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목사님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 글을 올리지 못함으로써 홈의 분위기가 가라 앉은 듯 합니다.
게다가 감칠 맛나는 글을 나눠 주시는 김유상 형제님마저 수술 대기 중이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두 분께 빠른 회복 주실 것과,
빨리 돌아오셔서 홈의 분위기를 되살려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두 분의 비움을 조금이나마 메꾸어 보려는 마음에서
우리 신앙의 위대한 사표 중의 한 분이신 모세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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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위대성Ⅰ (초기)
▣ 본문 : 출3:11-12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 들어가기
? 성경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믿음의 영웅들이 많이 나옵니다. 죄악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노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불의 선지자 엘리야, 왕중왕 다윗, 못 말리는 기도자 다니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등등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나기도 합니다. 분명 귀감이 되는 분들입니다.
? 오늘 본문에는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는 정말로 특이한 분들 중의 한 분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모세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이는 예수님의 생애보다 더 자세한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토론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는 물론 현대의 이스라엘 민족조차 모세라는 이름에 엄청난 권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분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모세는 더 이상 클 수 없는 선지자요 지도자요 위인이었습니다. 그의 태어남과 양육과 삶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졌던 사람입니다.
? 그런데 성경에 증거된 모세의 위대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따른 위대함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위인들처럼 모세도 자기 자신의 위대성으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과연 모세 자신의 위대함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어떻습니까?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2회에 걸쳐 모세의 인간적 위대성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모세가 부름 받은 초기에서 찾아지는 위대성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 참고로 디엘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일생을, 40세까지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I am somebody), 80세까지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I am nobody), 120세까지의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I am God's body) 등으로 3기로 나누어 요약했는데 아주 잘 정리한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은 이 중 제2기말 내지 제3기초 어간의 모세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 성경이 증거 하는 모세의 위대성
? 성경은 여러 각도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면에서 위대했었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출2:2절에 보면 준수한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남자 신생아는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살벌한 명령 하에서도 석 달 동안 숨겨 기를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 민12:3절에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 출3-6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5번을 확인하고 후에 다시 3번을 재확인하는 신중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민11:11-15절에 나오는 모세의 한탄은 그의 직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모든 기적들이 모세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홍해바다, 반석 물 등등).
○ 모세는 민족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출2:11절에는 동포를 핍박하는 애굽인을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광야로 쫓겨가 40년 간 양치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인도한 후, 모세 자신이 십계명을 받는 동안, 산 아래의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는 죄를 범합니다. 출32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난리 벚꽃장 같은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대노하시어 모두를 진멸하고 모세의 후손으로 새로운 민족을 이루어 이들을 통해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모세는 목숨을 걸고 중보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겠노라며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을 이제 여기서 멸하신다면 애굽과 이방인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어찌하여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참으로 당돌한 항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아무 말씀 못하시고 그만 양보하고 마십니다. 이 순간의 하나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머리끝까지 난 화를 억지로 참으시며 속으로는 “끙”하는 신음을 삼키시며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하마”하시는 모습을 말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32절에서는 아예 하나님의 다짐까지를 받아내고야 맙니다. “생명책에서 저를 제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십니다. 이 정도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신34:10절에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는 자’라 하고 있으며, 출33:11절과 17절에서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던 사람’, ‘이름으로도 알던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 또 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과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자였습니다. 신18:18절에는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겠다”고 하셨고, 신34:10절에는 “이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증언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 그뿐 아닙니다. 민27:16에 보면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훌륭한 후임자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려는 준비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대부분의 현대교회 목회자분들이 자신의 지도력의 누수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부목사 등 후임양성에 소극적인 현상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 여하튼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모세의 위대성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할 것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따른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쉬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모세라면 남보다 나은 면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잘 찾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모세 자신의 위대함은 하나도 없고 전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일 뿐일까요? 우리, 본문을 조금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모세는 자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 오늘 본문에는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라는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후에도 4번 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호통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애굽으로 돌아갔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 말씀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아주 타당하고 옳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시점에서의 모세의 처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모세는 과거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①태어난지 3개월만에 부모와 떨어져 애굽 공주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일종의 고아 내지는 유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이스라엘 동족을 핍박하는 애굽인을 살해하여 모래 속에 숨긴 사실이 발각되어 동족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바로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갑니다. 살인자/사체유기범/도주범 입니다. ③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쓸모없는 시골뜨기입니다.
○ 모세는 현재 무능력하고 무익한 사람입니다. ①나이는 80세의 고령입니다. 힘쓸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습니다. ②옛날 동족을 사랑했던 열정도 다 식었습니다.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③양이나 치면서 하루 하루를 사는 촌 늙은이입니다. ④타국에서 나그네로서 그럭저럭 살고 있는 힘없는 외국인에 불과합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와도 같은 그런 형편입니다.
