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리 염려하십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37:18,19)
성경을 앞뒤로 연결해 찬찬히 읽고 묵상하면 놀라운 은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아주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아주 간단한 오늘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선 요셉의 형들이 그를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모의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불현듯 죽여 버리자는 마음이 모두에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단이 갑자기 그들 모두에게 사악한 마음을 순간적으로 심어주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무조건 영적으로 신비하게 푼다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자칫 더 이상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성경은 반드시 가장 먼저 앞뒤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선 그들이 ‘만장일치’로 죽이기를 꾀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꿈꾸는 자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동시에 같은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사단보다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죄악의 배후에 사단이 있지만, 요셉이 꿈꾼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뜻입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며 섬길 것이라고 두 번이나 자랑했으니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것도 채색 옷을 입은 채 아버지 총애만 든든히 믿고 아래 위도 아랑곳 않고 그랬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뿐만 아닙니다.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37:2) 자기들 잘못을 아비에게 고자질이나 하니까 미움에 미움이 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들의 미움이 결코 우발적 사건으로 생긴 감정적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쌓이고 쌓였던 미움이자 언제든 그럴 기회만 되면 확 풀어버리려고 들었던, 그래서 살인까지 감행할 수 있는 강한 의지가 수반된 저주였습니다.
요셉이 가까이 오자 또 고자질할 미끼를 찾으러 오나보다 싶어 평소의 저주에 불이 확 붙은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추측이 아님을 성경이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분명 형들과 함께 양을 쳤다가 지금은 양치는 일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아무리 아비 야곱이 그를 귀엽게 여겼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주업이 목축인데 집안 기둥으로 키울 욕심이 있었으면 더더욱 훈련 시켜야 했습니다. 틀림없이 고자질을 자꾸 당한 형들이 아비에게 그럴싸한 핑계를 대어 그를 왕따 시킨 것입니다. 실제로 형들이 핑계를 대는 데 선수라고 성경은 거듭해서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창 37;20, 29-32, 38:11, 42:13)
야곱이 요셉더러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니 가보라고 했는데 막상 와보니 없었습니다. 응당 형들이 갔을 만한 곳을 다 헤맸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12-17절) 형들은 수시로 찾아와 감시하다시피 하는 그를 피해 그가 잘 모르는 곳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이 어떻게 알았는지 또 귀신 같이(?) 찾아오니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두 꿈의 내용도 문제였지만 말하자면 요셉더러 신통력 있는 자라는 빈정거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오죽 미웠겠습니까? 시쳇말로 갈아 죽여도 시원찮았을지 모릅니다.
평소의 시기와 미움이 배가 다르긴 하지만 어린 친동생을 10명의 형들이 공모해 죽이려는, 정말 천륜을 어기는 흉악한 죄악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오히려 당신이 계획한 일이 시작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인간의 최악의 죄악을 하나님은 당신의 최상의 역사로 바꾸어주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당신이 택하여 당신의 언약에 속하게 만든 당신의 백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마치 야곱과 그 열두 아들에게 아주 조금은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조건이 있었던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들로부터는 단 한치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약속하고 계획하신 일을 당신의 이름 때문에 신실하게 이루신 것뿐이었습니다.
