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침입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다 알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께서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한 번 결정적으로 구원해 내시고서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습니다.<유다서 4~5절>표준새번역.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인가를 분별하는것은 오늘날 혼동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참과 거짓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리가 진짜라고 생각 했던 진짜가 가짜인것을 알았을 때 너무 놀라워 합니다. 설마 하면서 믿기지 않아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거짓이 들어나게 되었을 때 그동안 신뢰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큰 상실감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생각이 '세상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하는 절망감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것에 무한한 신뢰를 보냅니다. 우리 눈에 좋게 보이고 아름답게 비쳐지면 다른 결점들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미운것은 아무리 좋아도 미운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속에 강력하게 자리잡은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않은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인생의 산전 수전을 겪은 선배들은 뼈저린 아픔을 맛보며 말하기를 아름다운것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으며 그 배후에는 무서운 사망의 독이 있다는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경계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들이 동일하지 않기에 여전히 세상에서는 속고 속이고 속아가는 것입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것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는 잘 구분이 안되기에 그렇습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보면 결국은 우리의 본성이 심히 어그러졌고 어두워졌기 때문이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창조때의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으니 말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얼마나 지혜로웠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웠을까요? 그에게 모든 권세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완전한 동산을 만드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것을 주었습니다.

아담의 지혜와 직관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보여주면서 이름을 지어보라고 합니다. 이름을 누가 지을 수 있습니까? 절대적인 보호자요 창조자요 인간편에서 보면 부모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어떤이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돈을 주고 작명가나 용하다는 어떤자들에게 맡기는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창2:19>흠정역.

이처럼 엄청난 자유함과 복을 받았던 아담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였기에 결론적으로 미혹되었기에 간교한 사단의 속임에 넘어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혹에 반응한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몰랐던 아담에게 죄가 기회를 타고 숨어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죄가 없었던 동산에서 죄의 근원인 사단의 침투에 그만 넘어간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빼앗긴 것이었고 그의 결국은 어그러지고 부패하여진 상태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하나가 된 아담과 하와는 더이상 하나님의 동산에서 함께 거할 수 없으므로 내어 쫒김을 당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통치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문화와 제도와 가치들은 사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들입니다. 그 세계와 문화속에서 태어나고 배우며 양육이 되었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히브리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나면서 어쩔 수 없는 가혹한 종의 자리에서 살다가 죽을 운명과 같이 모든 인류는 그렇게 사망이 왕노릇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죄를 먹고 마시며 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살다가 멸망 당하는 운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극단적인 시각입니까?
성경이 그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믿지 않거나 안보이거나 아예 처음부터 상관없는 사람들이거나에 속한것일 뿐입니다. 이 사망의 세상에 생명이 온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이 비췬것입니다. 본래 어둠을 사랑하며 악한 인간 세상에 참 빛이 오자 사람들이 아우성을 친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자기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 백성들은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빛이 비추면 들통이 나기에 미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배척을 당한것이지만 그 빛을 받아드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자녀의 권세를 주셨다는 요한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유다는 지금 믿는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리스도안에 형제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참된 성도들과 참된 교회들에게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침입자들이 들어왔다고 경고합니다. 개역성경은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 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이들의 실상은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인데 그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매들을 맺는자들을 주의하라는 경고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합니까? 은혜를 남용하고 바꿔서 방탕함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이렇게만 지적을 하면 잘 못알아 들으니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과거사를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다 알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께서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한 번 결정적으로 구원해 내시고서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구해낸 백성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 40년동안 방황하다가 멸망당했다는 기사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믿지 않았던 자들이라는 것이고 그 믿지 않음이 방탕과 방종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불신하였고 시험하였으며 거역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이 놀라울만큼 주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만한 교회 성장은 기적과 같다고들 입을 모아 칭송합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의 자랑들을 뽐내면서 이제는 세계 선교에서도 큰 위치를 담당한다고 한껏 고무되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 교회를 향하여 경이로운 부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당시 예루살렘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이기 까지 했었고 그의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을 학대하고 미워하며 조롱했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학자)이며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모세의 율법을 받았으며 제사장들과 예배(제사)의 특권을 자랑합니다. 우린 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며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고 각종 절기들이 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비판하는것을 코웃음을 치면서 내어 쫓았습니다.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고 안식일에도 생명살리는 일을 하시면서 본래의 목적을 일깨워 주었어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안식일 준수'라는 것으로 정죄하였습니다. 빛이 왔지만 그들은 빛을 싫어하였습니다. 대신에 성전을 숭배하였고 제사와 제물을 불태우는것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의 한숨을 듣지 못하고 잔치 자리의 상석을 좋아했으며 율법을 자랑하면서 가차없이 심판하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성전 제단에 짐승들을 죽인 피를 바르는 것으로 하나님이 만족하셨기에 자기들의 정당함을 인정해준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에 열심을 내었고 그것이 공로가 되었으며 자기의가 된것이기에 진리이신 예수를 거절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분별합시다.
우리는 엄청난 교회의 성장을 자랑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새벽기도와 일천번제와 수 많은 성도들의 숫자들을 자랑합니다. 교단을 자랑합니다. 부흥회를 자랑합니다. 십일조를 자랑합니다. 주일성수를 자랑합니다. 내 교회를 자랑합니다. 우리목사를 자랑합니다. 작은 교회들은 대형교회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거절합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를 하지만 삶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달려갑니다.
복의 기준이 세상에서의 으뜸입니다. 광고 카피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입니다. 오직 최고만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일등만이 모든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원리속에 철저하게 오늘의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의 영혼이 팔렸습니다.