○ 모세는 미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①나이 많아 늙었고 ②소망도 없으며 ③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시골 늙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렇습니다. 모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맞는 말입니다. 늙고 의욕도 없으며 체력도 부족한 자기를, 보통 일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시겠다고 하시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촌사람 모세가 당대 세계 최강국 애굽의 왕에게 가서 수백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라니요? 가능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대등한 군사력으로도 힘겹게 정말 운좋게 겨우 흑인 노예해방에 성공했을 뿐임을 보면 모세는 얼마나 무모한 상황인지 알 수 있지요. 성공 확률 0%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입니다.
?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모세로서는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확한 자기인식이었고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당시의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도대체 쓸 곳이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다시 말해 겸손과 온유) - 바로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이었습니다.
▣ 모세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좋도록, 완전히 준비된 사람이었다.
? 앞에서 살펴본 바로는, 모세는 쓸모없는 사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시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바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모세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 먼저 모세는 자신의 뜻, 의지, 욕심이 조금도 없는 흐물흐물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먹으신 대로 요리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무 의욕이 없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8번이나 거역할 정도로 맛이 간 상태이기도 합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 맨 밑바닥에서 비로소 사용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는 더 없이 좋은 상태입니다. 더 이상 손댈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준비된 상태라는 의미가 됩니다.
○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요리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데 아주 요긴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애굽 학문도 다 익혔고, 40년 간 광야에서 인내와 포기의 법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아는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최상의 일군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제 된 것입니다.
○ 이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감을 보이십니다. 모세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세를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되 모세를 중보자 또는 중간자로 하여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우여곡절 끝에 마지못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이후 40년 동안 그 험난한 광야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목이 곧고 불평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하여 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 그대로 이루어드리는 것이지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10절).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 나가기
? 여하튼 모세는, 망설였던 처음 출발과는 달리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이스라엘 민족도 가장 존경하는, 최대의 지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물론 모든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입니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말 모세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아주 커다란 위대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겸손입니다. 모세의 온유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라는 자기인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라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익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 안에서 성공하려면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비어져야 합니다. 흐물흐물해져야 합니다. 아무 의지도, 뜻도, 목적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계획안으로 붙잡혀 들어와야 합니다. 이게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무 살아서 펄펄 날뛰는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는 쓰실 수가 없습니다.
? 모세의 교훈을 통해,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실패자로, 무능력자로, 현실만족자로 살아가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성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쓰실 수 있도록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비운 모세를 배울 때,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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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위대성 Ⅱ (말기)
[ 본문 = 신34:1-12 ]
▣ 들어가기
? 지난번에는 모세가 부름받던 초기의 위대성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철저한 자기부정과 포기(비움)가 쓰임 받게 된 비결이었음을 알았습니다(다른 말로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모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즉 인생 말기에서 보여준 모세의 또 다른 위대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안면 몰수하시는 하나님
?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태도에 무언가 이상함이 발견됩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모세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31장부터 옛날 잘못(민20:11)을 들춰내시며 가나안 땅 입성 불가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겨우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 허락하시고는 그리고 34장에 와서 결국 모세를 죽게 하십니다.
? 이때 모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7절을 보시지요. 비록 고령이지만 해발 수 천 미터에 이르는 험준한 산을 펄펄 날며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눈도 흐리지 않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 몰아가십니다. 아무튼 모세는 죽었습니다.
? 모세가 죽자마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지요. 어떤 역본에는 ‘He was buried'라고 되어 있으나, KJV와 NIV는 ’He buried him'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He'는 하나님으로, ‘him'은 모세로 받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모세를 직접 매장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죽의 자의 장사는 모두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장사지낸 사람은 모세 한사람뿐입니다. 그 무덤을 아는 자가 없다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손수 매장하신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쫓기시듯 급하게 처리하시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대목입니다.
? 모세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은 다음 계획을 서두르십니다. 수1:2절에는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제'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바라고 기다리셨던 것 같다는 감이 느껴지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마음은 사실이었습니다. 조금 뒤로 가서 수5:6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라는 말씀입니다.
? 잘 아시다시피 본문의 시기는 광야생활 막바지에 해당되는 때입니다. 광야생활을 한 1세대 중, 가나안 입성이 허락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이때 살아있는 1세대는 오직 모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묘한 상황입니다. 그토록 위대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기이한 현상인 것입니다. 완벽한 아이러니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결정은 너무나 냉정하고 무정한 것 같습니다. 기력이 왕성하여 펄펄 날고 있는 모세를 아주 부드럽게 부르십니다. 모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경험상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늘 엄청나게 좋은 것을 주셨으므로, 이때에도 무언가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모세야, 너 빨리 죽어다오” - 이것이 본문에 담겨있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 모세는 죽음에 임해서도 위대했다.
