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에 대해 네가 할 말이 있느냐? 그가 네 눈을 뜨게 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예언자십니다.”(요9:17)
사람인지라 항상 정확한 판단과 분별을 할수 없다는걸 종종 잊어버릴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특히 저만의 단점이기도 합니다만 다른이들에게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런것이겠지요. 너무 완벽을 요구합니다.
본인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그럽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도 비슷할겁니다.
무슨의미인가 하면 부분을 보고 전부로 오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이해하는 것처럼 도매금으로 판단을 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실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 하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만하고 오만하고 예수를 미워하고 대적한자들이며 특히 위선자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이며 권위주의자들이며 돈만 밝히는 아주 못된자들로 대부분 비유로 등장합니다.
이것도 사실은 일부 기득권자들과 주류들의 모습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전부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구절을 보면 같은 바리새인들이라고 획일적으로 사상이 똑같지 않다는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부가 안식일에 대한 입장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잘못 생각한지도 모르겠지만 상황을 좀더 추적해 봅시다.
먼저 전에 눈 멀었다가 보게된 이 사람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분명 안식일을 범했기때문에 죄인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하고 자신있게 온것입니다. 아니라면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는걸 확인 받기위해서 온것이겠지요. 내 생각이 맞지않는냐 하고 많은사람들에게 인정 받고자 온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심문을 하고 조사를 하는 분위기 같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좋아하고자 데려온것이 아니라 내말이 맞지? 하면서 사실대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내 눈에 진흙을 바르셨는데 내가 씻고 나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다시한번 공개적으로 심문을 합니다. 어떻게 보게 돼었는가? 라는 질문을 듣고 이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수께서 내 눈에 진흙을 바르셨는데 내가 씻고 나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기쁨으로 예수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놀라운 기쁨과 감격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자기에 대하여 무슨 맘으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의도로 물어보는지를 깊이 생각할 수가 없이 좋기만 한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눈 멀어서 구걸이나 하다가 조롱과 멸시와 천대만 받으면서 죽을때까지 살수밖에 없는 모진 인생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말 죄가 많아서 저주받은 가혹한 운명이며 거부할 수 없는 신의 심판이라 생각하며 죽지못해 살아왔던 한 많은 인생입니다. 아무런 위로도 편들어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야할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놀라운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자신이 눈이 멀어졌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꿈에서도 들어보지 못햇던 복음을 그가 들었습니다. 늘 저주와 욕설과 죄인이라는 정죄의 말밖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가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들려 졌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이시다! 그는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구주이시다! 더이상 무엇을 확인하리요. 그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고백으로 충만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은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여러분들은 이러한 고백으로 살고 있습니까?
꼭 기적을 보아야만 이사람처럼 기쁨이 충만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확신하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사람들은 그 말씀만으로도 엄청난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것 아니올시다. 먼저 은혜가 부어져야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단순히 정보로서 좋은 책으로서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혹은 자신의 앎을 자랑하려고 열심으로 연구해봐야 지식적으로는 많은 수준을 얻을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은혜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전에 저도 책을 아주 조금 읽었습니다. 삼국지도 읽고 수호지도 읽고 광개토대왕도 읽고 토지도 읽고 장길산도 읽고 암튼 유명하다는 책은 어느정도 읽었습니다만 거기에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재미는 있고 상식은 있고 지식적인 정보로서는 좋은 책들입니다. 삶의 처세라든지 아무튼지 좋기는 하고 우쭐거리기도 했습니다만 거기에 생명은 없었습니다. 거기에 길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진리는 없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거기에 예수 나의 주님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사람은 주의 말씀만이 전부입니다. 그의 기쁨은 단지 눈이 보인다는것 때문에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주의 말씀만으로 모든 시름이 살아진 것이었고 눈이 고쳐진 것은 보너스일 뿐입니다. 그냥 말로만 하면 사람들이 믿지를 않으니까 증거하라는 표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이 없더라도 내적인 변화만 해도 충분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내 눈에 진흙을 바르셨는데 내가 씻고 나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어떻게 보게 되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고쳐 주셨다고 증언 합니다. 단지 그것입니다. 그가 하라는데로 그의 말씀데로 행하였더니 보게 되었다는 증언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란이 생겼습니다. 처음에 제가 설명한 것이 이것때문이었습니다.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오”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보이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눈이 보이게 된 이사람에게 판정을 부탁합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서 그것을 기준으로 서로 옳다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은혜안에 있는자와 은혜밖에 있는자들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아래 있는자들과 은혜안에 있는자의 차이입니다. 은혜안에 있으면 아는것을 은혜밖에 있으니까 모를수 밖에요. 모르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자꾸만 분석을 하려고 합니다.
모르니까 이것이 정말인가 해서 의심하고 분석을 하고 이해하려고 애를 쓰다가 헛되이 시간만 보내버립니다. 매일 고민하다가 답을 못찾아서 헤매는 것입니다. 답은 이미 주어졌는데 안보입니다. 사라에게 쫒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이 들에서 방황합니다. 물이없어서 죽게 되었다고 방성대곡을 합니다. 그렇게 포기하고 모든것을 내려놓고서 전능자에게 무릎을 꿇으니까 살았습니다.
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던 샘을 발견했습니다.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내리치자 수풀에 있는 양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22:1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이 들려진 자들입니다. 그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고 오묘하게 들려질 때 그는 더이상 다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만으로도 그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은 언제나 주는 그리스도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주님이라고 노래할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 가운데서도 그는 기쁨으로 주를 증거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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