오늘날 믿음이, 열심이,기도가,신앙이, 예수이름을 부르는 목적이 결국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소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성령을 속이지 마십시오. 말씀을 거울로 비춰보면 지금 우리의 신앙의 모습들이 얼마나 위선과 기만적이며 욕망을 감추고 겉으로 경건을 포장하는 종교적인 작태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삶을 비교해 보아도 지금 우리들의 삶은 전혀 성경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의 교회 제도가 어느 것 하나 성경과 주님의 가르침과 함께 합니까?

회칠한 무덤이라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질타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의 제물과 제단이 필요치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다 끝마치셨습니다. 이젠 더이상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형식과 제도는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폐하시기 위하여 주께서 몸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분별한 사도들과 성도들은 바로 그러한 유대교의 전통과 종교에 대하여 탈출한 것입니다.

애굽탈출과 홍해를 통과한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은혜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애굽을 그리워 하였으며 애굽에서의 우상숭배를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롬1:23) 오늘 우리가 잘 분별해야 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자랑하는 그런 자랑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거스른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동안의 전통인데 아깝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길과 다르다면 어떻해야 할까요? 당장에 주님의 심판이 없으니까 상관 없다는 것입니까?

이 시대의 심판은 주님이 상관하지 않으심인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여도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면 당장에 벌이 내려져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의한 것이 우리의 본성을 만족시킨다면 너도 나도 따라갑니다. 그래도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설교도 하고 찬양도 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잘 지키고 기도 열심히 하고 구제도 하고 직분도 잘 감당하니까 우리 목사님이 축복기도 했으니까 난 기독교인이니까 난 하나님의 귀한 자녀니까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니까...

누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지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직분과 경력과 업적따위는 때어 놓고 분별해야 합니다. 양과 염소를 가른것처럼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함으로 바꾸는 것이랍니다. 여기서 방탕함이 술취하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막나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드러내놓고 그렇게 사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대중들앞에서는 정신 내놓은 사람 아니라면 공중도덕과 질서와 예의를 대부분 잘 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만일 아무도 보는 눈이 없다면 그때 행하는 마음과 행동들이 그의 본래의 모습이라는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성직자라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이슈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보면 대부분 엘리트들이며 종교인들이며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도덕한 범죄가 들통이 나는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글쓴 저부터도 예외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성경을 백번을 읽는것도 무용지물입니다. 사십일 금식도 소용없으며 환상을 보고 방언을 체험했다해도 말입니다. 연일 초청 간증 강사로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주었다는 경력도 소용없습니다. 마귀는 홀로 있을 때 예수님을 시험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 홀로 있을 때 유혹이 왔고 걸려 넘어졌습니다.
한 때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던 청렴하고 바른 목사가 시대가 흐르자 변질되어 가는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정말 믿을 사람 없습니다. 저 자신도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요? 하늘 아래 땅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자신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비춰서 분별해야 합니다. 버릴것을 버리고 자를 것을 잘라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잡고 있는 어떤 집착에서부터 말씀으로 분리시키는 수고와 싸움을 매일 순간순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길" 로 가는것은 아닌가를 살펴서 돌아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09/05/29.ⓒ사랑그리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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