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5:1)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중간지대는 인정하지않습니다. 어느정도는 중도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쪽 저쪽으로 부터 균형을 유지하는 줄다리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어느 한쪽을 결정해야 하고 그렇게 결정하도록 삶은 우리를 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거부할만큼 우리의 힘이 충분하지 못하지요. 만일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것을 원하고 추구하고 누릴 수 있다면 그는 절대자와 다름없는 초월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놓고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명한 한계의 지점까지만 입니다. 안타깝지만 그 이상을 말하기에는 우리의 연약함이 워낙 크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인생이 맘먹은것처럼 안된다는것입니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같은 세상에 살면서 특별한 어떤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소유한다는 것이고 더 놀라운 것은 이 세상에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주의 백성들마져도 어느것이 주께서 주신 복인가를 미쳐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를 믿는다는것은 단지 입술로 믿나이다 혹은 믿습니다 고백하며 어떤 형식과 집단적인 모임에 소속하여서 자기들이 정한 법칙과 규칙을 훌륭하게 해 내는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조상들로 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구약의 제사제도와 규례들을 철저히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이라고 철썩같이 믿었지만 나사렛에서 나타난 예수라는 한 청년의 가르침에서 당시 유대교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었는가 하면 그 당시 로마의 권력에 정치적으로 구걸을 하다시피해서 십자가에 죽이려고 부단하게 힘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백성들은 지도자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독제자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러한 지도자들을 용납하는 한편 더 무서운것은 소위 지성인이라는 엘리트 주의자들의 굴욕입니다. 과거 일본이 득세하던 시절 지식인들이 앞장을 서서 일본의 전쟁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간교한 혀를 내둘러서 일반 시민들의 의식을 무력화 시켜 버렸고 그에 대한 댓가로 그들은 부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중에 상당수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헌신짝 버리듯이 차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살아 보자 라는 야망으로 정당화 시켜버리고 더욱 기가막힌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할 사명자라는 목사들의 입에서조차 오로지 성공신앙 축복신앙 번영신앙만을 줄기차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미 예수는 허울좋은 이름뿐이고 또 어떤곳에서는 성령의 이름을 팔아서 기적이나 환상이나 치유만 전하고 귀신쫒는다고 굿판만 열심히 벌리지만 정작 귀신들은 거기서 한마당 푸닥거리하고 대접 잘 받아 희희락락하고 있는데도....
그런거 한번 초청해서 해야만 교회부흥된다고 난리부르스를 추면서 고래고래 목청높여 주여 주여를 외칩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것을 충분히 열매로 보면서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조차 그것에 목말라하면서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진실과 공평과 정의는 동화속에서나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지만 그 아이들역시 자라면서 교육따로 삶 따로 신앙따로 그렇게 절묘한 위장을 능란하게 적용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진자들은 더욱 많은것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이용하고 없는 자들은 어찌하든지 얻어먹으려고 예수 이름을 이용하는자들의 뒤에 줄서기 바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예수 잘믿어라 바르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하는 짓들은 세상 욕망과 돈에 환장한 모습들이라는 것을 보고 자식들이 뭘 배울까 생각하니 그저 애통할 뿐입니다.
자기 배만 위하는 거짓 삯군들이 경건한 의복과 모양으로 사람들을 속이지만 누구하나 알아채지 못하고 정말 믿음으로 바로 서고자 하는 이들을 자꾸만 내어치는 기묘한 현상들을 봅니다. 그럴듯한 거룩한 말과 온화한 표정과 성직의 의복을 입고서 알수 없는 제사를 경건하게 하면서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하고 뻔뻔하게 거짓을 퍼트리는 자들이 드글드글하는 세상은 정말 요지경입니다.
정말로 예수를 알았다면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이 얼마나 두려운것인가를 알았을텐데...
자기가 지금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솔직하게 볼 수만 있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알았을텐데...
두가지입니다.
성경이 틀렸든가 저들이 가짜든가...
명백하게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들의 열매가 구분이 되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사도들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하였고 '세상이나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였으며 돈을 많이 벌려고 빨리 부하게 하려는 자들에게 경고하라' 하였건만 우리는 나그네라 하였건만 어찌하여 지금의 교회들은 기회만 있으면 땅사고 성을 쌓을려고 하는지....
하나님이 언제 돈을 원하셨다고,
기독교 백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교회가 돈이 있어야 존재한다고 사기들을 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율법을 들이대면서
십일조 바쳐라 건축헌금 바쳐라 선교헌금 바쳐라 일천 번제헌금 바쳐라 가족이름으로 헌금 바쳐야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거짓말을 하는지....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헌금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도와주고 나눠주라는 뜻이건만 솔직히 교회 제정을 공개하는곳도 드물겠지만 구제하고 나누는데 쓰는 것보다는 다른용도로 더 지출을 많이하는것은 무슨 이유일까....
기껏 생색내는것이 있기는 합니다.
바자회를 해서 돈 벌어서 그것으로 불우이웃 도왔다느니 동사무소를 통해서 쌀 나눴다고 광고는 엄청해대는 것들....
