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fear.)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어릴 적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래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서 합창단 단원으로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나는 역사, 철학, 예술등 각 방면의 책을 즐겨 읽었으며 재능 또한 대단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나 짐승에게 해가 되는 것은 싫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배고픈 쥐 떼를 보고 내가 먹던 빵 부스러기로 그 쥐들을 먹였습니다. 어느 날 작은 아이가 의자에 머리를 부딪쳐서 울자 나는 그 아이처럼 의자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슬픔을 같이하고 아이를 대신하여 그 의자를 때려 주었습니다. 서른네 살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에 대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서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나요? 나는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600만 학살의 주인공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좋은 교훈을 주는 이 글이 몇 년 전 구약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 있을 때 처럼 많은 반성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너를 정녕 죽이려 하였노라”였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마음에 전해졌고 (귀로 들은 것이 아니었음)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알았고 회개의 눈물을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흘렸습니다. 그 말씀은 항상 눈으로 읽어오던 성경이 아니라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굉장히 따뜻했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참사랑이셨습니다. 걱정 근심이 눈 녹듯 사라졌고 그 말씀 한마디로 마냥 행복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 왔을까? 내게 주신 재능(달란트)을 함부로 사용하여 히틀러와 같은 종말을 갖게 되지는 않을 지......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방 민족인 우리에게도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함인데 그토록 사랑하신 많은 형제자매와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웃들과 교회의 뜰만 밟고 다니는 불쌍한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비천하게 여기며 독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였고 남이 내게 하는 실수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한 마음을 미련없이 버리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 근처에는 두 곳에 큰 호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사해이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로 “살아 숨쉬는 바다”라고 불려지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사해는 다른 바다에서 물이 흘러들지만 다른 곳으로 물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숨쉬는 바다” 갈릴리 호수는 물이 들어오는 대신에 물이 흘러 나간다는 탈무드의 글처럼 이제는 늘 사랑이 넘쳐흘러 “살아 숨쉬는 바다”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주님 안에서 말씀으로 살며 죽도록 충성하여 반드시 금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은 나에게 공헌한 만큼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성과를 창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헌한 것이 없으면 보상은 고사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주는 말과 행동으로 조직을 떠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은 철저한 이해득실을 통해 끊임없이 나의 위치를 변화시키고 개관적이고 표준화된 자료와 여러 가지 블러킹 시스템을 도입하여 상을 주기도 하고 무능력한 인생들로 평가하기도 하며 조소를 보낼 때에도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의뢰했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보혈로 인 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유일신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친정어머니의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어려서 부터 잘 못했지만 어린이 성가대를 하면서 자라왔고 어머니 행동을 주시하며 올바르게 성장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빛과 그림자로 분리되는 여러 행동과 사건들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배웠습니다. 한 예로 6~7세 정도였을 때 동네 아이들과 유난히 기찻길 위에서 즐겨 놀며 철로 위에 못이나 쇠붙이 같은 것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그 무게로 인해 납작해진 쇠붙이들을 신기해하며 소꿉놀이를 할 때 였습니다. 이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기차가 통과하는 다리 위에서 아래 철로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다리 아래쪽을 보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할아버지 한 분이 철로로 다가서더니 철로 위에 머리를 갖다 대곤 꼼짝도 하지 않으셨고 잠시 후 기차가 다가왔으나 비키지 않으셨고 철로 옆은 핏물로 가득 했습니다. 기차는 급정거를 하였고 기차에서 내린 철도원들이 할아버지의 시체를 가마니로 덮어 놓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왜 할아버지가 그랬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목숨을 끊는 그 할아버지의 외로워 보이던 모습이 47세인 내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제가 모태 신앙이라고 흔히 말하는 신앙생활 속에서 참된 친구이신 주님을 만난 것은 스무살로 기억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받지 못할 무서운 죄악들이 가득찬 죄인이라는 회개를 덜덜 떨며 하고 있었고 일주일 내내 한 끼도 먹지 않고 금식하며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다니며 집에서 성경 읽으며 회개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집에서 성경 읽으며 묵상할 때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하는 성령이 임했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의 사슬에서 풀리는 거듭남의 체험 즉 죄가 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죄의 사슬에서 풀리는 장면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으로 지금도 결코 그와 같은 참 기쁨은 경험하지 못하였으며 감사와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그 후 이사야서 44장 22절 말씀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라는 말씀이 내 가슴판에 새겨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택하셨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내가 지식적으로 믿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붙드심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홀로 한 분이신 유일신이심을 믿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이라는 진실된 회개가 있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실 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아버지와 화목케 하신 사랑과 진리의 예수님을 굳게 믿고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안에 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 합니다. 홀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이사야 44장 24절) 처음부터 말씀하여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말미암아through) 천지를 지으셨고(요한복음 1장 3절) 성령은 지극히 거룩하신 최고의 결정권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기 때문에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하도록 성령을 훼방하는 성령훼방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홀로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회개하며 간구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실 줄 믿습니다. 참된 회개만이 성령 받는 길입니다. 모든 인류와 교회 목사님들과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