성경은 거듭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세겜에서 방황하다 형을 못 찾고 돌아갈려는 판국에 ‘마침’ 형들의 행선지를 아는 나그네를 만났습니다. 또 형제들이 요셉을 먼저 죽이자고 했지만 ‘마침’ 르우벤이 장남으로서 책임감과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냥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제안했습니다. 나아가 광야 한 복판 구덩이에 빠져 곧 굶어죽었을 판이었는데 ‘마침’ 미디안 상고들이 지나갔고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세 번이나 ‘마침’이 반복된 것은 인간이 의도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침’이 조금이라도 어긋났더라면 요셉의 일생은 완전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니 야곱이 요셉더러 세겜의 형들에게 가보라는 것, 그 전에 꿈을 꾸게 된 것, 더 나아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늦둥이 아들로 태어난 것 등등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총리가 되어 아비 야곱과 극적인 상봉을 하고 원수였던 형들과 화해할 때까지 따지면 정말 톱니바퀴처럼 딱딱 떨어져 맞물리지 않은 순간이라곤 없었습니다. 그중에 한 번이라도 톱니가 탈선했다면 요셉, 아니 이스라엘 선조의 일생도 탈선했을 것이며, 나아가 그 후손인 다윗의 씨에서 나실 구세주의 일생도 탈선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 가운데 헤매는 인류 구원 계획에 차질이 있었을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십자가가 서야할 시간과 공간과 그에 등장하는 인간 배우들이 조금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독생자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방식으로 구원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또한 인류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아담이 당신을 거역하고 완전히 타락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로 구원키로 약속하셨던(창3:15) 당신의 언약을 당신께서 달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빼앗기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세우시고야 맙니다. 이런 진술조차도 마치 그분의 영광을 빼앗을 존재나 가능성이 있고 그분은 빼앗기기 싫어서 큰 노력을 경주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완전하고도 절대적 선을 행하실 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한 치의 손상 없는 영광일 뿐이며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영광 앞에 대항해 설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런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는 것입니까? 요셉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는 짓을 해도 하나님이 더 큰 역사로 바꾸는 계기로 삼았듯이 신자도 제 멋 대로를 넘어 어떤 죄를 지어도 되는 것입니까? 절대로 ‘No'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결코 상치되지 않으면서 당신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진리와, 그런 진리를 미리부터 알고서 제 멋대로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식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부모는 용서해주며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식의 능력이 안 되면 손해까지 배상해 줍니다. 그러나 부모가 응당 그럴 것이라고 알고 미리부터 고의로 온갖 짓을 저지르는 것은 경우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전자의 경우 자식은 일이 다 수습된 뒤에야 너무나 큰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 존경하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막상 나쁜 짓을 하고 있었을 때에는 고의로 부모에게 손해를 끼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인간적 생각 감정 편견 욕심에 사로잡혀 실패를 했거나 죄를 짓는 줄 알아도 부모에게 그렇게까지 영향이 미치리라고는 미리부터 생각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요셉과 야곱과 형들은 이 사건 전후로 어느 누구도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눈치도 못 챘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무엇인지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생각, 가치관, 감정, 계획, 나아가 믿음에 따랐을 뿐입니다. 어떤 면에선 각각의 시간과 장소에서 자기들 수준에선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다 바로 잡아 주리라 믿고 미리부터 깽판을 친 것이 결코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무리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자라도 그 처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자기 믿음과 뜻에 오류가 있어도 말입니다.
그래도 사전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그 계획에 맞추어 준비, 훈련, 연습하여 더 그 일을 잘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까? 온전한 신자가 가질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절대 그럴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설령 그 결과가 조금 나아졌다 쳐도 당장에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양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랑할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에게도 조금치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이루십니다. 또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이 인간이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하며 큽니다. 고자질쟁이에다 시건방진 요셉더러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미리 가르쳐 주면 더 훌륭한 인물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가뜩이나 교만했던 그가 더 하늘 높은 줄 몰랐거나,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줄행랑을 치지 않았겠습니까?
요셉도, 야곱도, 열두지파의 선조가 된 형제들도 성경에 기록된 그런 실패와 시련을 모두 겪지 않고선, 기록 안 된 고난들이 더 많았을 것이지만, 절대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준비, 훈련, 성숙 과정을 생략해선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당신께서 이루신다면, 즉 무슨 일이 있어도 계획한 일 자체는 당신 뜻대로 이뤄질 것이라면, 신자더러 그 일에 동참시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일보다 신자 자신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신자더러 당신에게 문자 그대로 완전한 무조건 항복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혹시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 정확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 어떤 여건과 사건 속에서도 완전하십니다. 신자로선 그 완전한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하고 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신비하고 오묘한 계획 가운데 자신이 부름 받고 있다는, 아니 실제로 현재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길로 가고 있는 모든 과정이 설령 고통과 상처와 핍박이 따를지라도 오직 그분의 놀라운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고 있으며, 나에게 최상의 길이여, 천국으로 나아가는 준비이며, 그로 인해 자기가 자꾸 신령하게 자라고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진리가 얼마나 든든합니까? 신자에겐 항상 최종 승리는 확실하고도 넘치도록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실패 아니 죄악마저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가운데 다 들어 있지 않습니까? 미리부터 그분을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지 않고 온전히 헌신한다면 틀림없이 우리의 최악의 죄악마저 궁극적으로 당신의 최상의 영광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일 일을 잠시는 몰라도 왜 그리 자꾸만 염려하십니까?
5/23/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