그러면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러면서도 구원얻은 성도들에게 주일성수하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잘 알아야 하고 지켜 행하여서 성도의 신분답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엇이든지 법으로 하자고 말합니다. 교회가 교회법이 먼저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보다는 교단헌법이 더 절대적입니다. 그러니까 총회장하려고 난리고 당회장 노회장 해먹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애꿎은 성도들에게 참 복음을 전하고 자유함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을 받도록 자유케 하여야할 목사들이 성도들을 더욱 옥죄이는것은 뭘까요? 갈라디아 서신서를 보낸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5:1)표준새번역.
이 말씀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구원을 받은자만이 알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해방된 자만이 해방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애서 자유함을 경험해봐야만이 다른사람 들에게도 그 자유함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바울도 예전에 유대교인 이었습니다. 바울도 구원얻기 전에는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로마 시민권자요 율법의 열심으로는 이등이라면 용납하지 않는자였고 가말리엘 스승의 제자였으며 여러 선배들에 비하여 조금도 빠지지 않았으며 조상들의 유전과 전통에 대한 열심이 특심하였던 자였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주를 만나고 복음을 받아서 새사람으로 변하였을 때 그는 알았습니다.
그동안의 자기의 열심과 행함이 얼마나 무가치한 짓이었으며 오직 주 예수의 십자가의 피 공로 때문에, 그것은 곧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것을 말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안되는것임을 알았던 바울... 그가 종되었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그 놀라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유케 하려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만일 자유한자가 되었다면은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 율법의 멍에, 전통과 사람의 법에 더 이상 묶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율법으로 구원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신 구원하심을 옛 언약에 속한 율법 지킴과 배움과 앎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에 메어서 율법의 종으로서 세상을 이해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하신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을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율법문자만이 의로가는 방법입니다. 지켜야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것 다해봤자 율법을 어기면 소용없다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율법을 외우며 율법을 말하며 율법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을 정죄하고 죄책감에 또 다시 제사드림으로 갈 수 밖에 업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에 열심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제물에 공을 들이고 형식에 공을 들이고 십일조에 공을 들이고 무엇이든지 갖다 바치는 것에 열심을 내기만 하면 율법 못지킨것에 대한 얼마정도의 탕감을 받을 수가 있다는 심리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일만달란트 빛을 진자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사람이 무엇을 노력해서가 아니고 지켜서가 아니라 아무런 능력도 없었기에 조금만 참아달라 곧 갚겠다고 사정을 한것 뿐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값을 수 없다는것을 안 주인이 불쌍히 여겨 없는것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종에서 자유함으로 바뀐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사람은 주인앞에서 빚진자가 아니라 자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이사람은 주인이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죽을 때까지 전하고 칭송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는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내가 자유하게 되었고 주인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것은 필요없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한번 주인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보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용서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데나리온을 갚아야할 친구를 만납니다. 그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자기를 슬슬 피하려고 도망을 칠때 그에게 달려가서 얼싸안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보게 친구. 이제 더 이상 지난번에 빌려간 백데나리온 때문에 고민하지 말게나. 다 갚은것으로 할테니까 우리 어디가서 밥이나 먹세' 무슨 소린가. 내가 꼭 갚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아니라니까, 정말 그돈은 없는것이로 할테니 이제 맘푹놓고 열심히 살게나' 이렇게 해야 그가 받은 은혜와 탕감이 정확하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친구의 멱살을 잡아서 빨리 갚으라고 호통을 치며 사정을 하는 친구를 오히려 고발까지 해버립니다. '이에 그의 동료 종들이 일어난 일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자기 주인에게 가서 일어난 일을 다 고하니' 주인이 크게 화를 내어서 말하기를 "그때에 그의 주인이 그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오 악한 종아, 네가 내게 애걸하기에 내가 네게 네 빚을 전부 용서해 주었은즉 내가 너를 가엽게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아니하느냐? 하고 그의 주인이 노하여 그가 자기에게 진 빚을 다 갚기까지 그를 형벌 주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느니라."
오늘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칭 구원얻어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사들이 도대체 교회지어 놓고 신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진정 주께서 자유케 하신 자유함을 누리고는 있는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열매들은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일 하는데 지장이라도 있다는 듯이 한목소리로 십일조를 정당화하며
교회 치장하기에 애를쓰는 지금의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봐줘야합니까?
결국은 스스로가 종됨에서 벗어난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것이 아닌가요?
사도들이 언제 어디에서 성도들에게 십일조와 성수주일을 말했습니까?
