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미하나님이라 하였더라.”(창32:1,2)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여정 중에 여호와의 군대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곳 땅의 이름을 ‘미하나임’이라고 붙였습니다. 히브리어 ‘미하나님’의 뜻은 ‘두 군대들’(two armies)입니다. 야곱은 단순히 여호와의 군대를 환상 중에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두 군대가 함께 행진했었다는 의미로 쓴 것입니다.
그런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1)두 군대로 형성된 많은 천군들이 야곱 일행의 전후 혹은 좌우를 호위 했거나, 2)하나님의 진영과 야곱의 진영이 그곳에서 만나 행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 야곱과 하나님의 군대는 만났고 함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야곱의 생각이나 믿음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 환영, 혹은 기대, 소망이 아니라 실제로 여호와와 야곱의 두 군대가 함께 행군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의 군대는 곧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 때만 잠시 나타나고 곧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까? 말하자면 금의환향하는 야곱 일행을 환영하거나, 형 에서에게 혹시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힘을 내라는 격려의 역할만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신자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습니다. 무슨 위급한 일이 일어나야 특공대처럼 와서 구해준다면 하나님의 군대일 수 없습니다. 지금 야곱의 경우도 외삼촌 라반과의 다툼이 잘 해결되고 아직 에서를 만나기 전입니다. 아무 긴급한 일이 없이 평온한 여행길에 나타나 동행했습니다.
틀림없이 야곱은 평강 가운데 가나안 땅에 돌아가면 장자권을 가진 자로서 믿음의 가계를 이어받아 하나님의 기업으로 잘 키워나갈 각오와 헌신을 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자 하나님이 그의 눈을 잠시 열어주어 항상 동행하고 있는 여호와의 군대를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허급지급 도망 나올 때나, 외삼촌 집에서 온갖 수모를 겪을 때나, 또 지금 에서를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여호와의 군대가 자기를 떠난 적이 결코 없음을 다시 확신시켜준 것입니다.
이처럼 초자연적 세계는 절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비록 신자가 평소에는 여호와의 군대를 볼 수 없지만 항상 동행하고 있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과거에 은혜 받은 일과 미래에 소망하는 일에 하나님이 동행함을 잘 믿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나 특별히 현재의 고난에는 갑자기 하나님이 실종해버리지 않습니까? 그럼 항상 동행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가 기도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이제 예수를 알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제가 열심히 간구하는 소원을 하나님더러 들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자신의 쥐꼬리만 한 종교적 열심과 도덕적 선행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기도란 비가시적인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가시적 세계는 절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가시적 세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비가시적이고도 영원한 세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긴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한다면 비가시적 세계는 가시적 세계를 긴급할 때에 한해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 됩니다. 다른 말로 야곱이 본 여호와의 군대는 단지 그를 환영하고 격려하는 사절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군대 중에서도 의장대이지 전투를 담당하는 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폼이나 잡을 의장대가 따로 필요 하겠습니까? 여호와의 군대라는 명칭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란 지금 하나님께 간곡히 부탁하여 어떡하든 해결책을 찾거나 받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눈을 뜨는 작업입니다. 그 동안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잊고 있었던 사실을 회상하는 일입니다. 영원하고도 비가시적 세계가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현재의 문제와 고난을 두 가지 세계, 두 군대가 동행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보려는 시도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후좌우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문제와 고통과 죄악과 흑암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의 군대였음을 똑똑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셨던 뜻도 바로 이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비가시적 영역에만 계셨던 하나님이 가시적 영역으로 오셔서 사단과 인간들이 어떤 방해와 궤휼로 그 앞길을 막아도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이 땅의 주인이 당신이심을 만방에 선포한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절대 인간의 노력이나 어떤 기계적인 법칙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태초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믿어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자는 그 영원한 비가시적 세계와의 접촉점을 찾았고 그 문을 통과한 자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영원과 연결되어 사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무엇이나 언제든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신자가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부를 영원한 세계로 옮기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우주의 중심에 계신 분에게서 오는 영원한 메시지에 의해서만 자기 삶을 영위하겠다는 헌신이자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반증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예수 잘 믿었다고 하나님이 예쁘게 봐주시기에 신자가 원하는 대로 보너스를 받아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영원과 연결시켰기에 이 땅에서부터 자신의 전부가 영원한 것으로 바뀌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존재는 신령하게, 삶은 거룩하게,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덧입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기도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특권의 본질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려야 하고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관을 한 마디로 줄여서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의 결과에 따라 죽은 후에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시적 세계가 도리어 비가시적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전혀 없고 심지어 그 둘이 연관된 고리도 없습니다. 이 땅은 오직 인간의 노력과 기계적인 법칙으로만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특이한 것은 저들도 기도를 합니다. 왜, 무슨 뜻으로 합니까? 현재 눈앞에 닥쳤고 자기 힘에 부친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 자신들이 바치는 치성과 열심을 가지고 비가시적 세계를 움직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가시적 세계가 비가시적 세계를 움직인다는 사고가 바탕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기도의 초점은 오직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진심과 열심을 보여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뿐입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되뇌며 수 천, 수 만 번 손을 비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남의 일로만 들리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신자도 자신의 의지, 열심, 행동, 심지어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겠다고 덤비지 않습니까? 물론 한 두 번은 먹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그러면 결국 가시적 세계가 영원한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덤빈 셈이지 않습니까?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심지어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는 신자가 하나님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습니까? 인간을 감동 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기도는 그 감동을 얼마나 많이 받아내느냐의 싸움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신 감동과 소원을 자꾸 확인하여 그것을 이루고자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미하나임’임을 인정합니까? 믿음의 눈을 열어 여호와의 군대가 동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또 그 군대가 오히려 참 군대로서 나의 삶과 일생을 실제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까? 그래서 당신의 전부를 영원한 우주의 중심에 연결시키고 싶습니까?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누려보려고 이 땅의 것으로 그 영원한 세계를 어떡하든 움직여 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까?
6/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