄책감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으로 대신 때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아 사후 검증이 안 된다고 해서 말로만 잘 할 수 있다고 쉽게 장담해선 안 됩니다. 그분을 진짜 사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눈물 흘리며 찬양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많은 재산을 처분해 헌금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예컨대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 일을 하느라 열심과 정성을 다했는데도 오히려 핍박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몰려도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내 죽을 몸에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진짜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힘든 일들이 자꾸만 겹쳐도 그분과 함께라면 야곱처럼 칠 년이 수일 같이 여겨져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여호와 궁전의 문지기로서 하루가 세상에서 군왕으로 천 날 보다 소중하고 귀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 붙잡혀 있음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큰 다른 기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기쁨 없이는 아무리 찬양, 기도, 예배, 말씀, 전도, 교제를 뜨겁게 해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끼리 기독교라는 종교의 사랑 놀음을 열심히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가 참 사랑을 실행하기엔 솔직히 너무 어렵습니다.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우리의 실체를 철저하게 깨달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그 가난한 심령을 붙들고 통곡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 진토 같은 체질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 덧입혀 주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참 사랑을 시작할 방도는 없으며 준비조차 전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많은 신자가 그러듯이, 아니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치듯이 하나님 제가 이 만큼이나 당신을 위해 열심을 내었으니 그에 상응하도록 제게 채워주시면 그것으로 주위를 섬기겠다는 서약은 정말 사단의 장단에 놀아난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랬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심한 꾸중을 들었지 않습니까? 로마를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쳐 주시면 이스라엘을 잘 사랑하겠다고 했다가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악에 빠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기다리고 참으셨던 그 긍휼은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이 우주 전체에 오직 유일한 참 사랑입니다. 신자가 바라고 추구할 것은 오직 그 사랑 안에 영원토록 풍성하게 잠기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심지어 신자마저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주시는지 철저하게 깨달은 연후라야 비로소 신자도 이웃에 대해서 참고 기다려 줄 준비를 갖출 수 있습니다.
불쌍한 이웃에 대해서, 미혹된 불신자를 향해서, 심지어 바로 곁에 있는 가족들에 대해서도 무작정 그것도 뜨겁게 사랑하려 하지 마십시오. 신자의 의무요 사람 된 도리이긴 하지만 사랑은 그런 차원을 훨씬 능가한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 펄펄 살아 있는 인격끼리 관계를 맺으면 항상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소음을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절대 쉽게 쌓이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이 기다리고 참는 것과는 거리가 먼데다 이 세대는 스피드를 큰 덕목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니 그럴수록 지금이라도 누구를 사랑하고 싶으면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십시오. 사랑의 본질이 바로 그것인지라 그렇지 않으면 참 사랑의 싹이 움트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고 상대를 살리겠다는 각오와 헌신을 가지면 더더욱 좋겠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실천할 그릇이 못 된다는 것부터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사랑을 잘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절대적 선이자 사랑이라고 그렇게도 잘 믿고 입으로 외쳐대는 그분에 대해서도 참아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죄에 찌든 인간에 대해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그분을 잘 참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 예수를 빼거나 희미하게 각색해 놓고 그분의 권능에만 관심을 가지니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이 절정으로 완성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무력화시켰기에 그분만이 어떤 흉악한 죄인도 참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자부터 그분의 은총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아니하고서, 즉 하나님과 이웃을 십자가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서도 그 권능만 나눠 받으려 해선 여전히 세상 권세를 이기지 못할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제대로 들어와 있는 신자의 삶과 일생은 칠십년이라도 수일 같습니다. 또 하루라도 세상의 칠십년보다 더 풍성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당신은 지금 참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있지 못해 앞으로는 하고 싶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참고 기다리셨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하는 길 외는 절대 없습니다. 최소한 하나님이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도 차츰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4/25/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