당신들 스스로가 종이라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말이 억지라고요?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 앞에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요8:31-38)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종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실체를 들어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체를 폭로하신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세상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인 악마에게서 났고, 또 그 아버지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요8:42-44)
바울과 사도들과 복음을 믿은 성도들과 유대인들과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며 종된적이 없으며 율법을 알기에 율법을 모르는 자들과 이방인들은 저주받는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메여서 율법을 범하는 자는 저주받아 멸망당한다고 믿는것입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구원이며 다른말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행함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자들의 사상입니다. 그들에게 기준은 십자가의 피의 긍휼과 능력(죄 사함)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편에서 그래도 쓸만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예수 믿는자들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어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큰소리치는 위치에 올라가야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기를 쓰고 세상에서 기득권층에 합류하고자 부끄러운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이미 계급화 권위주의화 맘몬화가 된지 오래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서 섬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음란하게 섬긴것처럼 탐심으로 가득한 자들에게 종교적인 제도가 탁월한 모습으로 이 땅에 정착해버린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득세하는 시대에 예수께서 보잘것 없는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어그러지고 부패했고 타락한 사단의 원리가 땅을 지배하는 죄악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마귀들이 하는 일들을 멸하시기 위하여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흑암의 세력들이 설치던 세상에 원래 천국 백성들로 부름을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이사야는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마4:15,16)<사9:1,2>
얼마나 이 세상이 어두웠는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한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을 드려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의 길로 형벌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 죄악을 담담하셨고 징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가 아니고, 목사들의 십자가가 아니고,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가 아니고,존 스토트의 십자가가 아니고,이근호의 십자가가 아니고, 바울의 십자가도 아니고 사도들의 십자가도 아니고 순교자들의 십자가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이 십자가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자유함을 맛본 자들만이 그 맛을 전할 수가 있으며 누릴수가 있는것입니다.
이 맛을 보르니까....
자꾸 외형과 형식과 제도적인 장치에 머물수 밖에 없으며 그것들을 얻고 지키려고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장에 오늘 밤에 하나님이 호출하시면 모든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도 들고 이고 싸질머지고 갈 수 없는데.....
하나님앞에서 다른것은 다 소용없는데.....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해야하는데....
아직도 뭔가를 주를 위해 바치겠다는 심보는 도대체 무슨 도적놈 심보인가.....
세상과 짝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라는데....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배짱이 그리도 두둑한지 그렇게 주님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면서...
다른 썩은 열매들을 생산하면서... 주님이 전혀 안받겠다는 인간적인 열심과 정성과 수고를 그렇게...
당신들은 하지도않으면서 교인들을 들들볶아서 당신들의 욕심을 위해 이용하고도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가?
그렇게 하면서도 잠이 잘 오는가?
그렇게 하면서도 기도가 되는가?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에서 목사노릇 하고 싶은가?
그렇게 하면서도 장로 소리 한번 듣고 싶은가?
그렇게 하면서도 성경을 가르치고 싶은가?
그렇게 하면서도 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가?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정말로 주께서 당신을 부르시기는 한것인가?
당신은 지금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가?
주를 위한다면 이십년 삼십년 목회한 교회를 나올 수 있는가?
교회의 부정과 부패함을 보고 그것이 아니라 말하면서 교단과 노회에서 스스로 탈퇴할 용의가 있는가?
성도들로 하여금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수 있도록 모든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집어치우고 자유롭게 언제 어디에서든 모여서 예배할수 있는가?
목사 타이틀 버리고 성도와 형제로서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눌수 있는가?
당신이 거듭났으며 진실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로 탕감받은 자유를 맛 보았다면
다른이들에게도 모든 종교적인 제도와 위선과 형식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며 삶이며 양육이며 가르침이며 진정한 목회가 아닌가?
만일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면....
당신의 구원은 다시한번 살펴서 확인해야할지도 모릅니다.
2009/06/04.ⓒ사랑그리고편지
님의 한국 교회들을 향한 뼈를 깎는 것 같은 외침들을
신자라면 누구라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님께선 절망에 빠져 광야에 홀로 피신했던
엘리야 같다는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권능도 함께 바라보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조국 교회들에 부조리와 모순이 만연하는 것 같이 보여도
곳곳에서 묵묵히 신실하게 순전한 복음을 전하며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목회자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원리는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너무 싸잡아서 도매금으로 매도해버리는 것은 좀 과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저부터 필두로 하여 세상에는 완벽한 목사나 교회는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며 아직도 허물과 죄악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다 같이 용서 받은 죄인에 불과하므로
더더욱 교회로 모여 주님을 모퉁이 돌로 모시고
함께 깎이고 다듬어져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기존의 체제나 제도에 부작용이 많아 나타나도
그런 부작용을 다 같이 힘을 합해 고쳐나가도록 해야지
체제 전체나 잘못되지 않은 제도 자체를 폐기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도 믿는 자들이 모이기에 힘쓰다 보니까
자연히 체계적이고 가시적인 기독교 제도가 형성된 것 아닙니까?
나아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견강부회식의 성경해석도 가끔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본문만 해도 복음이 자유케 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외한 다른 어떤 종교적 수단이나 계명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지 않습니까?
기존의 성경적 제도나 계명이나 가르침 모두를
무시하거나 전혀 영향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이해됩니다만...
몇 번이나 망설이고 기도한 후에
진심으로 함께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심정에서
붙이는 댓글이므로 별다른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또 운영자로서 다른 방문자님들을 감안해야할 책임에서
일차로 드리는 고언이기도 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