? 잘 아시다시피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 광야생활을 거쳐 여리고 건너편에 이르기까지의 장장 40년간의 대장정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는 책입니다. 이제 그 막바지 33장에 이르러 각 지파에 대한 축복을 선언함으로써 모세의 장엄한 유언은 끝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는 분위기가 싹 바뀌어 오늘 본문인 34장으로 넘어갑니다.
?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이르렀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하나님의 죽음 명령에 접한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성경은 단지 빠른 템포의 사실적 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 모세의 심리상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한 추론을 통해 추측해 볼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모세였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에 대하여, 역시 건전한 상상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사실은 하나님께 애원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었습니다. = 신3:23-28).
○ ‘하나님, 왜 제가 죽어야 합니까? 아직 기력도 왕성하고 할 일도 많고 후계자도 변변치 못한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이 하라고 저더러 죽으라 하십니까?’ 자신의 임무를 내세워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아니면, ‘제가 반석을 두 번 친 잘못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저의 공로는 대단한 것 아닙니까? 공로와 과오를 상계하더라도 제가 지금 죽어야 할 이유는 안 되지 않습니까?’ 타협안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이 백성을 사랑하시듯 저도 이 민족을 사랑합니다. 저는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멀리서나마 이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애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러한 상상은, 오늘날 ‘성도들이 만류한다.’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핑계를 내세우며, 응당 사임해야 할 담임목사직을 신주단지처럼 붙잡고 있는 분들의 궤변과 궤를 같이 하는, 철저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아무 조건 없이 순순히 응하는 모세의 모습이 그려질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단지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바로 여기에 모세의 숨겨진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 첫째,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정확히 깨우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무언가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니 그게 바로 모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훈련이 끝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이 실현될 수 있는데,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다음 계획이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하나님의 막중한 사역을 감당했던 하나님의 종이었으나, 오늘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자신의 위상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깨어있는 자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그 혜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는 각자의 맡은 사명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 한계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우리 신앙 요건 중의 하나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의 한 국면입니다.
○ 둘째,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꺼워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하나님의 죽으라는 명령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긍휼, 즉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모세는 감사하며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의 또 다른 국면입니다.
? 모세의 위인다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죽음을 감지한 모세는 모압 평지 느보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까지 걸어갑니다(느보 산과 비스가 산은 같은 산맥에 속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들입니다).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 모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보고 또 바라봅니다. 한발자국 내딛고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쉐필라 평지와 그 뒤로는 블레셋 다섯 성읍이 보입니다. 모세는 감탄합니다. ‘오메! 좋은 거!’. 또 한발자국 걷고는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헤브론 산지와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대해의 반짝이는 물결이 보입니다. 또 감탄합니다. ‘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로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보이고, 저 멀리에는 에발산/그리심산/갈멜산도 보이고, 북쪽에는 단까지 보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백향목도 보입니다. 또다시 감탄합니다. ‘야, 저 백향목을 베어내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고 그 옆에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지어 내가 살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구나!’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음도 잊은 체, 모세는 연방 감탄만 합니다. 그가 지금 옮겨놓고 있는 발자국 하나하나는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와 같은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감탄, 감사뿐입니다!
? 느보산에서 비스가산에 이르는 죽음의 길을 순종으로 가고 있는 모세의 모습에서 깨우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오, 위대한 모세여!’입니다.
▣ 나가기
? 지금까지 2회에 걸쳐 부름 받은 초기와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나타났던 모세의 인간적인 위대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위대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에 따른 위대함이라기보다, 모세 자신의 순수한 위대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성경은 그의 모습을 그와 같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모세는 진정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된 교훈을 이제는 오늘을 사는 나의 삶에 적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의 무익함을 알고(자기부정 내지 포기), 그 후에는 자신의 위상을 정확히 인식하여 죽음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 이것이 모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 오늘날 교회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붙잡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담임목사직이든 재물이든 아니면 목숨까지라도, 주님께서 내 놓으시라면 모세처럼 아무 말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지요? 나 자신에게서는 결코 모세와 같이 큰 믿음, 아니 진정한 위대성이 발견되지 않기에 마음이 울적하지는 않은지요?
?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계시다면, 먼저는 욕심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위대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아주 작은 부분에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것이 곧 큰 것입니다. 이에 감사하며 감당하는 믿음은 결코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적용으로까지 이어질 때, 모세의 삶을 통한 묵상은 은혜가 된다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보고 기뻐하실 주님을 기대하면서 감사 가운데 믿음의 길을 가시는 은혜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