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은 말씀)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19:10, 14)

(같이 묵상한 말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7:25)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10:18)


열왕기상 18장 QT를 묵상하고 쓰면서 내 다음 묵상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19장으로 넘어갔다. 18장에서 그 뜨겁고 충만했던 엘리야가 19장에 이르러서는 왜 하루 사이에 속수무책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는지, 어떻게 엘리야는 절망과 시험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여러 신학적 해석과 명쾌한 설명이 이미 나와 있을 것이지만, 나는 10절과 14절에서 반복된 엘리야의 말을 붙잡았다. 이 말씀에 어느 정도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엘리야의 말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관련 말씀은 로마서 7장24절에 나타난 바울의 탄식이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엘리야의 한탄과 바울의 탄식이 어쩌면 이렇게 유사할까? 물론 근원적 차이는 있다. 엘리야의 절망은 외적 환경에서 온 것이나, 바울의 탄식은 내적 영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 두 구절의 공통점은 ‘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둘다 오고갈데 없는 사면초가에 빠져있다. 절망 가운데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곤고한 사망의 몸이요 (바울), 또한 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좇기는 한심한 신세였다 (엘리야).

그러면, 예수님은 똑같은 절망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이것은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는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셨다. 당신의 상황이나 소원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다. 이것이 주님의 승리의 비결이 아닐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만을 구하는 것만이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절망 중에 곤고했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도 갑작스러운 국면으로 이루어짐을 본다. 특히 바울의 경우, 바로 그 다음 25절에서 영문도 모를 감사의 찬양과 함께 위대한 8장의 힘찬 승리 선언으로 이어진다. 그가 제시한 해답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7:25)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8:2).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선언한다(8:3).

이것을 베이스로 해서 엘리야에게로 돌아가 본다. 엘리야의 근원적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저희’에 대한 엘리야의 착각이 보인다. 엘리야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사람은 ‘저희’(복수)가 아니라 이세벨이라는 여자 한 사람(단수)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일 힘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왜 그녀는 처음에 사자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알린 것일까? 이세벨의 힘은 남편 아합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합은 전날 갈멜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을 보았다. 최소한 그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요 능력의 종임을 눈으로 보았고 실감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세벨이 어떻게 엘리야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힘을 가진 아합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불가능했다. 막말로 이세벨이 죽이려 든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를 그냥 용인하겠는가?

베드로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에, 대제사장의 뜰 앞에서 그도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았던가? 한갖 여종 앞에서 그는 예수님을 세번 씩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 그 여종이 무슨 힘이 있다고?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아합을 설득하여 바알의 선지자들을 진멸했던 것이 불과 어제가 아니었는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살아계심을 엘리야를 통해서 보지 않았는가? 이세벨이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설계하신 대로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의 두번쩨 착각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자기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7천이나 되는 사람들을 주의 용사로 예비해 두셨다. 왜 이것을 엘리야가 몰랐을까? 18장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회복을 이끌었고 그 결과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진멸하며 승리를 이끌었지 않은가? 이미 국면은 전환되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이 회복되어 갔던 것이다. 그가 묘사했던 절망의 상황은 18장이 아닌 17장에서의 가뭄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영성의 엘리야가 한순간에 어찌 이리 어두워졌을까?

베드로에게로 다시 돌아가 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가르치셨고, 베드로가 즉각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순식간에 칭찬이 책망으로 바뀐 것이다. 그 사이 사단이 베드로의 마음 속에 들어간 것이다. 불과 몇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엇이 베드로의 잘못일까? 예수님의 그다음 말씀이 정답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십자가에 대한 그의 반대는 사람으로부터 즉, 베드로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주님 없이도 나는 ‘주의 일’을 열심히, 아주 잘 할 수 있다. 주님 없이 나는 제자반에서 공부도 잘하고, 성가대로 열심으로 봉사하고, 간증도 잘 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모본이 될 수도 있다. 때론 실제의 내가 이렇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그것이 나로부터의 출발이었을 때, 그것이 내 의와 자랑이 되어버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설 자리가 없어짐을 본다. 예수님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사람들 아니었는가?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 스스로에게서 온 것이 아닌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채찍을 들었지 않은가?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엘리야의 이 모든 착각과 눈멈의 근본 원인은 ‘나’로부터의 출발 때문이 아니었을까? 엘리야의 특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분명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특심이 그 자신의 열심으로 변질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없이 자가발전하는 열심으로 바뀐다면?

왕상19:10 및 14절에서 엘리야는 그의 특심을 기억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특심만을’ 기억했다. 그 특심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주님의 자리는 어디이고 자신의 위치는 어디인지에 대한 은혜의 기억은 잠시 뒤로 한 채로.. 어느새 자가발전시킨 특심 하나만 가지고서 ‘하나님 없이’, 자기만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향한 특심이 그의 자랑이자 의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과 환경을 먼저 쳐다보지 않았을까? 위대한 승리 후에 살며시 찾아오는 교만의 덫에 걸린 것이 아닐까? 그 결과로 자연스레 그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이 아닐까?

이것이 엘리야가 범했던 우가 아니었을까? 그는 주님으로터의 출발로 시작했으나(18장), 어느 시점에서(19장 초반) 자신으로터의 출발로 바뀌어 버렸다. 굳이 교만이라는 말 보다는, 모든 은혜와 능력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주 하나님이신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 아닐까? ‘은혜의 기억’을 잊은 것이리라. 내 열심, 내 기도, 내가 누렸던 기적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행하셨던 주님과 그 은혜의 손길을 기억하라는 것이지 않는가?

교만은 나로부터의 출발이다.
나로부터의 출발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다.
내 안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로부터의 출발은 사단의 속임수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사단의 간교한 전략은 나로부터의 출발을 꾀한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그분은 스스로를 선하다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의 선하심은 오직 아버지께로만 오기 때문이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럼에도 그분은 선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의 모든 선하심을 고스란히 물려 받으셨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다시 은혜를 회복하는 과정은 광야를 통한 여정과 호렙산에서였다. 광야에서의 여정도 주님은 함께 하셨다. 그러나 40주야의 험난한 그 길은 우리네 인생길의 여정과도 같지 않은가? 마침내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다. 감격적인 은혜의 체험이자 제2의 만남, 제2의 축복의 은혜였다. 완전한 은혜의 회복이었다. 아, 좋으신 주님!

(엘리야에게 주셨던 제2의 만남을 내 영이 내 마음에게 주는 독백으로 엮어본다.)

엘리야에게 주셨던 은혜는 무엇이었니?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인가?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인가?
모든 것을 사르는 불인가?
어쩌면 그도 처음엔 이런 것들을 구했을지 몰라.

네게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었니?
때론 바람같이 임하시고
때론 지진같이 흔들어 주시고
때론 불같은 뜨거움을 주시도록 간구했지.
너도 외적 표적에 민감해 있었던 거야.

주님은 내적 혁명가란 말이야.
밖으로 보여지는 표적은 관심이 덜하시거든.
그래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주시지 않았잖아?
밖으로부터의 변화는 자기 것이 되기가 어려워.
진정한 혁명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인거야.

이제 알겠니?
그것은 세미한 소리에서 출발하는 거야.
네가 세상과 환경의 소란함에서 떨어져 있을 때,
네가 영으로 잠잠히 있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소리지.

은혜를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마.
네 안에 계신 주님에게서 찾아야 해.
그런데 네가 분주할 땐
주님께서 말씀하실 자리가 없잖니?
세미한 음성을 네게 주실 자리 말이야.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선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지?
물론 네 마음의 준비 말이야.
네 마음의 딱딱함이 부드러워져야 해.
네 마음의 돌들을 제거해야 해.
네 마음의 가시떨기를 쳐내야 해.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너 자신이야.
네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가난함과 애통함으로 네 연약함을 끌어 안아야 해.
그리곤 주님을 바라 보아야겠지?
주님으로부터의 출발을 시작하는 거야.

이제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무릎기도를 드릴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광야로 향할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옷깃을 여밀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됐니?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
나는 알아. 네가 준비되어 있음을.
이것을 꼭 기억해.
너로부터의 시작은 교만의 파멸이야.
주님으로부터의 시작이 네 제2의 축복이란다.




(후기)
왕상18장 QT는 제자반의 숙제로 한 것입니다. 18장을 보면서 제 마음은 어느덧 19장으로 쏠렸습니다. 엘리야의 인생 여정이 제 인생의 여정과 비슷함을 보았습니다. 바울의 영적 탄식과 베드로의 눈물을 그곳에서 같이 보았습니다. 특새기간 중 롬8장에서 주어진 말씀들이 어우러져 왔습니다. 특새 중에 제게 주신 화두는 주님으로부터의 출발, 은혜의 기억, 제2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 왔습니다. 제 마음이 메어지듯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리 쉬운 것인데.. 왜 이리 보이지 않았을까?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복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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